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 예수님의 심장
하재성 지음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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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과 뉴잉글랜드(미국)를 뒤 흔들었던 위대한 부흥사 조지 위필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져 없어지고 싶다.

 

이곳에 열정이 있고, 열정은 죽어가는 영혼을 향한 긍휼에서 나온다. 긍휼은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져 없어지길 바란다. 기독교 상담학의 전문가인 하재성 목사의 새 책이 나왔다. '긍휼, 예수님의 심장'이란 멋진 제목으로 말이다. 쌍수들고 환영할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필자에게 하재성 목사는 초면이다. 오래전부터 예수의 공생애와 삶을 읽으면서 긍휼이란 단어를 떠올리곤 했다. 자의적인 갈망이었고, 내 신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가늠쇠로 보았다. 성경공부를 하고, 신자로서의 삶을 살아 갈수록 알 수없는 갈증은 더해갔다.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힘들었지만, 그것은 관계에 대한 열망이다. 오랫동안 함께해도 교인들은 타인처럼 멀게만 느껴졌고,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는 벽이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영아시절, 엄마는 늘 내가 혼자였다고 말씀하신다. 나를 낳고나서 어머니는 목숨이 경각에 달리면서 나를 안아주지 못했다. 그 후로도 나를 잘 안아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를 보며 고마워하신다. 혼자서도 잘 커줬다고 하시면서. 그러나 나는 늘 외로웠다. 유년시절의 특이한 기억 중 하나는 내가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니면 가족들이 외계인이든지. 지독하게 외로웠고, 친구들과 비교의식에 휩싸여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공부는 상위권이었지만 열등감을 치유해 주지는 못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폭력과 술에 빠져 살았다. 악몽의 이유는 나는 버려진 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직도 나의 외로움을 모른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은 긍휼에서 시작된다. 긍휼이 없는 기적은 사탄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기적을 행한 적이 없으셨다.”

그 모든 기적의 이야기 핵심은 ... 굶주려 기력이 쇠해가는 연약한 인간을 향한 주님의 솟구치는 사랑이다. 그분의 심장이 박동할 때 주님의 기적이 일어났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밀어내며 읽어간다. 그곳에서 치유와 회복을 일으키는 기적의 동인(動因) ‘긍휼(矜恤)’을 발견한다. 성인이 되고나서 나를 혼자 두었다는 어머니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싶지 않어서가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어머니는 무척 나를 자랑스러워하셨다. 나는 마을의 자랑이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엄친아였다. 공부, 외모, 성격, 뭐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어머니의 자랑이 버거웠고, 한편에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나를 혼자 있도록 버려둔 야속한 엄마가 미웠다. 그러나 엄마는 나를 사랑했다. 끔찍이 아꼈다. 안타깝게 그것을 몸으로 표현할 힘이 없었다. 나는 성인 되고 나서야 그것을 깨달았고, 첫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나를 향한 엄마의 긍휼도 안았다.

 

책을 읽어가다 보니 페이지와 단락에 감추어진 문장이 빛을 발한다. 울컥한 마음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주님의 그 모든 기적의 목적은 하나, 곧 긍휼이었다. 우리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드러내는 것, 그 자체가 모든 기적의 목적이었다. 긍휼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다.”(36)

 

거친 호흡을 내쉬며 나 혼자 노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어머니를 상상해 보았다. 안아주고 싶고, 볼에 키스해 주고 싶은 엄마의 간절함이 느껴진다. 큰 애가 태어나 혼자 노는 모습을 보면 나는 애가 탄다. 달려가서 와락 안아준다. 아이는 싫다고 바동거린다. 손에 있던 장난감을 놓기 싫은 것이다. 어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나를 힘껏 안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그럴 힘이 없었다. 약한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한 나는 엄마를 오해했다.

 

사마리아 여성을 찾아간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는다. ‘사회적 의미를 상실’(44)했고, 이웃과의 관계가 단절된 그녀는 외진 시간에 우물을 찾는다. 우물에는 물도 있지만 여인들의 수다도 있다. 남편, 시어미니 말도 하고, 자식 자랑도 한다. 얼마 전 구입한 자동차 이야기도 할 것이다. 소통과 공유의 공간이다. 필요를 넘어 은근한 경쟁과 암묵적 투쟁도 있다. 여인은 그곳에 갈 수 없고,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이미 그곳에서 배제 당했고, 고립되었다. 나처럼 그녀도 늘 혼자였다. 서글프게 살아가는 그녀의 이야기를 읽으려니 마음이 답답해진다. 그 곳에서 다시 심장의 박동수를 높이는 문장을 발견한다.


그녀는 마치 부상당한 야생 기러기와 같았다. 자신을 치료해주려 한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덫에 걸리자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이리저리 퍼덕이고 있다.”(45)

 

순간, 저자인 하재성 목사에게 묻고 싶다. 당신도 어릴 적 깊은 상처를 받은 적이 있는가? 어떻게 인간의 내면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는가? 저자 스스로 공개하지 않으니 알 길이 없으나 몇 곳에서 그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 10장은 생명우선이란 제목으로 마가복음 3:1-6까지 다룬다. 그곳은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장면이다. 3:5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분노하시며 주위를 둘러보시고 사람들의 마음이 굳은 것을 아시고, 슬퍼하셨습니다.”

 

분노하시고’ ‘슬퍼하셨다는 표현. 감정이다. 신이면서 완전한 인간이셨던 예수는 인간들의 완악함에 분노하심과 동시에 슬퍼 하셨다. 저자는 이 부분을 언급하면서 예수의 말씀 속에는 언제나 감정이 실려있다고 말한다. 유교문화 스토아학파는 감정을 열등한 것으로 무시한다. 어쨌든 분노는 내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행동한다. 불교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복음서는 이차적 문자로만 읽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곳에 감정의 기복과 굴곡이 엄연히 존재한다. 예수의 분노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긍휼을 막고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으려는 바리새인들의 가식 때문이었다.

 

이처럼 완고한 그들의 마음을 보실 때 예수님의 마음은 고통스럽게 요동하였다. 한 영혼이 회복되는 과정을 털끝만큼의 긍휼도 없이 감시하고 있는 그들 때문에 주님의 분노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는 무감감한 탈속의 성인이 아니셨다. 주님의 가슴에서 뜨거운 분노의 불이 일어났다.”(175)

 

그 분노는 예수 자신을 닳아 없애는 것이다.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것이며,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다. 예수는 어리석었다. 그는 분노하지 말았어야 했다. 분노는 스스로를 죽임으로 타인을 더 구할 수 있는 여지를 꺾어 버렸다. 예수의 분노는 정의를 만’(180)든다는 저자의 말에 백배 공감한다. 바로 그 정의가 예수를 죽인 것이다.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쓴 사람은 본능적으로 빛을 싫어한다. 자신들의 죄의 오물을 들추어내는 진리의 예수를 미워했다. 그럼에도 분노함으로 그들의 악이 얼마나 끔찍하고 악랄한가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예수는 십자가를 향해 점점 더 나아갔다. 그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 없어지기는 선택했다.

 

그러나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칠 때, 지진으로 건물이 무너져 내릴 때 자신이 몸이 부서지기까지 아이를 가슴에 품은 엄마의 마음처럼, 주님께서는 자신의 분노로 연약한 영혼들에게 평안을 주시고 자신은 십자가 앞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기다리는 그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셨다. 연약한 영혼을 지켜주시고, 그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셨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그 진노의 처소로 담대히 나아가셨다.”(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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