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적 상상력 - 구약연구시리즈 24
W.브루지만 지음, 김쾌상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1981년 11월
평점 :
품절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설교는 할 수 없다. 아니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 
설교는 나를 죽이고 남을 살리는 것이다. 
설교는 죽이는 것이다. 살리기 위해 죽여야 한다. 

브루지만은 두 영역을 설정해 놓았다. 
왕- 권력의 핵심, 조직적, 논리적, 합리적, 기계적, 피라미드식, 안정을 추구함, 그러나 죽은...
예언자-소외, 고독, 자유, 감성적, 자연의 상태, 인간적, 끈임없는 방랑과 추방, 그러나 자유한 

브루지만의 첫번째 도전은..
기억을 얕보지 말라. 
신앙의 전승을 기억하라. 
예언자는 누구인가? "전승의 아들로서 인식에 있어서와 언어체계에 있어 전승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전승의 기억에 굳게 서서 교회의 문화적 상황과의 접촉점을 분별하고 그것을 날카롭게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이다"

기존의 세력은 무비판적이며, 텅빈문화이다. 언어는 텅민 문화를 개혁하고 변혁하며, 새로운 대안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추구하는 예언자적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목회자의 낱낱의 행동은 대안적 공동체를 부르짖고, 만들고, 개혀가는 일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이다" 

목회가 무엇인가? 
이 사회를 옹호하며 자기 교회만을 꾸려나가는 비겁한 도피가 아니다. 불의한 사회를 도전하며 과감하게 그곳에 자신의 삶을 던지는 것이다. 광야로의 이동, 아무도 없지만, 아무것도 없지만 자유를 위한 과감한 선택이다. 
목회자의 언어는 기존 사회에 안주하며 죽어있는 영혼들에게 과감하게 도전하며 그들로 하여금 광야로 나아가야 할 것을 이야기 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첫번째 예언자 모세의 사역이었다. 안주하지 말라, 죽음을 각오하고 광야로 나가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역설의 언어,
아이러니한 도전을 어떻게 받아 드러야 하는가?
예언자는 역설의 사람이요, 아이러니의 삶이다. 

왕정에서의 예언자
"기존질서를 규제하고 거기서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로서는 참으로 자유하신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불필요하고 눈에 거슬리고 심지어 있을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고 만다"
솔로몬이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가? 자신의 왕정을 유지하기 위해 자유하신 하나님을 부정한 것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종교혼합주의로 만들고 말았다. 더럽고 추한 부패한 생각과 사상들을 예루살렘에 가지고 온 것이다. 그 실례까 바로 애굽의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예언자는 도전한다. 당신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다고, 광야로 나가야 한다고, 자유하신 하나님을 거역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왕정이 추구하는 것은 안정에 대한 약속과 풍요이다. 그럼 그들이 시행하는 것은? 억압과 착취이다. 
부는 자연스런 현상이 아니다. 누군가의 결정적인 희생과 죽음이 뒤따라야 한다. 부를 탐하는 것은 결국 타인을 죽이는 살인행위이기 때문이다.  부를 탐하지 말라. 그것이 곧 죽음이다. 

안정을 버리고 함께 배고프자,
평안을 버리고 함께 고통을 받자,
외면을 버리고 서로에게 희생하자, 
예언자의 외침이다. 
왕이 좋아한다고 말도 안되.. 
예언자의 죽음은 여기서 시작하는 법이지. 그렇지 않은가?
좌파는 여기서 잉태되었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분명 우파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죽였을까?
간단하다,
그들은 억압하는 평안, 그리고 거짓된 안정을 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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