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읽히면 쉽게 잃는다
'잃는다'를 '잊는다'로 고쳐 읽어도 무방하다.
흔히들 고전은 고전한다고 한다. 읽기에 버겁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는 사람치고 고전을 읽어 본 적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고전은 생각 외로 쉽다. 모든 고전이 고전하며 읽을 필요는 없다. 쉽게 말해 기독교 고전인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일종의 자선소설이다. (물론 자전소설로만 읽으면 안 되는 책이지만) 태어나서 방황하고 하나님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담백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걸작이다. 고전할 필요가 전혀 없는 책이다.
플라톤의 작품들을 보라 대부분이 대화체로 이루어진 소설 같다. 문장의 의미들을 파헤쳐야 한다면 고전할 것이 틀림없지만 편하게 읽기에는 부족함이 전혀 없는 책들이다. 중세의 철학자인 안세무스의 책들인 모놀로기온과 프로슬로기온 역시 기도문이다. 정말 쉽다. 그런데도 고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고전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일부 비평가들의 조언에는 기가 차다.
고전은 쉽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고전은 고전하며 읽어야 한다. 즉 플라톤의 <국가>는 대화체지만, 대화 속에 담긴 의미는 깊다.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러내기는 쉽지 않다. 바로 이런 점이 고전을 고전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쉽게 읽히는 고전이 수두룩하지만 퍼내고 또 퍼내도 다 퍼내지 못하는 것이 고전이다. 쉽지만 깊은 것이 고전이다.
뇌과학자들에 의하면 쉽게 익히는 것은 쉽게 잊는다고 한다. 단기기억에서 장기기억으로 넘어 가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반복해야 한다. 벼락치기 공부법과 같은 독서는 쉽게 읽히지만 쉽게 잊어버린다. 저장되지 않는 메모리가 부팅시 몽땅 삭제되어 버린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고전은 쉽게 읽어서는 안 된다. 고전은 고전하며 읽어야 한다. 고전뿐 아니다. 모든 책이 고전하며 읽어야 남는다. 다만 고전할만한 가치가 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고전하며 읽어야 하는 책들은 어떤 책일까? 고전도 수천 권이 넘지 않는가. 이런 고민을 풀어줄 책이 한 권 나왔다. 전문 번역가인 이종인의 신간 인 <살면서 마주한 고전>이 그 주인공이다. 저자는 번역생활을 하면서, 또한 독서가로서 그동안 출간된 책 중에서 죽기 전 읽으면 좋을 책을 선별했다. 특이하게 목차를 4부로 나누었는데 1.2.3.4부를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누었다. 계절에 맞는 맞춤도서로 선정한 듯하다. 일단 목차를 유심히 보고,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을 골라낼 작정이다.
로쟈는 이렇게 글을 달았다.
이어서 인문서 독자라면 이름이 낯설지 않을 번역가 이종인. 올해 나온 번역서만 해도 4권에 이르지만, 단독서도 출간됐다. <살면서 마주한 고전>(책찌, 2015). '전문번역가 이종인이 추천하는 시대의 고전 360'이 부제. 신뢰할 만한 번역자의 고전 가이드북이라고 할까. "서양의 정치학 서적에서부터 현대 영미소설, 한국의 문학작품, 에도시대 하이쿠까지 지역과 시대를 망라한 작품을 두루 소개한 책이다. 어떤 책을 왜 읽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본도서는 고전에 대한 참신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갈피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갈피의 사전적 의미는 [1. 겹치거나 포갠 물건의 하나하나의 사이. 또는 그 틈. 2. 일이나 사물의 갈래가 구별되는 어름. ]이 된다. 독서에도 갈피가 필요하고, 제대로 된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이 때 이 책은 좋은 가이드 분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이종인이 옮긴 <중세의 가을>과 <평생 독서계획>도 참고 하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