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주룩 주록 내리는 여름, 연암 박지원은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붓을 꺼내들고 연일 무엇인가를 기록해 나갔다. 3개월 동안 중국 여행을 하는 동안 거의 대부분의 일상들을 게으름 없는 성실함으로 기록해 두었다. 요즘에야 메모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싶게 하겠지만 당시는 붓을 꺼내고 먹을 꺼내들고 한지에 옮겨 적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 일을 끈덕지게 해 나갔다. 젊은 시절 과거를 보기도 했지만 부패한 조정에 실망하고 가족을 처가로 보내고 셋방 살이는 하면서 실학자의 길을 모색했다. 41살, 정조 1년에 홍국영이라는 당시의 실세의 비위를 건드리는 바람에 위협을 느기고 황해도 금천으로 들어갔다. 그곳 지명이 연함인 덕에 그는 호를 '연암'으로 붙였다.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 때 지은 책이 '과농소초'이다. 2년 뒤 홍국영이 물러나자 가족들을 이끌고 한양으로 다시 올라간다. 그 해 연암은 임금의 총애를 받고 중국 베이징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바로 그 길을 따라가며 연암은 메모를 하며 후에 '열하일기'로 이름 붙여진 책의 기초를 닦게 된다. 귀국해서 연암 박지원은 메모한 것을 다시 정리하고 다듬었다. 급해서 메모하지 못한 것은 기억을 되살리거나 다른 수행원들에게 물어가며 차근차근 책으로 만들어 나갔다. 그래서 드뎌 열하일기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단순한 여행 기록이 아닌 중국의 상황 등을 재미난 필체와 풍물들을 소개한 덕인지 수많은 지식인들이 열하일기를 읽게 되었다.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는 실학자적인 의지 덕분에 실용적인 내용들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연암 박지원 말고도 중국 여행기는 당시에만 해도 100권이 넘었다고 한다. 김창업의 '연행일기', 박지원의 제자인 이덕무는 '입연기'를 박제가는 '북학의'를 저술했다. 박지원은 치밀하게 여행을 준비했고, 책을 저술하기 위해 끈질기게 불편함을 감수하며 메모를 했다. 수백년이 넘도록 베스트셀러가 된 연하 일기는 준비된 메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