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의 발견
"정명구는 마담의 흔들리는 몸체와 엉덩판을 돌려보다가 참 육덕 한번 푸지겠다는 생각을 하며 미선을 돌렸다."
백금남의 장편소설 탄트라를 읽고 있다. 불교에 관련된 소설이려니 아무 생각 없이 읽기 시작한 소설인데, 의외로 야하고 관능적이다. 청교도적 사상에 물든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다. 야설에 가까운 책이랄까? 아니다. 대승불교가 가지는 청렴함, 유교적 사상이 탄트라가 가지는 밀교적 에로스에 난감함을 표할 수 밖에 없다. 이것도 불교인가 싶을 만큼의 농익은 육체의 탐닉이 소설 전반에 흐리고 있다. 읽어가는 중에 눈에 들어온 낯선 단어가 보인다. '육덕'이란 단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단어 같은데 감이 오질 않아 인터넷 사진을 찾아보니, 세 가진 뜻 중에 세 번째인 뜻인 것 같아.
육덕3 (肉德) [명사] 몸에 살이 많아 덕스러운 모양.
익숙지 않는 단어들이 연이어 나온다. 탄트라도 정확한 뜻을 모르고, '마' '구루' '옴마니반메훔' 등이 읽힌다. 몇 번 들어본 단어이긴 하지만 정확한 뜻을 전연 알 수 없다. 낯선 단어가 나올적마다 노트에 옮겨 적든지, 새프펜슬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나중에 찾아볼 요량으로. 읽다가 문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의 경우는 곧바로 인터넷 사전을 열어 뜻을 찾았다. 마치 영단어를 찾아가듯 공부하며 한 장 한 장을 읽어 나가고 있다. 92년 출판된 책이라 아직 있을까 싶어 찾아보니 역시나 절판되고 없다. 백금남의 책을 찾아보니 몇년 전 영화로 상영한 <관상>도 보이고 몇 권의 책이 검색된다. 올 1월에 출간된 <유마>도 보이고, 법정스님의 일생을 소설화한 <법정>도 보인다. 일단 탄트라부터 읽고 나머지도 책도 읽어볼 참이다.
단어는 무엇을 의미할까? 불현듯 내가 알고있는 단어는 몇 단어나 될까? 내가 사용하는 단어는 몇 개일까? 일상적 대화는 2-300개에 불과하고들 한다. 하지만 학적인 깊이가 있는 사람들은 일상적 언어에서도 천단어가 넘는다고 한다.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동일한 사실, 현상을 보고도 어떤 단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 더 깊이 보게하고, 더 넓게 보게한다. 단지 단어만 바꾸었을 뿐인데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국지성 소나비가 내렸다.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순식간에 시야거리가 백미터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늘이 뚫린 뜻 쏟어져 내리는 빗줄기는 흡사 노아의 홍수를 방불케 했다. 시속 120km이상 밝고 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는 고속도로가 빙판길과 다름없게 만들어 버렸다. 다행히 수백비터 전후방에 이동차량이 보이지 않아 브레이크 페달을 밟지 않고 자연감속을 시도했다. 사고는 나지 않았다.
미끄러운 길을
달팽이 걸음으로 달렸다. / 거북이처럼 천천히 달렸다. / 숨을 죽이고 천천히 달려야 했다.
비슷한 세 문장이지만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조금 달라진다. 조금 더 읽어 나가니 '음전한 여자' '육덕푸짐한 여인' 이란 단어가 연이어진다. 비슷한 단어, 동일한 상황이지만 다르지만 비슷한 뜻을 가진 단어를 사용함으로 읽는 재미를 더해진다. 그래서 문장력의 기분 중의 하나는 '동일한 단어를 반복하지 말라.'다.
순천에 들른 김에 중앙서점에 들러 몇 권의 책을 구입했다.
팀켈러의 <팀 켈러의 탕부하나님>과 , C. S. 루이스의 <세상의 마지막 밤>, 유성종.이소윤의 <믿음의 땅 순례의 길>, 이어령의 <소설로 떠나는 영성여행>, 오토 프리드리히 <인간과 공간> 마이크 크랭. 나이젤 스리프트 엮음의 <공간적 사유>를 구입했다. 오토 프리드리히 <인간과 공간> 마이크 크랭. 나이젤 스리프트 엮음의 <공간적 사유>는 에코리브르의 로컬리티 번역총서에 속한 것으로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무화연구소가 주관한 책이다. <인간과 공간>은 작년 가을에 구입한 책인 것 같은데 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표지가 익어 아무래도 두 번째 구입한 책은 아닌지..
읽고 싶은 책 산더미다. 신간을 찾아보니 눈에 띄는 책이 몇 권 보인다. 탁재형의 <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어>라는 여행 산문집이 보인다. 읽고 싶다. 2년전에 출간하 또 다른 여행 산문집인 <탁PD의 여행수다>도 검색된다. 이병률의 여행 산문집과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가뭄이 이어지고 있는 남부의 안타까움이 들려서 그런지 책 제목이 달갑지 않다. 비가 오는 날이라면 반가운 제목 일텐데 말이다. 책 읽기는 결국 단어 찾기란 숙제를 주거나 즐거움을 준다. 난 종종 모르는 단어나 기발한 표현의 문장을 만나면 가슴이 설레고 밀물처럼 행복이 차오른다. 몇 주전에 구입한 <즐리타의 일기>의 안 표지에 이런 글이 붉고 굵게 적혀있다.
"전쟁이란 연필은 불행과 죽음만 쓸 줄 안다."
섬뜩해지는 표현이다. 전쟁을 연필에 비유한 탁월함은 전쟁이 가져온 참상을 피눈물보다 아프게 보여준다. 1992년 11월 29일, 목요일 일기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이처럼 정치라는 것이 제일 나쁘고 못된 연필을 이용하며 사람들을 갈라 놓고 만 거야. 그 연필이 뭔지 아니? 사람들을 비참함과 죽음으로 내모는, 전쟁이라는 연필이야."
작가는 상황에 적절한 단어를 사용해야할 의무가 있다. 평이한 단어만으로 쉬운 글만을 고집한다는 것은 직무유기다. 난해한 단어를 중구난방으로 사용하는 것도 문제지만, 누구나 다 아는 단어만으로 문장을 엮어 간다면 독자의 지성을 잠재우는 해태(게으르게)하게 만는다. 가끔은 독자들로 하여금 사전을 찾아보게 만들어야 한다. 안타깝게 <즐라타의 일기>는 절편된 상태고, 전쟁 속 일기를 소개한 <빼앗긴 내일>이란 책에서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단어의 발견, 삶의 발견이 아닐까? 단어는 언어의 제한을 받는 인간의 사유를 통제한다. 풍부한 언어는 풍부한 사유로 이끌고, 풍부한 사유는 또 다시 새로운 언어를 갈망한다. 단어는 삶의 재현이고, 상징이되는 법이다. 적절한 단어 사용이 가져다 주는 삶의 얼굴이 얼마나 다양한지 고 박완서 선생의 글에서 종종 발견하곤 한다.
"정말 비통할 때는 눈물이 잘 안 나오다가도 슬픔에 적당한 감미로움이 섞이면 울음이 잘 나오는 특이체질도 있다는 것 이해받고 싶었다. 지섭이를 보낸 허전함에도 눈물을 자극하기 알맞은 달착지근한 맛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331쪽
독서의 극미(極美)의 쾌락을 주는 이유가 결국 자신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독서를 통한 단어의 발견은 '나를 발견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