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 1 - 안드로메다 하이츠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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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 - 왕국 1


그 왕국에는 식물의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산다



나는 어렸을 때 식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미신에 가까운 믿음인데, 그래서 큰 나무에게 소원을 빌거나 꽃을 통해 무언가 굉장한 일을 이루려고 했었다. 물론 그런 상상 중 이뤄진 것은 없지만, 대신 식물들에게서 많은 것을 받았다. 나는 사람보다 나무나 풀을 더 좋아하는 아이였고, 그래서 어린 시절 내 기억의 평화로운 부분에는 늘 식물의 푸른빛이 감돌고 있다. 그런 기억들은 가끔 내가 답답함을 느낄 때 나를 붙잡아주는 것들 중 하나이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어린 시절 손끝을 물들이던 풀물의 향기가 감도는 것 같은 기분이라서. 그 기분을 뭐라 전해야 할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내 기억과 소설의 분위기가 겹쳐지면서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완전히 마음에 든 것만은 아니었다. 가령, 소설 속 인물들이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소설의 전반적인 느낌은 마음에 들었지만 그 인물 하나하나에 마음이 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옆집 이웃을 미워하거나 짝사랑을 악취로 표현하는 주인공 시즈쿠이시의 태도에 당황하곤 했다. 물론 식물이라고 늘 평화롭고 다정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어쩐지 내가 아는 나무와 풀들은 그런 생각보다는 태양을 바라보며 어깨를 쭉 펼 것만 같다는 생각에 이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 소설에는 태양의 질감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산에서 내려온, 식물성 인간인 시즈쿠이시도 그렇지만 다른 주인공, 이를테면 가에데나 시즈쿠이시의 연인인 신이치로도 식물성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직은 조금 모가 난 시즈쿠이시(어쩌면 그것은 그녀가 선인장과 이어졌기 때문일까?)와 달리 가에데는 마치 이끼처럼 조용하고 촉촉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다. 그는 아직 어린 시즈쿠이시를 잘 달래주는, 마치 아버지와 같은 존재처럼 보인다. 반면 신이치로는 수줍음이 많은 작은 풀꽃같다. 낯을 많이 가려서 구석에 혼자 핀 풀꽃 말이다. 연약한 듯 보이지만 혼자서도 꿋꿋한 것이 꼭 그렇다.

바나나의 글이 대부분 그렇듯이 소설은 무척 조용히 전개된다. 어조도 다정하고 부드럽다. 일견 신비스럽기도 하다. 읽고 나면 어쩐지 묘한 시공간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다. 다만 불만이 있다면 아직 이 식물성 인간들이 태양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것처럼 나온다는 것이다. 나에게 나무와 풀들은 언제나 태양을 향해 활짝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드는, 그렇게 열심히 사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이 식물성 인간들이 대체 무엇을 열심히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단지 이 세상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을 뿐이다. 이 역시 한 자리에 뿌리를 박고 사는 식물과는 거리가 멀어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 <왕국>의 인물들은 식물성 인간들이라기보다는 단지 그렇게 믿고 싶은 인간들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 이야기는 시작이니까, 끝까지 조금 더 기다려볼까 한다. 가에데가 떠난 다음 과연 이 왕국은 어떤 이야기로 채워질까? 책 서두에 이 이야기는 나와 가에데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시즈쿠이시는 가에데에게 가는 것일까? 다음 권이 기대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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