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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8년 9월
평점 :
기가 막히다. 1932년생이다. 도대체 나이가.. 아니 연세가 어떻게 된단 말인가? 상상하기 힘들다. 처음 멋모르고 이분의 책을 읽었을 때 나이가 한 오십쯤 되는 그런 분인줄 알았다. 페이지마다 넘쳐나는 열정이 대단했다.참 멋진 분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지안쪽에 자리한 저자 소개문을 읽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대단한 실례를 범한 것이다. 책을 읽는 분이라 그런지 젊음과 패기가 넘쳐난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앞 부분은 김열규 교수의 자전적 독서역사를 인생의 계절로 나누어 풀어냈다. 2부는 독서법에 관련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맛깔스러운 문장과 담백한 고백들이 좋다. 노학자다운인생의 계절의 겪으면서 독서예찬가로서의 삶을 멋지게 그려 주었다. 특히 2부에서 풀어내는 독서이야기는 읽는 이로 하여금 정신 줄을 빼놓을 만큼 황홀하다.
김교수는 자신의 독서 인생을 다섯 단계로 구분했다. 첫 듣기 시절인 유년시절, 낭독의 즐거움을 누린 아이시절, 몰입의 유혹에 빠져든 소년시절, 진정한 책 읽기의 미학에 빠져든 청년시절, 그리고 농익는 책 읽기의 노년 시절이다. 단계단계마다 풀어가는 책 이야기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선명하다.
유아시절, 저자는 할머니로부터 구수한 옛날 이야기를 들었다. 몇 개 되지 않던 이야기를 수도 없이 많은 날동안 우려먹은 할머니에게 존경을 표한다. 우리도 그랬던 것 같다. 늘 비슷한 이야기만 할머니의 다리를 베게삼아 밤마다 듣고 싶어하지 않았던가. 할머니의 대를 이어 어머니는 언문 즉 한글을 낭독해 주었다 한다. 그후 스스로 책을 읽는 시기로 접어든다. 마치 신화시대에서 역사시대로의 진입과 같은 혁명적 사건이다. 진정한 독서는 자기 스스로 찾고 탐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던가.
"눈을 가진 보람! 보기의 경이! 눈으로 봄으로써 세상이 열리고 한다는 사실을 어린 나는 비로소 눈치 챈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눈으로 보기인 읽기의 재미였다."
저자는 겉늙었다. 중학교 시절 헤세 등을 읽으면 독일의 낭만주의에 빠졌으니 말이다. 그는 그 때서야 소설이줄거리 읽기가 아님을 깨닫는다.(109쪽) 읽을 거리가 충분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와 육이오 즈음 저자는 숙독의 습관을 배웠노라 고백하다. 같은 책을 읽고 또 읽고, 친구의 책을 빌려주고 빌려 읽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반복적으로 읽고, 여러 번 읽어 거의 암기 수준에 까지 이른 것이다.
"되풀이해서 읽자니, 저절로 꼼꼼하게 읽는 것도 가능했다는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거듭 거듭 읽다 보면 하다못해 사물이나 인물에 관한 흥미로운 표현을 찾아내게 되고 이런 표현과 맞닥뜨리면 제법 심각하게 생각에잠기기도 했다."(114쪽)
속독 역시 시기에 맛들였다. 당시에 책을 빌리면 빌린 날만큼 값을 지불해야 하니 가능한 빨리 읽어야 했다.그러다보니 번개 읽기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부러운 건 저자의 청년시기의 읽기다. 육이오가 한창이던 때 저자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놀랍게 정부에서는대학생을 징집하지 않았다고 한다. 학도병이라 하여 고등학생들이 전쟁에 나갔다. 저자도 이것이 신기했는지이것을 '부산 임시 정부의 엄청난 결단'으로 표현했다.(125쪽) 더 놀라운 건 그 때 저자가 영어 원서를 읽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비록 풀밭 강의실과 길바닥 책방이었지만 전쟁의 포화 속에서 진정한 독서의 맛을 제대로맛본 것이다. 청년 시절 그의 또 다른 발견은 두보의 시를 읽으면서 고생이란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146쪽)
노년의 책 읽기를 농 익는 시기라 표현한다. 지독한 릴케 주의자였던 저자는 릴케가 아니면 아예 읽지를 않았다 한다. 물로 시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릴케는 고독한 시인다. 저자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경남 고성 외진 시골 마을로 귀향하며 씹어 삼킨 고독을 친구 삼을 수 있었던 건 릴케 덕분이었다.(153쪽) 릴케는한 인간의 익어가기 위해서는 고독은 절대적 필요라 보았기 때문에 저자 또한 그리 생각하며 살아간 것이다.고독이야 말로 진정한 농익기는 독서의 필요충분 조건이다.
김열규 교수의 책 읽기는 씹히는 맛이 있다. 육질의 담백함도 있고, 봄나물의 향긋함도 있다. 때론 봄의 화사함과 여름의 열정, 가을의 고독과 겨울의 초월적 신비도 맛볼 수 있다.
"책이라 글을 읽을 있을 때에도 마찬 가지다. 책이나 글의 주어진 작은 단락, 또는 하나의 문장, 심지어 한 개의낱말조차도 머릿속에 새기고 또 새겨야만 듯이며, 표현의 재미며, 멋이 맛깔스럽게 머릿속에서, 또 마음과 가슴 속에서 소화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독서는 식탐이다. 음식을 먹어 육신을 배부르게 하고 만들어가듯 독서는 정신과 영혼의 양식이다. 그러니 읽지 않고 어떻게 건강한 정신을 기대한단 말인가. 이처럼 큰 역설도 없을 것이다. 읽고 또 읽자. 그리고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