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명구도(鷄鳴狗盜)
닭이 울고 개가 훔치다는 뜻이다.
언뜻 보기에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다. 계명구도(鷄鳴狗盜)는 아래와 같은 일화가 있다.
전국 시대의 제후들은 각기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하여 인재를 모으는데 힘을 기울였지만 제후들뿐 아니라 당시의 유력한 귀족들도 그 신분에 따라 인재를 모으기에 광분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전국의 사군(四君)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제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의 전문, 조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조승, 위나라의 신릉군, 공자 무기, 초나라의 춘신군 황헐(黃歇) 네 사람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 유명한 것은 맹상군이었다. 맹상군은 선왕의 막내동생이며 위왕의 손자이다. 그의 문하에는 식객(食客)이 3천명이나 되니 제후국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진나라 소왕이 맹상군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먼저 경양군을 인질로 보내놓고 맹상군 보기를 원했다. 맹상군의 진나라에 가려하자 그의 식객들은 모두 반대하였다. 식객 가운데 소대가 만류하며 말하였다.
“오늘 아침 제가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나무로 만든 인형과 흙으로 빚은 인형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을 들었습니다. 나무 인형이 말하기를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당신은 장차 부서지고 말거야’하니 흙으로 빚은 인형이 말하기를 ‘나는 흙에서 태어났으니 부서지면 곧 흙으로 돌아갈 뿐이지. 이제 비가 내리면 당신은 떠내려가서 그칠 곳을 알지 못할 것이야’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진나라는 호랑이 같은 나라이온데 군께서 가려고 하시니 만일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면 군께서는 흙 인형에게 비웃음을 당할 것입니다”
맹상군은 소대의 의미 깊은 말을 듣고 진나라로 가는 것을 중지하였다. 제나라 민왕 25년 다시 진나라에서 맹상군을 보내달라고 강요했다. 어쩔 수 없니 맹상군은 진나라로 들어갔다. 진의 소왕은 즉시 맹상군으로 진나라 정승으로 삼으려고 했다.
소왕의 측근 가운데 어떤 사람이 말했다.
“맹상군은 현명하나 제나라의 일족입니다. 그가 진나라의 정승이 된다해도 반드시 제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진나라를 뒤로 미룰 것이니 진나라로선 위태로운 일입니다”
소왕은 그럴듯하게 생각하여 정승으로 삼으려는 계획을 취소하고 맹상군을 가두었다. 어진 사람을 등용하지 않을 경우 죽여 없애는 것이 당시 제후들의 일반적인 에고이즘이었다. 우선 가두어 놓고 계략을 써서 죽이자는 것이 진나라의 계획이었다. 맹상군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었다. 맹상군은 서둘러 사람을 지켜 소왕이 가장 총애하는 여인에게 뇌물을 보내고 그의 석방운동을 벌이게 하였다. 그러자 그 여인이 말했다.
“석해 주는 대가로 맹상군이 가진 흰 여우 갖옷을 나에게 주시오 그렇게 한다면 맹상군을 석방하도록 한 번 힘써 보도록 하겠소”
그러나 맹상군은 단 한 벌의 호백구를 이미 소왕에게 바친 뒤였다. 호백구는 여구 겨드랑이 의 흰털만을 모아 만든 가죽옷으로 한 번 만드는데 여우 천 마리가 드는 진기한 물건이었다. 맹상군은 크게 근심하여 널리 식객들에게 좋은 방법을 물었으나 모두가 묵묵부답(黙黙不答)이었다. 그런데 제일 말석에 개의 흉내를 내어 도둑질을 잘하는 자가 나서며 말하였다.
“제가 호백구를 구해 오겠습니다.”
그는 밤에 개처럼 진나라 궁중 보물창고에 들어가 전날 소왕에게 바쳤던 호백구를 가져왔다. 그것은 진왕의 총희에게 바치자 그 여인은 맹상군의 일을 소왕에게 말하자 소왕은 맹상군을 풀어주었다. 맹상군은 옥에서 풀려나자 즉시 말을 달려 귀국길에 올랐다. 통행증을 고쳐 이름과 성을 변경하여 관소를 통과하려고 하였다. 맹상군은 말을 채찍질하여 국경 지대인 함곡관에 도착했다. 이미 밤중이었다. 소왕은 맹상군을 석방한 것이 곧 후회가 되어 그를 찾았으나 이미 떠나고 없었다. 즉시 사람을 시켜 역마를 달려 그를 뒤쫓아 잡아 오도록 명했다.
맹상군은 밤중에 관에 도착하였으나 진나라 법에 닭이 울어야 관을 통과하게 되어있었다. 맹상군은 뒤쫓아 오는 자가 염려되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식객 가운데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자가 있어 그가 닭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자 모든 닭들이 함께 울기 시작했다. 맹상군은 통행증을 보이고 무사히 관을 통과하였다. 이 두 사람이 닭이 울음소리를 내자 때문에 위기일발의 죽을 고비를 넘길 수가 있었다.
맹상군이 얼마나 인재를 귀하게 여기고 모이기를 원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작은 재주라도 있으면 인정해 주고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