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텍스트에서 영상으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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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 대디 (2disc)
최종태 감독, 이문식 외 출연 / 엔터원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이벤트로 받은 2000원 할인권으로 영화 <플라이 대디>를 보러 갔다. 사실 몇 번이나 말했듯이 원작, 그리고 가네시로 카즈키가 직접 시나리오를 쓴 일본판 영화는 내게 선명한 인상을 남겼기에 한국판 영화도 한번쯤은 보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적잖게 실망하고야 말았다. 글쎄, 차라리 원작을 보지 않았더라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였을지도 모른다. 조금 웃기고 좀 감동적이고 꽤 어설픈, 그래서 2000원 할인권에 조조로 2500원짜리 표를 끊어 보기에 딱 적당한 그런 영화 말이다. 별로 재미는 없었지만 그럭저럭 했어, 라고 지금 이 후기에 적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원작을 읽었다. 일본판 영화는 원작소설과 거의 똑같으니 같이 묶어서 치겠다. 그리고 그 원작과 비교했을 때, 영화는 좀 한심스럽기까지 한다.
작년에 배웠던 현대문학 강의 시간에 <말아톤>의 시나리오를 본 적이 있다. 그때 우리를 가르쳤던 선생님은 말아톤의 원래 시나리오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말아톤의 감독과 시나리오는 우리 학교 출신이다) 본래 그 시나리오의 주인공은 초원이의 엄마가 아니라 코치였다고 한다. 나름의 상처를 입고 있던 코치가 초원이와 교감해가는 그런 식으로. 하지만 아마도(사정은 그 선생님 역시 모르실테니) ‘흥행’상의 문제 때문에 주인공이 코치에서 어머니로, 주제가 소통에서 감동적인 모성애로 바뀌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시며 아쉬워하셨다. 참고로 문학적인 아름다움은 처음 시나리오가 훨씬 나았다고 평하셨다.
그리고 <플라이 대디>. 이것도 내가 보기에는 <말아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원작소설을 보면 알겠지만, 그 소설의 주제는 단순히 부성애로 한정지을 수는 없다. 물론 부성애는 강한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그 부성애를 가지고 그려내는 이야기는 단순히 아버지의 사랑이 아닌 그 너머의 것, 즉 자유이다. 자신의 틀 안에서 살아가던 나약한 아버지가 부성애라는 힘을 통해 스스로의 세계를 깨고 자유롭게, ‘매의 춤’을 추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플라이 대디 플라이>의 주제인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주인공 승석(원작에서는 순신)이 겉은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상처 입은 어린아이라는 것도 우스운 설정이다. 승석의 자리는 자유로운 사람의 그곳에 있어야 한다. 원작에서 순신은 결전의 날 바로 전날 가진 즐거운 휴식에서 내가 그토록 멋있다고 칭찬하는 ‘매의 춤’을 춘다. 순신은 단순히 부모의 이혼에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아이가 아니라 자신에게 가해진 차별과 부당함을 신체적 정신적 강인함으로 모두 끊어버리고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진정한 ‘스승’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승석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나는 그것이 한없이 기분이 나빴다. 결코 부성애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도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나는 매일 나오고 또 나오는 그런 흔한 감동스토리보다는 진정 우리의 안정된 세계를 깨부수고 날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그런 영화를 원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버지 장가필은 결국 다시 안정된 세계로 돌아간다. 나는 그 승리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심스럽다. 그는 자신의 강함으로 남들을-특히 가족과, 어린 승석- 지켜줄 수 있다고 자기위안을 얻었을 뿐이다. 그가 정말 자유로워졌을까? 그는 그냥 주먹이 세진 것뿐이다. 자신의 세계를 깨고 날아오르진 못했다. 단지 자신의 세계를 더욱 강하게 지킬 수 있게 되었을 뿐이지.
또한 승석(순신)의 친구들의 모습도 불만이었다. 원작에서 순신의 친구들은, 비록 <플라이 대디 플라이>에서는 별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하지만, 사실 굉장히 중요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재일교포인 순신과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차별을 안고 살아간다. 또한 그들은 꼴통 고등학교의 꼴통 학생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역시 자유롭다. 엄숙한 척 차별을 하는 세상에 유쾌한 반란을 벌이는 전사들이란 말이다. 하지만 <플라이 대디>에서는 그냥 조금 착하고 발랄한 고등학생으로 나왔다. 개인적으로 참을 수 없는 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엉망이 되고, 그러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야마시타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더 좀비즈' 시리즈의 마지막 <Speed>에서 야마시타를 가리켜 ‘이 녀석이 모든 불행을 껴안았기 때문에 지구에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얼마나 감격했던지.)
이러한 이유로, 내 생각에 <플라이 대디>에서 아버지 장가필은 날지 못했다. 그는 그냥 주저앉아버리곤 ‘자신의 반경 1m’를 단단히 했을 뿐이다. 마지막 딸의 원수의 목을 계속 조르지 않고, ‘진정 자유로워지기 위해’, ‘자신의 복수심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기 위해’ 그를 놓아주었던 아버지는 없다. 그저 자신이 자신의 가족을 자신의 품 안에 지킬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을 뿐. 난 원작의 아버지가 한없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