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론, 신은 어떻게 통치하는가?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태고적부터 있었다. 종교 진화론자들은 종교를 신화시대에 문화되지 못한 미개인들이 자연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해 두려움 속에서 만들어낸 미신으로 치부했다.
베르그송의 웃음과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주목할 만한 고전적 작품이다. 그는 이성으로 왜곡된 문제를 인간다움으로 풀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베르그송의 종교는 감정에 한발자국 더 가까운 것임에는 틀림없다.
현대의 기독교가 외면 당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실존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현실을 외면하고 편견과 주입된 해석에 의거하여 현실을 도피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적 이원론 종교는 결국 현실에서 도피하면 종교적 이데아를 꿈꾸는 환상을 쫓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존재한다.
실제의 사건, 자신 개인의 체험을 담아 [오두막]의 악몽을 풀어 나간다. 오두막에서 살해당한 자신의 딸, 그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린 아버지의 눈물어린 회의와 절규가 담겨있다. 신정론은 실존적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신학적 거대담론이다.
신앙은 때로 우리가 가진 왜곡된 신앙을 깨고 참 하나님을 발견할 때 힘을 발휘한다. 우리는 어쩌면 거짓된 신앙에 갇혀 진정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미 기독교 고전이 되어버린 책이다. 찰스쉘던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는 갑자기 찾아온 진짜 예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물으면서 시작된다. 내가 만들어낸 신이 아닌 진짜 예수님은 어떻게 하셧을까를 물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물음은 오래 되었다. 악의 만연하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통치하실까? 고대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고민했고 답을 하려고 노력했다. 시에서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는 좀더 신학적이고 이지적인 접근법을 사용한다. 위르겐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자 다운 주제로 다가섰다.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를 물음으로 실존적 신앙을 갈망했다. 좀더 현실적인 사람이 있다. 나치의 억압 속에서 어떤 것인 하나님을 대리하는 것인가를 고민하던 본회퍼는 여호수아처럼 칼을 들어 원수를 죽여야 한다는 결론 이르렀다. [저항과 복종]을 통해 무엇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면 신앙인 다운 것인가를 생각했다.
신정론이 현대화된 모습으로 다가온 것은 역시 해방신학이다. 포스터모더니즘 시대를 대변하며 좀더 현실적인 통치를 갈구했던 남미의 배고픈 사람들은 손에 총을 들고 육체적 해방을 추구했다. 해방신학의 시작은 대체적으로 힘 없는 자, 소수자, 가난한 자, 억압 받는 자들에게서 시작된다. 그들이 직접개시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그들 때문에 시작된 것은 확실하다. 그들은 구원이 보수주의자들이 말하는 플라톤적 영의 구원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리스트텔레스적인 육의 구원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영의 구원을 외친다 한다해도 육이 해방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구원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고 싶어했다. 사회와 법, 모든 부문에서 진정한 구원을 갈망했다. [과정신정론]은 참 특이한다. 그들이 말하는 신은 인격적 신이 아닌 하나의 에너지요 힘이라고 생각했다. 과정은 말 그대로 결론이 아닌 과정을 말한다. 진화론적 종교관을 가진 그들은 하나님의 신정론을 인간 역사의 흐름을 생각했으며, 계속하여 완전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정론의 왜곡은 구약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특별한 예가 '시오니즘'으로 불리는 육신적 이스라엘을 추구하는 것이다. 구약적 바탕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은 결코 섞일 수 없는 배타적 존재이다. 시오니즘에 의거하면 유대인들은 육체적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왜곡된 해석은 유대민족을 우등하고 특별한 존재로 만들고 나머지 사람들을 열등하거나 부정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민족우월주의는 결국 타민족을 죽여도 되는 해석의 틈을 만들어내었다. 미국의 보수진영이 전통기독교에 속한 이유도 여기에 있으며, 이스라엘을 전적으로 지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유대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기독교 이단 중의 하나님 '세대주의'는 유대주의 육체적 구원을 확신한다. 그들은 천년왕국 동안 유대인들이 다시 부활할 것이며 진정한 구약의 약속이 성취될 것으로 착각한다.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신정론은 결국 다시 인간의 문제이다.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를 통해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를 실존적으로 질문한다. 신정론은 곧 '하나님의 섭리'라는 신학적인 주제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어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져야 한다. [십자가와 칼]은 교회가 권력과 힘이 아닌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힘의 논리가 아닌 사랑의 원리가 교회의 주된 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죽지 않았다면 싸웠을 것이다. 십자가는 결국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진정한 답이다.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에서 '우리는 죽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못 박는다. 죽기 싫은 자는 진정한 기독교인도 예수의 제자도 아니다. 그는 거짓말 쟁이며, 사기꾼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