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바질의 성령에 관하여
성 바질 지음, 주승민 옮김 / 올리브나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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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교리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교부는 갑바도기아 교부들입니다. 모두 세 명입니다. 한 명은 지난주에 본 <모세의 생애>를 기록한 닛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y)이고, 다른 한 명은 나지안주스 그레고리우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명은 나지안주스의 친구이자 닛사의 그레고리우스의 친형인 가이사랴의 바실(Basil, 이후 바실리우스로 표기)입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3대에 이어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납니다. 바실리우스는 탁월한 교회 행정가였으며, 동방의 4대 교부 중 한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는 생전부터 () 바실리우스로 불렸습니다. 50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살아 생전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던 교부입니다. 대 교부 중에서 대(Magnus)가 붙은 교부는 바실리우스가 유일합니다.

 

329년 경 열 남매 중에서 장남으로 갑바도기아 수도인 가이사랴에서 태어납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고전학문을 배우고, 할머니인 마크리나에게서 기독교 신앙을 배웁니다. 바실리우스의 외가쪽은 삼대쪽 기독교 가정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엠멜리아는 후대에 성녀의 칭호를 받을 만큼 탁월한 믿음의 여성이었습니다. 가이사랴 수사학 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평생 친구이자 동료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를 만난다. 집안이 부유했던 덕택에 당대에 유명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다. 아테네로 유학을 떠나 프로하이레시오스와 히메리오스의 강의를 듣게 된다. 이곳에서 훗날 황제가 되는 율리아누스를 알게 되고 나지안주스를 다시 만난다. 히메리오스는 비두니아 출신으로 수학자이면서 밀교의 신자였습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가이사랴에서 수사학를 가르치지만 금욕적 생활을 위해 그만두게 된다. 아바도 바실리우스는 탁월한 실력자였던지 이웃 지방에서도 그의 명성을 듣고 초빙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세례를 받고 독서직을 받고 자신의 전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한다. 금욕적인 생활을 영위하던 그에게 친구들이 찾아와 돌아와 달라고 강청한다. 당시 교회는 니케아신조를 따르는 니케아파와 유사본질을 주장하는 아리우스파로 나뉜 상태였다. 결국 364년 감독으로 안수를 받습니다. 376년 본도와 갑바도기아를 다스리는 데모스테네스 총독은 아리우스파의 부추김으로 정통파 감독들을 축출하지만 대표격인 바실리우스에게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기독론과 더불에 당대에 가장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은 성령론이었습니다. 애굽 수도원 생활을 할 때 알게 지난 세바스테 감독이었던 에우스타티오스와 대적하게 됩니다. 에우스타티오스는 성령의 신성과 인격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73년 바실리우스와 완전히 결발한 에우스타티오스는 바실리우스는 사벨리우스주의자나 삼신론자로 말했습니다. 결국 바실리우스는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고 삼위일체를 확고히 하기 위해 375<성령론>을 저술하기에 이릅니다. 그는 여러 지방을 순회하며 지방 감독들에게 에우스타티오스와 결별할 것을 요청했으나 거의 듣지 않았습니다. 금욕적 생활로 인해 바실리우스는 늘 몸이 허약했습니다. 결국 37911일 만 50세의 나이로 주님의 품에 안깁니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자신의 뒤를 이어 큰 업적을 남기게 된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를 사망하기 4개월 전에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감독이 되게 하였습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바실리우스와 뜻을 같이하여 삼위일체 교회가 뿌리 내리도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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