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떠나는 여행 - 21회] 

놀이가 사라진 학교


 

아내와 함께 서점에 들렀다. 봄이 오는 소리가 아내를 집에 머물지 못하게 한다. 향긋한 내음이 물씬 풍기는 거리는 아내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냥 좋단다. 나오기를 참 잘했단다. 이럴 때는 남편이 있어 좋단다. 그래 오늘 만큼은 으스대도 되겠지. 들뜬 마음으로 아내와 함께 서점에 들렀다. 한 시간 정도를 서점에서 책을 골랐다. 봄을 맞아 읽을 책은 없는지 꼼꼼하게 살핀다. 아내는 한 곳에서 꿈쩍도 않고 책을 읽는다. 책을 고르고 나서 차에서 아내는 자신이 고른 책을 이야기를 꺼낸다. 장애영의 <엄마의 기준이 아이의 수준을 만든다>이다. 아직 앞쪽 밖에 읽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은 더 읽어야겠지만 앞부분만으로도 책을 고르기에 주저함이 없다 한다.

 

아들이 한 명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에서 홈스쿨을 시작한다. 놀랍게도 2년 만에 고등학교 졸업자격까지 얻고 연세대에 입학한다. 학교에서 죽도록 공부해도 가기 힘든 연세대를 혼자 공부해서 갔다는 이야기에 아내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한숨이다. 우리 아이들은 불가능하다고. 그렇다. 우리 애들은 불가능하다. 놀기 좋아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 좋아하고, 스마트폰에 빠진 우리 아이들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홈스쿨 하지 말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싫어서가 아니라 할 수가 없어서다.

 

불행한 아이들

 

아이들이 불행하다. 자기보다 더 커 보이는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는 아이의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쓰리다.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힘들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키도 작고 공부도 못하는 편이란 부모로서 안타까움이 든다. 무엇이 힘드냐고 물어보면, 그냥 앉아 있는 시간이 힘들다는 것이다. 4년 가까운 시간동안 학습에 대한 나름대로 공부를 해왔다. 나도 중고등학교를 지나왔는데 요즘처럼 불행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학교에 대한 생각이 극히 부정적이다.

 

친구 없는 학교

 

아이들이 자신들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기쁨도 없고 친구간의 우정도 없고, 오직 경쟁과 성적의 압박만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선생님은 중고학교 친구가 진짜 친구라며 학창시절의 우정을 중요하게 말씀하셨다. 과연 시간이 흐르고 나니 고등학교 친구는 아직도 연락하며 산다. 그러나 초등학교 친구들은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치지지 않는 이상 연락하지 않는다. 지금은 어떤가. 친구가 없다고 난리다. 대학이란 입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트도 빌려주지 않고, 공부법도 알려주지 않는다. 나보다 친구가 잘하면 내신에서 밀리고 그것이 결국 대학의 당락과 연결된다. 친구가 사라진 것이다. 친구가 없다는 것은 위로받을 곳 없고, 기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성정이 우상화된 학교의 피폐한 모습이다.

 

놀이가 사라진 학교

 

친구가 없는 이유가 뭘까? 단지 성적 때문일까? 아니다. 놀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얼마 전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의 S대는 예능 관련과를 시험 성적순으로 뽑는다고 한다. 피아노를 아무리 잘 쳐도 성적이 낮으면 탈락된다. 얼마나 우스운가. 피아노도 잘 치고 수학도 잘하면 좋다. 그러나 꼭 그럴 필요는 없다. 달리기도 잘하고 화학도 잘하면 좋다. 그러나 반드시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실기 위주가 아닌 성적 위주로 선발한다는 것은 우리나라 교육이 가진 아이러니다. 성적이 우상이 되다보니 학교의 모든 수업은 놀이가 아닌 강제화된 지식축적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노는 시간이 없다. 여가 시간, 그룹모임 시간 등이 사라진 것이다. 7-80년대 대학교는 서클 왕국이었다. 대학교까지는 아니었지만 고등학교도 비슷한 문화체험과 놀이 문화가 공존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몸으로 활동하는 것이 사라지고 머리만 쓰는 화성인이 되어가고 있다. 맥박이 같아야 친구가 된다. 함께 이야기하고, 몸을 부대끼고, 야성을 발사하지 않으면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 학교는 공부가 신이 되어 우정을 터부시하고 있다. 불쌍한 우리 아이들! 눈물이 절로 난다.


공부, 몸을 움직여야 잘 된다.

 

공부는 뇌가 한다. 그러나 뇌는 몸이 움직여야 제대로 작동한다. 최근의 뇌 연구가들은 운동은 학습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한다. 운동을 하면 혈액순환이 원활해져 뇌에 산소 공급이 많아진다. 더 많은 산소가 뇌에 공급되면 뇌는 활동적이 되고, 상쾌한 기분으로 정보를 받아들이게 된다. 내가 즐겨 읽는 <천재가 된 제롬>의 저자는 이타마르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지. 일정한 리듬과 박자에 맞춰 몸을 움직이면 집중하는 데 도움이 돼. 그렇게 하면 뇌에 산소 공급이 되고 분명한 사고력과 집중력을 갖게 되지.”

 

앎과 삶은 다르지 않다. 몸과 지식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고미숙은 <호모 쿵푸스>에서 말과 몸과 삶이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몸과 공부가 분리되는 것만큼 불행한 것도 없다. 머리로는 나쁘다고 인식하고 있지만 몸은 여전히 나쁜 행동을 일삼는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학교가 학생들을 기르는 방식이다. 그러니 빨리 경쟁 위주의 교육방식을 폐기하고, 앎과 삶이 같은 참 교육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멀지 않다. ‘함께 놀면서, 함께 토론하고, 함께 도와주면 된다.’ 참 쉬운 공부, 정말 어렵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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