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수필을 평하다
오덕렬 지음 / 풍백미디어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건 수필이 아닌데. 그래 수필이 아니었다. 단편 소설이었다. 그런데 왜 ‘수필’이라고 부르지 몇 편을 더 읽고 나서 지금껏 알고 있는 수필이 달라져도 많이 달라졌음을 알았다. ‘붓가는 대로’라는 구석기 시대의 수필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나에게 ‘수필은 사실의 소재를 작품으로 끌고 들어와서 작품의 소재로 삼는다’(24쪽)는 저자의 주장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만약 내가 이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난 아직도 피천득의 ‘인연’에 명수필로 오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먼저 창작수필이 뭔가를 알아내기 위해 정신력을 모았다. 이관희는 '창작문예수필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정의한다.


"창작문예수필은 에세이에서 진화되어 나온 새로운 양식의 창작문학으로 에세이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물론 창작수필의 성향이 무엇인지 이해할 듯하다. 손에 잡히지 않는 정의다. 더 읽어 내려가니 명료하게 드러난 구절이 보인다. 바로 이 부분이다.


(비창작)일반산문문학은 이미 있는 것에 관하여 토의하는 형식의 문학이고, 창작문학은 현실에 없는 상상력의 세계를 창작하는 문학이다. 산문문학의 가치는 창작문학으로 대신 할 수 없는 사실성의 세계에 있고, 창작문학의 가치는 산문문학으로 대신 할 수 없는 상상력의 세계에 있다.


내가 잘못 읽지 않았다면 창작수필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는 ‘상상력’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바로 그 ‘상상력’과 맞물린다. 수필의 역사를 배운 적이 없기에 기존의 수필 정의에서 갑자기 창작수필을 이해하는 것은 고생대에서 21세기로 건너뛴 것과 같다. 2편을 읽고 곧바로 마지막 장에서 다루는 피천득의 <수필> 평론을 읽기 시작했다. 거두절미하고 우여곡절 끝에 피천득의 <수필>이 책의 가장 앞부분에 실리고, 그 후로 제대로 된 ‘수필론’이 없었던 탓에 많은 사람들은 세뇌 아닌 세뇌를 당한 것이다. 피천득의 <수필>이 수필의 모든 것인 것처럼. 이유야 어떻든 아래의 구절로 피천득의 <수필>은 수필이 아닌 시(詩)로 정의한다.


“이상 논의 된 내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수필」은 <수필>이 아니고 시(詩)라 하겠다. 어찌도니 일인가? 자, 그러면 문학의 진화 현상에 귀를 기우려서 문학도 진화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산문의 시(詩)>라는 새로운 장르를 이해하도록 하자. 그러면 「수필」의 정체가 드러날 것이다.”(287쪽)



창작수필에 대한 분석적 논의는 유주현의 <탈고 안 될 전선>을 분석하면서 심도 있게 다룬다. 필자가 보기에 단편소설로 읽힌다. 저자는 먼저 단편소설과 수필의 차이는 구분한다.


“소설의 문학성은 허구적 서사 창작과 소설적 구성 작업을 통해서 획득된다. 그러나 창작문예수필의 문학성은 사실의 소재(서사)에 대한 문학화 작업, 즉 창조적 구성법과 소재에 대한 은유적 창작을 통해서 획득 된다.(이관희)”(241쪽)


저자는 소설과 창작수필의 근본적 차이를 ‘사실과 허구’로 구분한다. 그렇게 단정 짓기에는 뭔가 부족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실화소설도 있지 않는가. 하여튼 저자는 허구와 사실로 소설과 수필을 구분한다. 다시 일반산문인지 창작수필인지를 구분한다. 둘 사의 구분의 시금석은 ‘구성법’에 있다.


“구성법을 문예 창작의 기본방법으로 <이것>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저것}이라는 새로운 창조적 세계를 만드는 일이다. 위에서 말한 창작문예수필이 에세이로부터 진화·분화하여 나온 새로운 양식의 창작 문학이라는 뜻은 창작문예수필의 기본 창작법은 구성 작업에 있다는 것이다.”(245쪽)


그렇다면 수필은 무엇을 창작하는가? 저자는 ‘사물의 마음’으로 정의한다.(247쪽) ‘<사물의 마음>이란 대상 사물과의 교감 세계’이다. 즉 의인화 또는 사물화를 말한다. 이 부분을 잘 드러낸 수필은 권현옥의 <나는 손톱입니다>이다. 손톱이라는 사실 소재에 기반 해 의물화를 통해 서술한다.


“창작의 세계는 상상력의 세계요, 허구의 세계이다. 창자수필(창작에세이)은 <교감하는 사물·존재 세계>를 창조한다. 창작수필은 시어도, 허구적 이야기도 아닌, ‘사물의 마음 이야기’, 즉 <사물과의 교감의 상상력>를 창작하는 문학이다.”(127쪽)


김영곤의 아까시나무를 소재로한 <내가 사랑 받는 이유> 또한 의물화 시킨 작품이다. 의물화는 의인화와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나 중요한 것은 화자 주인공의 시점이 ‘사물과의 교감의 상상력’을 충분히 이루어야 한다. 주인공인 아까시나무의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수필은 ‘토의하는 문학’이며, 창작문예수필은 ‘사물의 마음’을 창작하는 문학이다.(175쪽)


그제야 처음 수필을 읽고 내가 ‘단편소설’로 오해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창작문예의 핵심은 상상력을 발취한 ‘창작’에 있었던 것이다. 


“의인화는 상상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의인화 세계는 본질상 허구적 세계이다. 창장문예수필은 <시적 발상의 산문적 형상화> 양식의 문학이다. 즉 시문학과 서사문학의 두 장르의 진액을 추출하여 탄생시킨 제3의 새로운 창작 양식이 창작문예수필인 것이다.”(148쪽)


이렇게 본다면 창작 수필은 이전의 수필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전혀 다른 장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다르다기보다는 그동안 수필에 대해 오해한 것이 더 옳다. 수필은 붓가는 대로 쓰는 잡문이 아니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창작물이다. 필자는 창작수필을 ‘종래의 붓가는 대로라는 잡문(메모)론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되는 문학적 자존심’(94쪽)을 가져도 되는 것이라 말하는 저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수필을 좋아해 많이 읽는다. 그러나 지금까지 알아본 수필과 이번에 접한 창작수필은 격이 다르다. 며칠 동안 이 책을 손에 쥐고 고민했다. 중요한 부분에 밑줄 치며 진정한 수필이 뭔지 하나하나 다시 배웠다. 이 책에서 최고의 수필을 꼽으라면 단연코 정태헌의 <동백꽃>이다. 지금까지 알아왔던 수필과는 너무도 달랐던 탓이기도 하거니와 역사적 기억과 삶의 생체기를 창의적 상상력으로 풀어낸 수작이다. 나머지 수필들도 기꺼이 추천한다. 창작수필을 쓰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