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 개정판 역사학자 33인이 추천한 인물로 보는 한국사 29
표시정 지음, 도면회 감수 / 주니어파랑새(파랑새어린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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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이산 그는 영조의 뜻을 받들어 탕평책을 폈으며, 세종을 이어 학문적인 성향이 강했고, 태조의 카리스마가 넘치는 조선 최고의 왕이었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서거한 후 조선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나라를 생각하지 않는 안동 김씨의 부끄러운 치정이 뒤를 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정조와 함께 조선은 끝이 났다고 보는 것이 옳다. 참으로 안타까운 왕이었다. 정조는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독살 당한 것이다. 정조의 독살설은 추측이 아닌 사실로 보아야 한다.


역사를 유추해보면 나라가 세워지는 초기에는 같이 힘을 합했던 귀족 세력들과의 연합을 이룬다. 그러다 점점 왕에게 권력이 몰리는 중앙집권력 형태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그러다 다시 나라가 몰락의 길을 가게되면 처음 귀족들이 세력을 잡은 것처럼 왕의 권력을 나누어 가진다. 아니 서로 빼앗으려 힘을 모으고 자신들끼리 다시 싸운다. 처음과 끝이 모양은 닮았지만 성격은 완전히 다른다. 초기에는 왕을 옹호하는 귀족세력이고 멸망직전에는 왕을 배척하는 헤게모니를 이룬다. 조선의 역사도 이러한 구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정조는 탕평책을 통해 붕당을 없애고 다시 권력을 자신에게 돌리려 했지만, 결국 실패 하고 만다. 이러한 시도는 곧 중앙집권적 형태로의 복귀를 말하지만, 한 번 권력에 맛을 들인 대신들은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 

과거제도 역시 실력있는 사람을 뽑기위한 수단으로서 실시했던 것이다. 귀족가문의 추천이 아닌 진짜 실력자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신라시대부터 이미 과거제가 도입되었지만 자리를 잡은 것은 조선시대이다. 조선초중기의 과거는 그런대로 볼만했다. 능력있는 사람을 고루는 주요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 과거제의 중요성은 자신수하를 두려는 추천제의 대안으로서의 개혁이었다.  학벌 지역성을 타파하고 오로지 실력만을 중요시하겠다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대안이었다. 그러나 후에 과거제도는 여러 폐단을 불러왔다. 과거제 자체의 폐단이 아니라 대리시험이나 검시관들과의 뇌물 수수 등의 편법으로 인한 것이다. 결국 과거제 역시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방법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문제다. 사람이 준비되지 못하면, 결국 아무리 좋은 행정이나 법을 사용한다하더라도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이다. 정조의 탕평책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자 멋진 시도엿지만 기울어가는 조선의 대세를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정조 이후의 조선은 몰락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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