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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백민석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갑자기 친구에게서 문자가 날아왔다. 백민석 절필한다네. 나는 놀라서 그럴 리 없다, 만 멍청하게 반복하며 당장 인터넷 검색을 했다. 사실이었다. 이런! 비록 소장한 책은 한 권 뿐이지만 그 한 권이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책 중 하나였다. 허무함과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 사이에서 다시 그의 소설,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을 읽었다.
고등학생 때였다. 아직 책 표지들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 와중에 깔끔한 블랙에 은색으로 기괴한 소년 그림이 그려져 있고 안상수체를 연상케 하는 연두색 서체로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이라고 쓰인 그의 책은 특별했다. 나는 단순히 책이 예뻐서 읽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그 자리에서 그 책에 푹 빠져버렸다. 당시 내가 좋아한 단편은 첫 번째 단편인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과 자전적 소설인 <이 친구를 보라>이었다. 지지리 궁상떠는 데에 선수였던 여고생은 ‘나의 가난은 모두가 가난한 시절의 가난이 아니었다.’라고 말하는 작가에게 우습게도 동질감이라는 걸 느꼈던 터였다. 당시 나는 절대 내 돈으로 책을 사지 않던 아이였다. 그런데도 그 책만큼은 꼭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샀다. 무슨 돈으로 샀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어쨌든 나는 그 책을 손에 넣었고, 심지어 수학여행 때까지 손에 달고 다녔다.
당시 나의 좁은 식견으로서는 소설이 이해되지 않는 점도 너무 많았다. 어째서 그토록 유령이 소설 이곳저곳에 떠다니는가? 작가가 어떠한 <기억을 되살리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유령을 등장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딱 2년이 걸렸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왜 유령이 그 소설에서 둥둥 떠다니는지 이해했고 그걸 내 소설에 써먹었다. 죽었지만 죽지 않는 존재들이 내 소설이도 떠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백민석과는 정 반대로 무섭지 않고 오히려 그리운 존재였지만 말이다.
유럽에 유령이 떠돈다고 선언한 것이 공산당이라면 한국 사회에 유령이 떠돈다고 선언한 것은 백민석일 것이다. 그는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에서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가 유령임을 모르거나, 혹은 보지 못하는 유령들을 끈질기게 되살린다. 그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우리가 그들과 눈이 마주칠 때, 우리는 섬뜩함과 동질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러한 기묘한 느낌이, 내게는 <목화밭 엽기전>의 엽기적인 행각들보다 더 무서웠다. 아니, 솔직히 <목화밭 엽기전>, 하나도 엽기적이지 않았다. 나는 그보다 더 엽기적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슬픈 동물이라서. 그러나 유령이 내 곁을 지나간다는 상상에는 오싹했다. 잊으려 했지만 잊혀지지도 죽지도 않고 우리 곁을 여전히 지키고 있는 유령들. 때로는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때로는 잊혀지지 않는 진실로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 백민석이 살려낸 것은 단지 눈두덩이 썩어서 줄줄 흐르는 유령이 아니라 진실이다. 그의 소설을 읽은 것은 나에게 문학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라는 걸 깨닫게 해준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절필을 했단다. 그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책장을 파르르 넘기면 툭툭 떨어지는 유령에게 묻는다. 그도 박범신처럼 다시 돌아오겠지,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