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시탈, 그의 정체성에 관하여


현재 TV에서 방영되고 있는 <각시탈>은 1974년 허영만의 작품인 <각시탈>을 각색하여 만든 드라마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군의 두 아들의 정체성을 그린 작품이다. 형은 독립 운동을 하다 바보가 되고 동생은 가족을 풍미박산으로 만든 조국 조선에 회의를 품고 순사가 된다. 그러나 그를 그를 괴롭히는 사람은 <각시탈>, 그의 형이다. 















결국 강토는 자신의 손으로 형을 죽이고 각시탈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오열한다. 그리고 그 탈을 집어들다고 형을 대신하여 각시탈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겉으로는 친일 순사로, 안으로는 독립투쟁을 하는 각시탈로 살아간다. 이중적 잣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강토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우린 안에는 분명 각시탈이 존재한다. 한 면은 정의를 위해서 목숨을 건 사나이가, 한 면은 세상과 타협하며 비굴하게 살아가는 비겁한 사람이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이 드라마를 통해 자칫 친일과 같은 죄악을 정당할시킬 수 있다. '그러나 내면은 독립군이 아닌가'라는 변명으로 말이다. 감추어진 존재가 진짜이고 겉은 가짜이다라고 말하기에는 왠지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가운데 알고보면 속으로 착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는가? 모두가 착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악당인 것이다. 그러면 사회는 그 악당을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용서해 주어도 될까? 


우리는 어쩌면 영웅의 없는 시대에 각시탈과 같은 영웅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지도 모른다. 약자인 것을 빌미삼아 나를 위해 누군가가 싸워 주기를 기대하듯 말이다. 이건 솔직히 비겁한 것 같다. 각시탈은 우리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동시에 비겁하고 옹졸한 모습을 극단화 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하기를 포기하고 누군가의 희생을 삼아 위안을 얻으려는 대중심리? 뭐 그런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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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敎養)이란 무엇인가?

 

교양을 한자어이고 뜻을 보면, 가르칠 敎와 기를 養이 합해지 만들어진 것이다. ‘가르치고 길러서 온전한 인격체로 만들어가는 것이 교양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교양을 영어로는 culture(걸쳐)로 번역하고 있고, 독일어로는 bildung(빌둥)이라고 번역한다. 우리는 대개 예의바른 사람을 ‘교양있다’라고 표현한다. 틀인 말은 아니지만 예의로만 교양을 담기에는 턱부족이다. 단국대 김주언 교수는 이렇게 교양을 정의한다.

 

“한 개인의 인격 형성과 발전에 필요한 인문학적 소양의 습득을 통해 일정한 문화이상을 체득하고, 세상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비로소 교양이다. 특히, 18세기의 독일이나 19세기의 영국에서 강조된 전통적 의미의 교양은 인간의 전인적 자기 완성, 자기를 넘어 다른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정신적 개방성, 자기의 이해관계를 벗어난 사심 없는 자기 초월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교양을 간단하게 정의해보면 인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사회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전인적 완성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교양있다’는 표현이 그리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예의바름은 교양의 중요한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교양은 자기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그리기 위해서는 생존을 뛰어넘어 하나의 인격체로서 자기실현과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이러한 교양의 필수불가결한 의미 때문에 필수선택이 나닌 그야말로 ‘교양’이 필요한 것이다. 적당하게 시험을 치고 넘어가는 ‘교양과목’이 되지는 말아야 하는 것이다. 진작 중요한 것은 영어스피치나, 어셈블리 언어가 아니라 교양이다.

 

교양 갖추기는 마치 확률게임과 같다. 수많은 실험과 지식의 축적을 통해 공통점을 찾아내고 거대담론이란 화려한 문구가 아니더라도 인간이 가야할 보편적 원리를 찾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교양은 불가피하게 잡다함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고, 손에 잡히지 않는 수많은 자식들을 과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지 않더라고 그럴 위험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면 죽어야 하는 시간의 운명과 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는 진정한 교양을 찾는데 장애물들이다. 그러나 현대는 그러한 장애물을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독서’이다. 특별히 2000년대 이후로 넘어오면서 수많은 외국의 책들이 번역되었을 뿐 아니라 동서양을 교류할 수 있는 인터넷과 소셜 네트웍이 구축되어있다. 이뿐 아니라 독해가 어려운 수많은 고대고전들도 현대어로 번역되어있고, 원문도 사전이나 다른 도구를 통해 쉽게 전근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현대의 상황들은 교양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선택의 여지가 너무 많기 때문에 정보의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는 위험성도 도사린다. 평생 공부만 하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교양이란 의미안에 반드시 생존에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됨을 위해 갖추어야할 소양을 위해 불가피하게 잡다한 지식의 세계로 갈 수 밖에 없다. 교양에 포함되어야할 가장 중요한 몇 가지는 먼저, 철학, 역사, 정치 등의 인문학 관련 서적이다. 세계사는 인간사다. 철학과 역사의 과정을 통해 인간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동경대 학생들을 위해 동경대 교양학부에서 펴낸 [교양이란 무엇인가]는 결국 살아가면서 배워야할 수많은 지식을 독서를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독서야말로 교양인으로 만들어가는 가장 중요하고 수월한 수단이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지식을 습득할 수는 없지 않는가. 
















고대헬라 철학에서의 교양은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뜻했다. 플라톤의 철인의 정치를 꿈꾸었던 것은 교양있는 사람이 교양있게 정치를 해야 올바른 정치가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철인의 정치는 이성이 최고로 발달한 지능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재의식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실철할 사람으로서의 철인이다. 그래서 교양에서 철학이 빠져서는 안되는 이유다. 또 하나의 역사가 들어가야하는 이유가 있다. 역사는 사고의 변화와 성숙의 과정을 그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를 넘어 역사로 기록된 시기는 불과 5천년 밖에 되지 않는다. 기록을 통해 지식을 축적되고 사고이 영역은 확장되었다. 또한 기록은 변천의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보고이다. 아직 완전에 이르지 못한 사고의 변천은 더욱 많은 철학적 사고를 과제로 남겨주고 있다. 


몇 달전 최재천 교수가 멋진 책을 하나 출간했다. 이름햐야 [통섭의 식탁]이다. 결론은 모든 지식은 통합되어야 하고, 공통점과 원리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단절된 학문은 진정한 학문이 아니다. 모든 학문을 통합되어야 한다. 음악과 수학이 다르지 않고, 수학과 지구과학이 다르지 않듯이 말이다. 모든 학문을 통합되어야 하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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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에나가 타미오 지음, 박필임 옮김 / 예경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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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힘을 실험하다 - 나와 세상을 바꾸는 생각의 힘
린 맥타가트 지음, 박중서 옮김 / 두레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뇌를 통해 온 몸을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주장. 뻔하면서도 재미난 그의 주장에 상당히 매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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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사람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얼마 전 어떤 글을 읽었는데 주제는 '사람은 무엇을 원하는가?' 이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몇 가지는 분명하게 각인 되어있다.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정말 단순하고 원초적이다. 

가장 원하는 것은? 섹스, 음식, 명예

가장 갖고 싶어하는 것은? 돈

사람은 왜 돈을 그리도 좋아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뭐든지 돈이 해주기 때문이다. 현대에서 돈은 거의 신의 위치에 서있다. 아니 돈을 위해서는 신도 배신한다. 그러니 친구니 가족이니 하는 그런 것들은 순위에 들지도 못한다.



인류의 역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돈의 역사이다. 실크로드니, 십자군 전쟁이니, 항해사니 하는 모든 것들은 그 중심에 '돈'이 턱하니 자리잡고 있다. 그만큼 인간은 돈을 좋아하고 돈에 정신 없이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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