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둥글다. 책도 둥글다


책을 읽다보면... 별다른 책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있는 내용이 저기에도 있고, 저기 있는 내용이 여기에도 있다. 어떤 분이 모든 책은 한 책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그 말은 정답이다. 왜냐하면 처음에 어떤 책이 있는데, 다음 책은 그 책을 인용하고 덧붙이고 개작하고 수정해서 만든다. 그리고 그 다음도...  그 다음도... 그러니 어느 정도 책을 읽다보면 누가 어떤 곳에서 어떤 내용을 인용했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해 아래 새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마는 것이다. 정말 새로운 것은 없다. 다만 알지 못한 것만 있을 뿐이다. 인터넷에서 '모든 책은 한 권에서 시작되었다'를 검색했더니,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가 검색 되었다. '모든 사건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고 소개한 덕이다. 비슷하긴 하다. 문제는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중요하다. 


잊힌 책들의 묘지... 이 묘하고 기묘한 발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찾아가게 한다. 스페인이라는 신비스러움과 독재자의 억압과 착취라는 실존이 이중사슬처럼 꼬여가면 미스테리하게 펼쳐진다. 사실 소설이란 알고보면 아무 내용도 없다. 이미 우리가 겪은 것이기도하고, 누군가 겪은 것이고 겪을 일이다. 그러니 전혀 새로운 내용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만약 우리의 삶과 아무 상관이 없는 내용으로 소설을 쓴다면 누가 그 책을 읽을까? 화성인들의 이야기도 알고보면 우리의 이야기고, 금성인도 역사 마찬 가지다. 태양계를 떠나 안드로메드로 가면 괜찮을까? 아니... 그런 책을 읽혀지지 않는다. 사람이란 존재는 자신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어야 재미도 나고, 어느정도 지식을 가지고-낯익어야 공감도 하는 법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를 찾아 헤맨다. 그러다 찾아내면 연관지으려하지만, 아무 상관 없다는 사실을 알고나면 잊어 버린다.


어쨋든 모든 책은 한 권에서 시작되었다. 모든 사건과 삶과 책은 연관되어있고, 연결되어 있고, 관계맺고 있다. 정혜윤의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 되었다>는 관능적 독서기를 풀어 놓은 것이다. 왜 독서와 에로티시즘을 연결 시키려 하는지... 이해는 가지만 과하다는 생각이다. 정혜윤의 책들을 보면 모두가 은밀함, 침대 등의 관능적인 단어와 문구가 이곳저곳에 은폐하면서 노출시킨다. 하기야 저자의 생각대로 책을 쓰는 법이 뭐라 할 말은 없다. 나 또한 독서가 관능적인 사건임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능적 독서, 관능적 글쓰기, 관능적.... 뭐 이런것들...














지금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의 역사>에 이런 문구가 있다.

전라의 막달라 마리아. 아직 회개하지 않은 그녀는 예쁘게 머리 단장을 하고 황무지의 바위 위에 옷을 깔아 놓고 엎드려 삽화가 곁들여진 커다란 책을 읽고 있다.


또 이런 말도 한다.

책을 읽는 사람이 책에 파묻혀 무슨 꿍꿍이수작이라도 부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남자들이 여자를 마주할 때 여체의 은밀한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 그리고 요술쟁이나 연금술사들이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컴컨한 곳에서 어떤 짓을 하는지에 대해 느끼게 되는 두려움과 별 차이가 없다.(39)

망구엘의 독서와 에로티시즘의 연결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애들러 또한 그의 독서의 기술에서 독서는 연애편지 읽듯 읽어야 한다고 조언하지 않았던가. 애들러의 이 말을 근래에 읽은 많은 책들에서 발견했다. 굳이 밝히고 싶지는 않지만...  독서법에 관련된 책들이었다. 말해줄까? 하여튼 그렇다. 그러니까 어떤 내용도 알고보면 어떤 책에 있었던 것을 수정보완 내지 인용, 아니면 개작... 등의 방법을 통해 새로운 내용처럼 내어 놓는다는 것이다.알베르토 망구엘 나온김에.. 지난 번에 읽은 망구엘의 <모든 사람은 거짓말 쟁이>라는 책도 언급해야 겠다.  알베르토 망구엘의 첫 추리소설이다. 


총망되는 신인소설가였던 베빌라쿠아의 죽음을 두고 네명의 화자가 풀어나가는 형식의 이 소설은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다르게 담겨지는지를 보여준다. 친구인 망구엘, 아내의 죽음 이후 만난 새로운 애인 안드레아. 감옥에서 만난 친구 돼지. 그리고 보이지 않는 숨겨진 베빌라쿠아의 적인 고로스티사가 그들이다. 망구엘은 미완성으로서의 불안한 삶을 살아갔던 친구로 소심하고 내성적인 존재로 베빌라쿠아를 그린다. 그러나 애인이었던 안드레아는 매력적이며, 섬세한 존재로 그린다. 그리고 감방친구인 돼지는 순진하고 정직하며, 출세욕이란 전혀 모르는 무결한 사람처럼 말한다. 그러나 베빌라쿠아에게 애인을 빼앗겼던 고로스티사는 가식적인 존재요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비열한 존재라고 말한다.


이러한 기억과 해석은 그들이 가진 과거의 경험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모른다. 또는 우연한 기회에 만들어진 이해관계들 속에서 편파적으로 이해되어진다. 주인공의 일생을 전반적으로 곁에서 보아온 망구엘은 베빌라쿠아의 한 단편보다는 전체적인 삶의 과정과 결과를 통해 미완성으로 중립적 해석을 가한다. 그러나 주인공보다 어리고 낭만적 관계에서 만나 안드레아는 매력적이고 자신보다 많이 아는 섬세한 존재로 기억하는 것이다. 세번째 화자인 돼지는 권력에 빌붙어 사는 자신에 대해 주인공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 순결한 존재로 보일 것이고, 마지막 화자인 고로스티사는 자신의 애인을 빼앗긴 상처로 인해 베빌라쿠아를 죽이도록 미워했다. 결국 기억이란 객관적인 이해가 아닌 자신이 처한 환경과 우연히 결정되는 체험들 속에서 재해석되어 보관되는 것이다.
















독서는 전혀 다른 세계로 이끄는 관문이다. 책을 읽지 않으면 우물 안의 개구리로 살 수 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대서양을 가보지 못하고, 상파울로에도 못간다. 그러나 독서는 우리를 모두 그곳에 가게 만들어 준다. 전혀 다른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행도 돌고 돌면 결국 제자리다. 왜? 지구는 동굴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리다. 돌고 돌면 다시 한 책으로 다시 돌아온다. 왜 책도 동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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