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부여의 기술 - 평범함을 위대함으로 바꾸는 8가지 코드
인터브랜드 지음 / 엔트리(메가스터디북스)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잉여인간 시대, 의미있는 인간이고 싶다

 

근대화 이후 인간은 부속품이 되었다. 아니면 효율을 따라 분류 되었다.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가는 얼마나 효율이 좋은가를 따진 후 정해진다. 우리는 이것을 일당이라고도 하고, 연봉으로도 부른다. 하루 2만 원짜리가 있고 50만 원짜리 인간이 있다. 이것을 실감한 건 교통사고 후였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직업과 연봉을 물었다. 보험사 직원이 대뜸 하는 말.


"하루 8만 원짜리네요!"

"?"

"죄송합니다. 하루에 일당 8만원씩 계산해 보상금이 지급 될 겁니다."


그때서야 하루 입원함으로 손해되는 돈을 계산한 것이다. 월급과 연봉을 따진 다음 보험사에서 보상금으로 지급되는 돈이라고 한다. 그랬다. 난 하루 8만 원짜리 인간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 푼도 안 나온다고 한다. 왜냐고 물으니 소득신고가 없기 때문에 무직자로 처리되어 없단다. 정말 기가 막혀도 단단히 막힌다. 어쩔 수 있나 법적으로 증명한 방법이 없으니. 이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존재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아무렇게나 평가 절하되고 무시되고 싶지 않다.



이 책은 특이하다. 마케팅 관련 책인데 책을 열어 보면 그림이나 사진이 단 한 장도 없다. 어리숙해 보이는 글만 잔뜩 올라와 있다. 비주얼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책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을 읽고 있으면 그림이 그려지고, 고개가 끄덕여진다. 글로 그림을 그려주고,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일 것이다. 8개의 주제로 분류하여 인간이 어떻게 상품에 매료되는가를 찾아 간다. 마케팅은 결국 인간학이 아니던가. 인문학적 관점이 사라진다면 결코 올바른 마케팅을 펼칠 수 없을 것이다. 제목을 유심히 살펴보자. 제목에 책의 전반적인 흐림이 보인다.

 

1장 브랜드의 완성이 사람이다.

2장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3장 대체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찾아라.

4'여기'에 주목하고 '저기'를 좋아하고, '거기'를 지향하라.

5장 어떻게 실행, 유지할 것인가

6장 모든 가능성 안에서 시간을 고려하라.

7장 디지털 세상에서 관계 맺기

8장 정치도 브랜드 시대

 

1장에서 주목하는 단어는 '브랜드 내재화'. 고객이 아닌 직원들이 자신의 회사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는 방법을 소개한다.

 

저자는 여기서 내재화 단계를 '이해' '믿음' '행동'의 단계로 구분한다. 이해는 '조직 구성원에게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와 브랜드 체계를 충분히 설명해 브랜드를 이해시키는 단계'.(18)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강제하는 가르침이 아닌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내가 참여하면 충성도가 높아진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믿음인데, '가슴으로 느끼는 단계'. 마지막 단계는 행동하는 단계로 브랜드 가치를 직접 실천하도록 유도한다. 실천방법에서 여러 가지를 알려 주지만 마음에 울림이 있는 문장은 '지배하지 말고 함께 만들어라'이다. 앞서 첫 번째 단계서 직원들의 참여를 유도함으로 브랜드 충성도는 높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내가 투자한 회사가 곧 내 회사가 된다.

 

두 번째 장은 이야기로 넘어 간다. 사람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전제 아래 어떻게 브랜드를 이야기로 만들까를 고심한다. 그런데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이 뭘까? 단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식의 이야기는 아니지 않는가. 저자는 여기서 다음 문장을 끄집어낸다.


"갤럭시에는 유저 User가 있고, 아이폰에는 팬 Fan이 있다."


유저와 팬의 차이는 누가 리더이고 팔로우인가는 가늠하게 한다. 유저는 도구를 사용한다. 그러나 팬은 리더를 따르고 좋아하고 열광하기까지 한다. 이야기는 결국 난관에 부닥치지만 이겨내는 기승전결의 플롯이다. 사람들은 이곳에 감동하고 흥분한다. 브랜드 역시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단순한 도구가 아닌 브랜드의 이야기를 듣고 매료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저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스토리를 구성할 때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네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이야기에서 진정성이 느껴져야 한다. 브랜드가 전달하는 진심에 청자들이 공감해야 한다. 둘째, 흥미가 있어야 한다. 브랜드 이야기 스토리도 '이야기'. 흥미롭지 않으면 기록되지 못한다. 셋째, 브랜드만의 특별함이 있어야 한다. 브랜드 스토리 목적은 브랜드의 차별성을 구축하는 것이다. 넷째, 그 특별함이 고객의 삶에서 가치가 있어야 한다. 자신과 연관이 있다고 느껴질 때 그 브랜드는 스토리는 어필할 수 있다."(53)

 

진정성, 흥미, 특별함(차별성), 마지막으로 고객관의 연관이다. 네 번째가 가장 중요하다. 진정성이 있고, 흥미롭고, 특별해도 '나와 무슨 상관인데?'라고 한다면 끝이다. 결국 소비자는 나와 연관이 있을 때 애착을 느끼고 사고 싶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교보생명 홍보팀 박치수 상무와의 인터뷰는 의미심장하다. 박치수는 고객들로 하여금 홍보 문구를 직접 선택하도록 했고, 동참하게 했더니 교보생명에 대한 이해가 놓아지고 충성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결국 나와 상관있어야 한다.

 

그림 한 장 없는 썰렁한 책인데 나를 돌아보고 삶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이 책이 좋다. 단순히 마케팅 책으로만 읽지 말고 인간을 이해하는 인문학 책으로 읽기를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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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인간, 그들을 보는 시


이번에 북인더갭에서 새로운 책을 출간했다. 제목은 '차브' 생면부지의 단어다. 경제학에 젬병인 탓에 불가피하게 인터넷을 검색하며 찾았다. 도착한 곳은 놀랍게도 '잉여인간'이다. 한국일보의 박주희 기자의 차브에 대한 설명이다. 

차브(chavs)는 영국에서 “무식쟁이 하층계급”을 뜻하는 신조어다. 영국사회에서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차브를 공격하는 법’ ‘차브를 마주치지 않는 루트가 담긴 여행상품’ 등 이들에 대한 비아냥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주류인사들은 차브를 ‘복지 식객’이라며 비난하고 조롱한다. 그렇다고 차브가 불한당이거나 세금에 의지해 살아가는 식충이는 아니다. 청소부, 슈퍼마켓 계산원, 패스트푸드 점원 등 평범한 노동자다. 그럼에도 이들은 “더러운 돼지” 취급을 받는다. 축구 선수 데이비드 베컴과 웨인 루니, 가수 셰릴 콜도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차브라고 놀림 받는다. 이 단어는 2008년 옥스퍼드 사전에 정식 등재됐다.


중산층의 모멸대상인 차브, 그러나 그들은 어엿한 생존을 위한 노동을 지불하는 평범한 시민이다. 그러나 풍성할 수 없는 수입으로 삶을 겨우 '지탱'한다. 이 책에서 두 소녀의 실종 사건을 다루면서, 결국 두 소녀의 실종은 현상금을 노린 자작금임을 밝혀지면서 차브 계층에 대한 모욕적인 태도로 돌변하게 된다. 영국 시민들은 소녀의 부모를 비도덕적인 존재로 비아냥 거리며 '너희들은 어쩔 수 없다'라고 단정 짓는다. 현재 영국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들은 왜 차브가 되었는가? 먼저 잉여인간부터 들여다 보자. 잉여인간은 1958년 소설을 통해 생겨난 말이지만, 우습게도 <말죽거리 잔혹사>에 등장한다. 성정을 엉망으로 받아로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말한다. 

"너 대학 안가면 뭔줄 알아? 잉여인간이야 잉여인간"

잉여(剩餘)는 사전적으로 쓰고난 나머지란 말이며, 사회적으로 있을 필요가 없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를 뜻하다. 예를 들어 노숙자, 거지, 깡패, 저능아, 천민계층 등을 뜻한다. 차브를 번역하면 '잉여인간' 쯤 될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차브, 즉 잉여인간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저자는 정부와 언론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정부는 1980년 탈산업화 과정에서 제조업이 사양길로 접어 들고 소수가 이익을 독식하는 금융산업을 육성한다. 이것은 노동자들에게 치명적인 독이 된다. 노동은 존재의 가치로 인정하지 않고 경제적 효율로 보는 순간 노동과 돈을 치환시킨다. 노동계급의 소멸이 일어나고 비정규적이 넘쳐나기 시작한다. 이 때 언론은 삶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의지로 몰아간다. 결국 가난한 이유는 구조적 문제가 아닌 개인의 게으름과 어리석음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차브의 등장이 과연 개인의 문제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장하준은 그의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동일한 일을 하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수십만원을 벌고, 어떤 나라에서는 고작 몇 달러에 머무는 현상을 찾아낸다. 그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하루에 10달러 이상 벌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은 게으른 탓인가? 그들이 능력이 부족해서일까? 장하준은 뉴델리의 버스기사와 스웨덴의 버스 기사 수입을 비교해 스웨덴이 뉴델리 버스보다 50이상 수입이 높다. 50배 이상 운전을 잘해서일까? 아니다. '보호주의 덕택'이다. 만약 스웨덴 버스 기사가 뉴델리 버스 기사와 함께 지원서를 낸다면 사장은 누구를 선택할까? 운전을 50배 잘하는 스웨덴 버스기사를 선택할까? 그러지 않을 것이다. 

















차브를 만드는 것은 저자의 주장처럼 개인의 능력차가 아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무리 일해도 부자가 될 수 없도록 만드는 사회적 구조와 법 때문이다. 자유시장경제체제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도 어느새 '알바'와 시급제 노동자가 급속하게 많아졌다. 심지어 노동회사에서 기업에 파견하는 파견 노동자까지 만들어지고 있는 형태다. 실제 현장 직원들과 동일한 시간에 출퇴근하고 동일한 작업을 해도 수입도 반도 안되는 경우가 많다. 작년 7월 10일 한겨레 신문에서는 바로 이점을 들면서 실제적으로 삼성이 모든것을 간섭하면서도 사고가 일어나거나 노동문제가 일어나면 파견된 노동자이기에 삼성 소관이 아니라고 발뺌하고 있다.(기사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595214.html


대형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직접 일했던 아줌마는 하루 8시간을 일해도 100만원도 안되는 수입에 질렸다면서 두 달만에 그만 두었다고 한다. 수고한 노동에 비해 수입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대형마트가 하루에 벌어들이는 수입은 수억에 달하지만 그것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진짜 노동자는 착취 당하고 있는 것이다. 차브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능력으로 생존이  불가능한 지경이다. 그런데도 정부와 보수언론은 그들을 무능하고 게으론 존재, 복지비용이나 탐하는 존재로 낙인찍고 있다. 이러한 낙인 배후에는 구조적 착취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복지비용을 더욱 줄여 가진 자들에게 더 많은 이익은 배분함으로 보이지 않는 계급를 만들어 내고, 강화 시킨다. 출판사의 소개문을 그대로 옮겨 보자.


잘 알려진 대로 영국은 산업혁명의 주역으로 섬유, 탄광, 자동차 등 한때 잘나가는 제조업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대처가 집권하면서 거대한 탈산업화가 시작되었고, 영국은 금융과 정보, 엔터테인먼트 같은 비제조업 쪽으로 선회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대처는 노동조합을 강하게 탄압했고, 광부노조를 힘으로 굴복시킴으로써 노조가 더이상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또한 90년대 집권한 신노동당은 더이상 노동계급의 당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는 모두 중간계급’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노동 유연성을 강조했고 누구든 실력만 있으면 중간계급이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줬다. 그러나 대처 시대의 산업 구조조정으로 이미 좋은 일자리는 거의 사라진 상황이었으며 그에 따른 결과는 참혹했다. 한때 존경받는 지역사회의 일원이자 안정된 소비층을 형성했던 노동계급은 사라지고 대형 할인마트 판매원, 콜센터 직원, 비정규직, 파트타임 노동자, 경호원, 간병인, 중소 자영업자 같은 저숙련 일자리들이 주류를 차지했다. 이들 신 직업군은 바로 오늘날 끊임없이 경멸당하는 차브의 직업군과 일치한다. 


흔히 정치인들은 노동계급 개개인의 게으름과 열망없음이 차브 같은 부류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결정적인 원인은 다수 노동계급을 먹여살리는 산업들을 구조조정하고 소수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금융 같은 산업에 올인한 정부가 제공한 것이다. 게다가 차브를 식객으로 몰아붙이는 언론인들과 정치인들은 하층민 사회를 경험해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영국 총리 제임스 캐머런 같은 부류는 대부분 사립학교 출신에다가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를 나와 부모의 재력과 연줄 덕분에 무급 인턴으로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지난 40년간 노조와 산업에 전쟁을 선포하고 소득세와 법인세를 낮춤으로써 부자들에게 돈을 퍼주었으며, 서민들의 세금(부가가치세 같은)은 올리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이들이 한결같이 주장한바 상층의 부가 아래로 떨어진다는 ‘낙수 효과’는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차브'는 곧 '낙인'이며, 라벨링 효과를 부른다. 차브라는 용어를 통해 그들을 차브라는 단어로 정의함으로 단어 안에 가운다. 그들을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역겨워한다. 이곳에 또다른 배제와 차별이 존재한다. 낙인은 결국 부당한 대우에 대해서 무감각해지며, 그들은 그런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된다는 편견에 빠지게 된다. 차브 곧 잉여인간의 탄생은 가진 자들의 탐욕이 만들어낸 부당하고 비열한 계급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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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가나안 성도에게 묻다!


가나안성도? 웬 뜬금 없는 말인가? 하수상하여 뜻을 물으니 거꾸로 읽으란다. 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 성도가 된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하나는 '교회를 안가도 성도인가?'라는 질문과, 안나가는 성도를 통해 교회 밖 성도라는 새로운 종족의 출현이다. 그럼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의 두 번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21세기에 맞는 시대적 요청이자 변화라고만 치부하게에 왠지 불안하고 어색하다. 교회 밖에도 성도, 즉 구원이 가능하다면, 교회 안의 성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직설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면, 굳이 교회를 다니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으며,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의존적 신앙을 가진 교회 안 성도들에게 치명적 위기감을 조성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과장하면, 헌금, 봉사, 예배 참석 등을 하지 않아도 구원 얻을 수 있으며, 얼마든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탓에 교회가 곧 국가였던 중세나 봉건사회는 안나가 성도의 출현은 불가능했고, 엄청난 핍박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더 이상 가나안 성도를 배타적 시각으로만 볼 수 없게 되었다. 종교적 관용의 시대에, 가나안 성도는 탈권위, 탈근대라는 사회적 현상의 불가피한 현상이다. 이제 문제를 조금 진지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탈교회 현상이 두드러지는 현상은 한국이라는 나라에만 일어나는 유일한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 밖에 구원은 없다."  3세기 교부였던 키프리아누스는 교회가 곧 구원이라는 획일적인 신앙관을 견지하고,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가 정하는 교회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개념과 사뭇 다르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가 말하는 교회 밖은 곧 성경 밖이고, 이단들을 의미했다. 3세기는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논쟁으로 환란과 핍박 속에서도 교회는 분열되고 시끄러웠다. 이단에 대한 과감하고도 단호한 주장을 감행한 키프리아누스는 결국 다른 주교들로부터 파문의 위협을 받았고, 너무 과격하다는 평을 받았다. 키프리아누스의 과격함은 당시 일어났던 핍박으로 인한 배교의 문제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의 가나안성도와는 사뭇 다른 예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앞으로 일어날 교회의 미래를 보여주는 예언적 선언이었다.


Thascius Caecilius Cyprianus


로마의 멸망은 곧 교회의 기회였다. 로마의 멸망으로 치안과 문화적 공백이 일어나자 교회는 그 공백을 메꾸기 시작한다. 이러한 기회는 교회가 권력으로 나아가는 토대를 쌓게 된다. 중세는 국가 위의 교회로서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현재 미국에서 대통령 선언시에 성경 위에 손을 올리는 것은 중세적 영향이다. 국가는 나라 아래 있고, 교회가 국가의 수장을 결정하는 권력을 쥐게 된다. 카놋사의 굴욕은 국가의 권력과 교회 권력 간의 첨예화된 다툼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다. 국가는 끊임없이 교회로부터 나가려했고, 결국 영국의 헨리 8세의 수장령을 통해 국가 위에 군림하던 교회는 국가 안에, 또는 국가 아래 내려앉는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탈교회화의 현상 중 하나였고 시민정신의 도래, 근대적 정신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을 시민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와 국가는 완전히 분리되지도 구분되지도 않았다.

 

종교개혁 당시 국가와 교회는 완전히 다르다는 주장을 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등장한다. 바로 재세례파다. 철저한 자유와 독립을 주장한 재세례파는 부모의 권위를 거부하여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국가의 교회 통치를 또한 거절한다. 시대를 너무 앞서간 이들은 결국 종교개혁자들에게도 핍박을 받아야 했고, 시대의 선지자로서의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종교개혁 초기에 루터와 칼빈을 추종하던 재세례파는 개혁자들과 등을 지게 되고, 국가와 교회를 분리하지 못한 개혁가들로 인해 핍박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기회의 땅이 주어진다. 바로 뉴잉글랜드로 불리는 아메리카로의 이주이다. 미국의 독립은 곧 교회의 독립이며, 관용과 자유의 땅으로서의 자치권을 부여 받게 된다.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획득한 교회는 시대적 요청에 응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인다. 교황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카톨릭에서 교단 중심의 교회인 장로교단이 부흥하게 되고, 현재는 장로교단은 축소되고, 더욱 개교화된 회중교회가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오순절교회의 출현과 회중교회는 현대인들의 정신적 공백을 메꾸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조직을 갖추게 된다. 결국 교회는 더욱 탈권위적 현상으로 인해 개교회화, 개인화가 일어난다. 조지 마스던은 그의 책 <근본주의와 미국문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칼빈주의는, 미국 건국 운동의 기원을 이룬 17세기의 청교도에서, 그리고 대각성 운동 이후 회중주의로부터 분리한 18세기의 뉴잉글랜드 침례교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침례교는 교회를, 회심을 체험한 개개인들의 자발적 협의체로 보는, 개인주의적 교회를 가지고 있었다. 교회의 중앙 집권화에 대한 반대와, 칼빈주의적 신조주의는 제한을 받는다."(조지 마스던, p235)

 

 

거두절미하고, 가나안 성도는 탈권위적 시대의 산물이며, 교회는 이제 그 사실은 엄연한 사실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중세적-봉건적 생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권위적 자세로 대응하고 있다. 마치 자신들이 키프리아누스나 되는 것처럼 교회 밖 성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그들에게 구원이 없다고 선언하며, 저주하기까지 한다. 이런 극렬한 반응은 무례한 기독교로의 귀결로 이어진다. 타자를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기독교는 가나안 성도는 왜 교회를 나가지 않는가?를 묻지 않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만을 트집 잡아 무례하게 정죄한다


2012년 김진호는 그의 책 <시민 K, 교회를 나가다>에서 한국 개신교회의 성공과 실패의 원인들을 재구성한다. 그는 1부에서 한국 교신교회의 과거를 추억하며 '시민 K, 교회에 나가다'를 탐색한다. 2부에서는 한국 개신교회의 오늘을 살피면서 '시민k, 교회를 나가다'를 풀어 간다. 그는 1부에서 '반공주의'와 한국교회의 은밀한 결탁을 추적한다. 현재 한국의 원로? 들은 대부분 월남자들이다. 그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미움과 적의가 있다.

 

"월남자 기독교도들을 대표하는 기구인 '이북신도대표회'의 중심에는 영락교회와 한경직 목사가 있었다. 한국 선교에 가장 큰 기여를 한 미국 북장로회가 한 목사의 든든한 후견자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미국 정계의 보수, 반공주의적 인사들과 특별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p72)

 

70-80 기하급수적으로 부흥한 한국교회는 조용기 목사를 중심으로 물질주의에 빠지고, 한경직 목사를 위주로 한 권력에의 결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뉴밀레니엄 시대가 도래하면서 한국교회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고, 우민화 정책을 추구한 한국교회는 깨어나는 시민정식을 억압한다. 탈권위적 시대에 권위적 목회를 지향한 한국교회는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고 결국 침몰하기 시작한다. 장년성도에 비해 주일학교 학생수가 200%이상이었던 80년대에 비해, 현재는 고작 5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교인 고령화가 급속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주일학교 학생이던 이들이 교회의 중직이 되고, 실제적인 일들을 처리하면서 당시의 추억을 되살려 주일학교를 되살리려하지만 턱 없이 부족하다.

 

심지어 교회는 더 이상 그들을 무지 속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을 불안해한다. 목회자들은 신처럼 떠받들던 이전의 교회는 탈권위적 사상을 현대 시민들에게는 우격다짐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90년대 이후 드러나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성적 타락과 금권주의, 성장주의 등은 교인들에게 더 큰 실망과 아픔을 주었고, 결국 교회 안에 구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회적 부조리에 침묵하고, 도리어 권력과 결탁하여 약자를 강제하는 교회는 더 이상 구원이 없는 것이다.

 

"교회는 점점 이웃 없는 종교가 되어 가고 있다. ... 시민 K는 이처럼 신이 된 자본, 자본이 된 신의 사회를 지향하는 교회를 떠나고 있을 뿐 아니라, 점점 적대적 감정에 사로잡히고 있는 것이다."(p175)

 

가나안 성도의 출몰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존재했으나 보이지 않았고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더 이상 그들을 막을 수가 없다. 교회는 배타적 강제로 가나안 성도를 부정하기를 중지해야 한다. 교회는 이제 가나안 성도에게 물어야 한다. 진지하게,

"당신은 왜 교회에 '안나가'십니까?"

가나안 성도의 출현은 분명 교회의 위기다. 그러나 토인비의 주장처럼 '도전'에 바르게 '응전'하는 것은 새로운 기회이다. 이제 그들은 인정하고, 어깨동무를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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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고양이의 은밀한 시간 한림아동문학선
김종렬 지음, 신은숙 그림 / 한림출판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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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더이상 버리지 마세요


개학날 아이들은 아쉬움과 반가움이 교차한다. 친구들을 만날 것은 생각하니 즐겁고, 더이상 마음 편하게 놀지 못해 아쉽다. 학교에 다니는 큰 아들은 학교 적응이 쉽지 않아 더 마음이 무겁다. 둘째는 워낙 낙천적이라 금새 학교 생활에 적응한다. 그리고 한 달 후.



학교에서 돌아온 둘째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낸다. 


"엄마 잠깐만!"

"왜"

"야옹~~~"

"????!!!"


새끼 고양이 두마리가 야옹하며 힘없이 운다. 그것도 두 마리나. 아내는 질겁을 하고 외친다. 


"야~ 왜 데려왔어?"

"불쌍하쟌아요!"


길고양이 들이다. 아마도 어미가 죽은 모양이다. 며칠 째 길에 버려진 것은 어떤 친구가 주워서 집에 데려가 키우다 새끼가 너무 많아 분양을 했다고 한다. 말이 분양이지 분배가 맞을 것 같다. 아내는 버려진 고양이라는 소리에 다소 격한 감정을 가라 앉혔지만 그래도 쌕쌕 거린다. 


"그래도..."


저녁이 되어 집에 들어가자 아내가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꺼낸다.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냥 키우기로 했다. 이렇게 이 녀석들은 우리 식구가 되었다. 


 


반년이 지나고 나니 제법 늠름하다. 


 


 

 


 

개와 고양이의 은밀한 시간! 제목에서 뭔가 재미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다. 침대에 누워 한 참을 읽어 내려간다. 할머니 반지를 훔쳐간 고양이를 뒤 쫓다 우연히 발견한 '개와 고양이의 은밀한 시간'이라는 레스토랑. 그곳은 언제 열릴지도 모르는 개와 고양이들의 만의 레스토랑이다. 꼬마는 호기심에 이끌려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곳은 개와 고양이들의 즐겁게 만찬을 즐기고 있다. 


냉정하지만 으리있는 피터, 요염하고 딱부러지는 고양이 엘리자베스, 호기심 많은 젊은 고양이 바바라. 늠름한 브래들리 등 많은 개와 고양이들이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는다. 할머니의 반지를 찾으려 시작된 모험이 도심 속 버려진 개와 고양이들의 애환을 듣는 신비로운 공간으로 초대된다. 


"거리로 내몰린 우리들은 많은 것을 잃어 버렸어. 개의 자부심과 고양이의 품위가, 차가운 거리에서 다 무슨 소용이겠어. 살아남으려는 본능뿐이라고. 케네스의 일은 나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인간들에게 학대와 해코지를 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걸 잊지마."(p72)


주인이 버리고 간 집에서 결국 죽음 맞이한 충직한 베베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베베는 주인들이 이사가면서 옛집에 버려진다. 주인들은 베베를 버려두고 떠났다. 목줄도 풀어주지 못하고 말이다. 베베는 주인을 기다리다 죽음을 맞이한다. 개들은 베베를 기억하며 개의 자존심을 지킨 개라고 칭송한다. 한쪽에서 어리석었다고 비판한다. 


"아니야! 베베는 목줄이 풀려 있었어도 그 집을 끝까지 지켰을 거야. 그 집은 베베의 모든 것이었어. 주인과 함께 했던 아름다운 추억. 주인을 지키기 위해 언제나 귀를 세우고 잠든던 곳. 집의 냄새. 주인의 발걸음 소리 하나하나 베베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던 곳이야. 베베의 죽음은 슬프지만 베베는 단 한 번도 주인과의 신의를 어기지 않았어. 우리게게 개의 자부심이 얼마나 단단한지 보여 준 자랑스런 베베였어. 그 사실까지 잊어서는 안 돼!"(p89)


베베의 이야기는 듣는 순간 마음이 아프다. 몇 년전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상을 가면서 다이상 고양이를 키울 수 없어 시골 부모님께 갖다준 적이 있다. 모두 세 마리였는데 두 마리는 얼마 후 시골에 적응하지 못하고 두 마리는 죽고 한 마리만 살아있다. 아마 그들은 우리가 그들을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 우리도 살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결국 두 마리는 죽고 말았다. 죽으면서 우리를 원망했을까? 


도시, 인간이 만든 환경이다. 그러나 그곳에 버려진 고양이들과 개들이 있다. 쓰레기나 뒤지며 어지럽게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살아 남기 위한 발버둥이다. 어린이 동화인데 읽으면서 이리 마음이 아픈건 처음이다. 어쨋든 이 책을 읽으면서 길고양이들에 대한 생각을 좀더 아끼고 사랑해야 겠다 싶다. 난 그렇게 이 책을 읽었는데, 사실은 추리동화이다. 스토리는 책을 통해 접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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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의 산문 읽기


곽재구 교수의 산문집인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을 읽고 있다. 곽재구 라는 이름을 알게 된건 순전히 이 책 때문이다. 이 책보다 곽재구 교수는 <곽재구의 포구기행>이 유명하다. 이곳에 보면 장재인이란 교사 이야기가 나온다. 곽재구는 장재인에 대해 이렇게 첫 문장을 시작한다.


"세상을 붙잡으려다 처자를 버리고, 이제는 처자를 부여 안기 위하여 세상을 버리려 합니다. 불행한 사람의 삶에 뛰어들어 고생만 하던 고마운 아내!"


사실 이 문장은 곽재구의 것이 아닌 장재인의 유서의 첫 문장이다. 오공시절 민주화 투쟁의 삶을 살아가던 그. 그는 선생님이었다. 더 긴 이야기는 풀어 놓지 않아 그의 생애는 잘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아이들을 끔직히 사랑한 바보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1990년 9월 1일 오후 두시 사십분, 영동 고속도로 상행선 육십이킬로미터 지범에서 강원여객 직행 버스가 과속으로 빗길을 질주하다 섬강교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탑승객 스물여덟 명 중 스물네 명이 사망한 대형 사고였다. 이 사고로 아내와 아들을 한꺼번에 잃게 된 장재인이라는 앞서의 사내는 사고 발생 보름 만에 열여덟 페이지에 달하는 긴 유서를 남기고 이 지상을 떠났다." 204쪽


장재인은 아내를 사귀면서 <별>이라는 시를 쓴다. 아래는 별의 전문이다. 


별을 알기 전

가득함을 알았지만

별을 알고 나서

빈 마음을 알았습니다.


 

별을 알기 전

신념의 풍요를 알았지만

별을 알고 나서

풍요는 갈증에 눈뜨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던가 별이 들어온 날

가슴은 별로 가득하였지만

그때부터 한 구석 빈 마음임을

개달았습니다.


 

별을 알기 전

고요인 줄 알았던 것이

별을 알고 나서 그것이

소용돌이 임을 알았습니다.


곽재구는 이렇게 평한다. 


"별을 알기 전에는 고요인 줄만 알았는데 그것이 소용돌이라는 인식의 발견은 직접 그 별과의 추억에 잠기지 않은 사람에게는 쉬 찾아올 수 없는 것이다."211쪽


70년대 80년 학번을 가진 이들이라면 오공 육공의 군화발을 잘 알 것이다. 그가 말한 별은 바로 그 당시를 상징하는 언어다. 장재인을 소설화한 조해인은 <섬강에서 하늘까지>에서 장재인과 아내의 최영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검색해 보니 없다. 



모호하다. 그가 정확하게 어떻게 살았는가 없다. 단지 지금 같은 선생이 아니었다는 것, 그가 죽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곽재구는 장재인이란 사람을 단지 그가 쓴 글 때문에 소개하는지 모르겠다. 곽재구의 글은 묘한 아련함이 있다. 


이 책은 이미 절판 되었고 다시 재판할 생각은 없는가 보다. 안타깝게 중고 가격이 1000원이다. 이런! 이런 책이 천원이라니. 


요즘은 산문에 끌린다. 이것 저것 집어 들고 읽는다. 그중에서 최고는 역시 고인이된 박완서의 산문이다. 작년에 사 두었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다시 읽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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