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진중권 지음 / 푸른숲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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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p.290

진중권의 거칠고 날카로운 세상보기. 글에서 날을 보았다고 하면 과장일까? 맞다, 맞아...라고 중얼거리며 책장을 넘겼으나 가슴 아픈것은 이렇게 지식인들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지식인은 손으로 꼽을 정도라는 것. 여전히 많은 '지식인'들이 조중동 신문 근처를 어슬렁 거리고 있다. 자신의 책을 반납하겠다는 독자에게 '너 전라도 사람이지?'라고 물어보는 대책없는 이문열 같은 이가 이 나라 주류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할 뿐.

그의 글은 날카롭고, 때론 너무 배배 꼬아 말하는거 아닌가 싶도록 신랄하다. 정말 맵고 짜고 쓰구나. 하지만 다들 젠체하며 글쓰는 마당에, 이런 글을 읽는건 상쾌하다. 우아떨면서 가르치려 드는건 딱 질색이거든. 이런 문체 맘에 든다. (내가 비뚤어진 인간이라 그런건지도 모르지)

 

책갈피에 끄적인것을 그대로 옮긴다.

흔히 '자유=민주'라 생각하나 실은 양자는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불평등을 함축한다. 예를 들어 시작에서 경쟁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평등 없는 순수한 자유란 현실 속에선 결국 "다리 밑에서 잠잘 자유"를 의미하게 된다. 나아가 평등 없는 자유가 보수주의와 결합하여 정치적 자유마저 포기할 때 나치즘과 같은 또 하나의 '멋진 신세계'가 펼쳐진다. 한편, '민주'는 본질적으로 평등의 이념이다. 경제적 평등의 요구가 나아가 자유를 억누르며 관철 될 때 공산주의라는 극단이 성립한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라고 자유와 민주를 붙여서 말할 때, 이는 위에서 말한 극단을 피하기 위함이리라. 자유와 민주는 서로 보완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 두 요소가 다양한 형태로 결합하여 다양한 저치적 스펙트럼을 만들어내야 한다. p.97
혼동하기 쉬운 개념. 화들짝 놀라다. 적어도 나란 인간이 신자유주의에 왜 반대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한다.
 
 하지만 '공동체'라는 말 속에 든 반민주적 함의는 어떡하고? 가령 공동체는 동질성을 전제하고, 동질성은 이질적인 것의 배제를 의미하고, 배제는 강제를 내포하고, 강제는 인격적 혹은 비인격적 지배와 폭력을 전제하는 것이다.  p.115
공동체 안에 있으면 이러기 쉽다. 소박하면서도 뭔가 미래지향적인 목표를 갖고 있다고 서로 위로와 격려를 건네면서 결국 경계밖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을 결국 끌어들이지 못하거나 밀어내기까지 했다. 그런 일들이 어찌 한 두번이었겠는가. 최근 '공동체'의 이 폐쇄적인 특성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중이다. 뭐가 그리 별스럽다고, 뭐가 그리 특별하다고 그렇게 배타적인 자세가 되는가. 구성원의 밀도가 높아지는 대신 배타적이 되어야 하는 원칙에 동의를 하고는 있는건가?
 
 우연히 어느 잡지에서 변산 생활공동체에서 애들을 가르치며 지내는 철학자 윤구병 씨의 인터뷰를 읽었다. "땅과 공동체를 살리려고 원시적으로 이 작업을 하는 건 언젠가 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가 놓는 징검다리를 통해 그 위기를 벗어나는 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 내가 보기에는 이런게 "탈근대"다. "조상들의 삶에는 쓰레기가 전혀 없었다. 쓰레기가 일절 없는 삶..." 전통은 이렇게 계승하는 거다. 다 낡은 삼강오륜이나 붙잡고 늘어지는게 아니라. 이 탈근대의 실험을 위해 그는 교수직을 내던졌다고 한다. 이게 바로 "탈주"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일상적 어법으로 털어놓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론적으로도 이 교수 출신 촌 농부의 철학이 세련된 불란서제 소리보다 훨씬 더 풍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118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것이겠지. 나는,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책상물림일 뿐인데....

 

유토피아적 공동체든, 생태공동체든, 소수공동체든, 이런 미시적 공동체의 건설이 거대 산업 사회의 문제를 극복하게 해 줄 거시적 대안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기존의 질서로부터 "탈주"를 꿈꾸며 모든 것을 동질화하는 동일성의 폭력에 저항하는 이 작은 움직임들은 결코 사소하게 취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장기적으로 이 거대한 산업사회를 지금보다 덜 폭력적인 형태로 바꾸는데 필요한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p.124
사소하진 않지만 대안이 될 수는 없을거란 말에 마음 상한다. 이 시스템에서 대안은 무엇일까?


다만 과거에는 폭력적이었던 것이 제도로 바뀌었을 때에는 더 이상 폭력으로 느껴지지 않고, 그것이 폭력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무디게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p.150
나 역시 사형 반대.

남이 동성을 사랑하든, 이성을 사랑하든 내가 거기에 찬성하거나 반대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런 것들은 '찬성'이나 '반대'라는 말이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는 맥락이 아니다. 그걸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 찬반을 표하는 그 행위 자체가 해괴하고 괴상한 일이다. p.160
내말이! 왜 남의 사생활에 그리들 관심이 있는지.

 

한마디로 레드 콤플렉스는 빨갱이에 대한 공포감이 아니다. 외려 삘갱이 잡는 극성스런 반공 투사들에 대한 공포에 가깝다. 말하자면 언제라도 빨갱이로 몰려 죽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강박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반공주의적 언행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p.198
색칠놀이 하는거 이제 그만 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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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이너 학교의 예술로서의 교육
고야스 미치코 외 지음, 김수정 옮김 / 밝은누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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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갑자기 지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깨어나지 않은 의지의 힘과 감정의 힘을 아이로부터 끌어낸다는 뜻입니다. p.83

 발도르프 교육은 어떤 결정된 처방전이라든지 교과 과정이 있어서거기에 꿰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의 보성을 꿰뚫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직 그것뿐입니다. p.84

 슈타이너 학교의 담임 교사는 밤에 잠들기 전에 한 사람 한 사람의 학생을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려 보는 습관을 들인다고 합니다. p.90

 오이리트미 (eurhythmie), 포르멘 (formen), 에포크(Epochenunterricht) 수업.

슈타이너 교육을 표방한다는 한 대안학교의 설명회는 너무도 인상적이라 결국 이 책까지 읽게 만들었다. 사실 슈타이너 교육론은 너무 어려워서 잘 이해를 못하겠다. 특히 '신지학'은 완전 절벽이다. 육체(라이브 leib), 영혼 (젤레 seele), 정신(가이스트, geist)의 구별은 전혀 못하겠다. 영혼과 정신, soul과 spirit이라고 표현하지만 슈타이너가 말하는 것은 신의 영역의 문제다.

 단, 슈타이너 교육에 뜻있는 두 사람과 진행자의 대담을 엮은 책이지만, 표면적이나마 슈타이너 학교 수업을 알 수 있다.
그냥 글자 몇 줄만으로도 난 그 학교에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시스템 안에서 생활할지 밖에서 생활할지 결판 날지도 모르는 중요한 결정.
쉽게 결정할 수가 없다.
정보를 얻으면 얻을수록 머리는 더욱더 복잡하다.
A라는 대안을 갈 것인가, B라는 대안학교를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어떤 삶을 원하는가가 아닐까? 제도 밖에서 살까봐, 평생을 그렇게 변두리로 살까봐 걱정된다지만, 막상 제도 안에서 살고 있는 지금 우리는 행복한지 짚어봐야하지 않을까? 치열한 경쟁만 남은 학교에서 1,2등 하고,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을 얻는것이 목표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이 제도 안에 있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것일까?

슈타이너 교육론 하나 읽고, 나가도 너무 많이 나갔구나. 언제나 내 머리 한 구석을 차지하는 질문이 꼬리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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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진중권 지음 / 푸른숲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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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자유=민주'라 생각하나 실은 양자는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불평등을 함축한다. 예를 들어 시작에서 경쟁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평등 없는 순수한 자유란 현실 속에선 결국 "다리 밑에서 잠잘 자유"를 의미하게 된다. 나아가 평등 없는 자유가 보수주의와 결합하여 정치적 자유마저 포기할 때 나치즘과 같은 또 하나의 '멋진 신세계'가 펼쳐진다. 한편, '민주'는 본질적으로 평등의 이념이다. 경제적 평등의 요구가 나아가 자유를 억누르며 관철 될 때 공산주의라는 극단이 성립한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라고 자유와 민주를 붙여서 말할 때, 이는 위에서 말한 극단을 피하기 위함이리라. 자유와 민주는 서로 보완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 두 요소가 다양한 형태로 결합하여 다양한 저치적 스펙트럼을 만들어내야 한다.-97쪽

하지만 '공동체'라는 말 속에 든 반민주적 함의는 어떡하고? 가령 공동체는 동질성을 전제하고, 동질성은 이질적인 것의 배제를 의미하고, 배제는 강제를 내포하고, 강제는 인격적 혹은 비인격적 지배와 폭력을 전제하는 것이다. -115쪽

우연히 어느 잡지에서 변산 생활공동체에서 애들을 가르치며 지내는 철학자 윤구병 씨의 인터뷰를 읽었다. "땅과 공동체를 살리려고 원시적으로 이 작업을 하는 건 언젠가 위기가 닥쳤을 때 우리가 놓는 징검다리를 통해 그 위기를 벗어나는 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 내가 보기에는 이런게 "탈근대"다. "조상들의 삶에는 쓰레기가 전혀 없었다. 쓰레기가 일절 없는 삶..." 전통은 이렇게 계승하는 거다. 다 낡은 삼강오륜이나 붙잡고 늘어지는게 아니라. 이 탈근대의 실험을 위해 그는 교수직을 내던졌다고 한다. 이게 바로 "탈주"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일상적 어법으로 털어놓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론적으로도 이 교수 출신 촌 농부의 철학이 세련된 불란서제 소리보다 훨씬 더 풍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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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감옥 올 에이지 클래식
미하엘 엔데 지음, 이병서 옮김 / 보물창고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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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의 의지가 미치지 못하는 그런 장소가 정말로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전지전능한 알라의 의지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거기에는 알라의 의지가 미치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왜냐 하면 그의 의지 없이는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으니까요. 그러한 곳이 업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그의 의지가 존재하지 않음은 곧 그의 의지가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제한된 인간의 상식으로 보면 이따금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도 완전한 전능함 속에서는 모순이 아닙니다. 악령 이블리스 역시 그에게 속할 수 밖에 없고 그 없이는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p. 282 <자유의 감옥>

 

환상적인 소설이라는 점에서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또 가능하지 않은 건축물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선 보르헤스가 떠올랐다. (어이구, 보르헤스라니...)

동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동화를 어린이가 읽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한정한다면 동화가 아니다. 물론 동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환상과 상상이 펼쳐진다는 점에서.

 

여덟편의 중단편은 하나같이 독특하다.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기이한 공간 혹은 건축물에 대한 끝없는 상상이다.

존재하지 않을법한 그림 속의 성(城)을 찾아 일생을 바치는 사람이야기 <긴 여행의 목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모든 존재가 작아져 결코 끝에 다다를 수 없는 공간 <보로메오 콜미의 통로>, 서로 거울처럼 똑같은 외벽만 존재할 뿐 안쪽의 공간은 없는 집 <교외의 집>, 보기엔 아주 작지만 막상 타보면 여덟 식구 대가족이 넉넉히 탈 수 있고, 심지어 그들의 거주 공간과 차고지마저 싣고 다니는 기이한 차 이야기 <조금 작지만 괜찮아>,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이곳으로 왔는지 과거 기억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외부세계와 철저히 단절된 <미스라임의 동굴>, 유기 생명체처럼 살아 숨시는 '완벽'한 건물들이 존재하는 <여행가 막스 무토의 비망록>, 아무런 조언도 존재하지 않는, 오로지 자신의 선택만이 '자유롭게' 남아있는 감옥 아닌 감옥 <자유의 감옥>, 진짜 기적의 세계로 통하는 문 <길잡이의 전설>. 이 단편들은 물론 공간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겐 이야기를 끌어가는 그 공간들이 매혹적이었다. 이성과 과학으로는 절대 존재할 수 없을 공간들. 실재한다면 나는 그 공간앞에서 공포에 떨겠지만, 상상만으로도 흥미롭지 않은가.

 

미하엘 엔데의 동화 중 <꿈을 먹는 요정>이란게 있다. 제목만 봐선 얘쁜 꿈을 먹어치우는 무시무시한 괴물일것 같지만, 사실은 생긴건 고약스럽지만 악몽을 제일로 맛있어 하는 요정이야기다. 그 책을 보면서도 관념을 뒤집는 상상력에 기쁘게 웃었더랬다. 엔데의 독특한 상상력이다.

말년에 썼다는 이 단편들은 신과 믿음과 존재에 관한 질문으로도 읽힌다. 물론 심각하지 않게, 관념을 뒤집는 상상력으로 그 질문 앞에 서게 한다. 집은? 믿음은? 기적은? 꿈은? 진실은?

 

하여, 짧은 단편들을 읽어내며 머릿속은 어지럽다.

엔데는 정말 동화작가라고 불러야 마땅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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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이명원 지음 / 새움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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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명원을 모른다. 어렴풋한 기억속에 있을 뿐. 그나마 책날개를 보고 기억났다.  돈으로, 사람으로, 학교로 얽혀있는 대학교수판을 대놓고 엎어놓았던 인물. 유명한 국문학자의 논문을 표절이라고 만방에 알렸던 인물.

 

그 패기 아직도 하늘을 찔러, 이 책에서도 날카롭게, 냉정하게 때로 포근하게 비평을 펼치고 있다.  세상 사람 모두 '아름답다' 한마디로 통일해 찬미하는 김훈의 소설을 평하길 '그 아득한 뱀을 연상하게 만드는 문장들은, 언어적 페티시즘이다. 적어도 소설은 문체의 충만을 넘어서는 곳에 존재한다.' p.28이라고 말한다. (오호라. 내가 심하게 삐딱한 인간은 아니었구나)

<발로 차주고 싶은 아쿠타가와상>p.12 . 하하,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에 관한 비평이다.  어머나 여기서도 맘에 들어라. 당최 무슨무슨 상이라고 하는 타이틀은 믿을 게 못 된다. <뱀에게 피어싱>도 어지간히 실망했다고.

 

그 이유인즉 평론가들이 탁월한 작품이라고 평가한 것들을 읽어보았는데, 자신으로선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적 인간관계> p.232  문학평론가가 꿈이라는 대학생의 절망섞인 고백앞에서 그는 주저없이 말한다. '주례사 평론'을 때려 치우라고. 문학판이라는 것이 어찌 돌아가는지 자세한 내막이야 일개 철딱서니로서야 알 수 없다. 하지만 소설책 뒤에 붙어다니는 추천의 글, 평론 등으로 짐작도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 멋지고, 다 문제작이며, 다 훌륭하단다. 에이~ 거짓말. 다 광고지? 

그의 말처럼 독자들이 비평에서 읽고 싶어하는것은 정교한 분석이나, 작품의 해체가 아닐 것이다.  또다른 내면의 글, 백사람이 좋다고 했을지언정, 나는 이러저러해서 별로였다고 말하는 비평의 글을 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함을 바탕으로 한 글 말이다.

 

난 글을 잘 쓸 재주도 없고, 글을 잘 읽을(해석할) 재주도 없는 인간이다. 하지만, 글에서 진정성을 느낄 정도의 오감은 있는것 같다. 이명원의 글은 내 취향에는 다소 딱딱한 감이 있다. 하지만 그는 진정 문학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애정을 갖고 끊임없이 채근하고 있다. 어쩌면 그나마 이만큼 글을 모으기까지는 그의 '마음이 소금밭'이었으리라. 독야청청한 왕따의 길을 기꺼이 걷고 있으니.

 

하지만, 솔직하게 더 얘기하자면, 여기저기 실렸던 짧은 글들을 모아놓은 탓에 좀 산만하다. 또 비평이라는 이름을 달기엔 감성이 조금 앞섰다.  서평 모음이라기에도 어설프고, 문화평론이라기에도 좀 모자란 듯한 책. 그렇다고 내칠만큼 나쁘지도 않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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