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트텔레스는 노예제를 찬성했다. 아니 적극적으로 활용하자고 했다. 지금의 상식으로 생각할 때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이러한 주자은 20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결코 간과할 것만은 아닌 듯하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내용을 살펴본다.
"아리스토 텔레스가 생각한 시민은 우리가 생각하는 시민보자 더 숭고하고 까다로운 존재다. ---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정치의 목적은 단지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개인의 이익 추구를 위해 공정한 규칙을 제공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의 본성을 표방하고, 좋은 삶의 본질과 인간의 능력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아리스트텔레스의 정치목적은 그의 시민론으로 이어진다. 그가 생각하는 시민은 현재의 사람들이 아니라 특별히 구별된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여기서에서 시민들에의해 시행되는 정치에서 여성들과 노예들은 제외되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트 텔레스에 따르면 여성과 노예의 본성은 시민이 되기에 절적치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를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에 철학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우리는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가 가진 철학적 배경인 목적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당시의 사고체계가 그의 목적론적 사고에 영향을 주어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여성과 노예를 정치에서 제외시킨 이유는 적합성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는 적합성의 문제다. ... 사람들에게 제 몫을 준다는 것은 그들의 자격에 맞는 공직과 영광을 주고 본성에 어울리는 사회적 역할을 부여한다는 뜻이다"
지금의 관점으로 본다면 억지스러운 주장처럼 보이지만 당시는 이러한 적합성은 중요한 판단 근거였다는 것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그러한 텔로스와 적합성이라는 개념은 의심스러울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현대는 합의가 주된 정치의 주제라면 당시는 텔로스 즉 적합성으 찾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노예제가 정당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노예가 필요해야하고, 누군가는 노예로 태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즉 노예의 적합성이 충족되는 사람이 노예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사람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어떤 사람은 노예로 타고난다.(천성적으로,본성적으로) 이들은 육체가 영혼과 다르듯이, 일반인과 다르다. 이런 사람은 노예로 타고났으며 이들은 주인의 지배를 받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에대한 찬성론 속에 인간에 대한 엄격한 구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구분론(필자가만든단어)은 후에 유럽의 노예제도에 힘을 실어주며, 현재까지도 힘을 실어주는 민족구분론까지 이어간다. 히틀러의 유대교말살정책이나 사르비아사건까지.. 아니면 미국의 유색인차별정책과 중국의 소수민족 비하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영역에 걸쳐있다.
좀더 나아간다면 한민족 한나라 안에서의 학벌과 지역주의까지 이어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생태론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일원론의 바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