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립자론의 세계 - 물질과 공간의 궁극에 도전 전파과학사 Blue Backs 블루백스 42
가다야마 야스히사 지음, 박정덕 옮김 / 전파과학사 / 198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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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05년 11월 1일에 보담을 갔더니 민형이 녀석이 학교에서 하는 행사에서 할 연극을 연습한다고 아직 안 왔다. 오후 8시가 넘어서야 온다고 해서 갑자기 1시간 동안 할 일이 없어졌다. 물론 이 녀석을 오랫동안 가르치면서 한 두 번 겪은 일이 아니기는 하다. 그래도 나름대로 교재 준비해서 가는데, 애가 없다고 하면 허무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짜증도 난다. 학교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돈과 시간을 쓰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공부방에 내려가서 민주 누나한테 애가 없다고 말하고 잠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런데 옥경이가 도서실이 있다면서 책을 보고 있는 것이 어떠냐고 나한테 물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곧 도서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책꽂이에는 제법 많은 책이 꽂혀 있었지만 대부분 어린이들이나 초, 중학생들이 읽을 만한 책이었다. 그러다가 이 책 '소립자론의 세계'를 발견했다. 값이 2500원밖에 안 되는 옛날 책이다.

 

옛날 책이라서 글자가 세로로 찍혀 있을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가로로 찍혀 있었다. 그러나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읽다가 몇 번이고 머리를 박박 긁어야 했다. 하긴 내 주위 사람들은 이 책 제목을 보자마자 그런 책을 왜 읽냐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면 나는 읽고 싶어서 읽는 것일 뿐이라고 시큰둥하게 받아넘겼다. 읽고 싶어서 선택한 책이라면 어느 정도 재미가 있고 읽은 뒤에 남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둘 다 얻지 못했다.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이미 고대 시대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고민했다. 그런 논의가 특히 활발했던 곳이 고대 그리스라고 알려져 있다. 탈레스는 물, 아낙시메네스는 공기, 데모크리토스는 원자, 플라톤은 4원소……수많은 철학자들이 각자 만물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내세우며 논쟁을 벌였으나 결과는 신통하지 않았다. 신들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미신에서 벗어나, 합리성을 보여줬다는 점에만 뜻이 있을 뿐이었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무대는 고대 그리스가 자연 철학자들이 활약했던 시기에서 무려 2000년이나 흐른 1900년대 초중반이다. 현대 물리학사를 새로 쓴 하이젠베르크, 파울리, 디렉, 유카와 히데키 따위 쟁쟁한 물리학자들이 나온다. 그들이 맹렬한 논쟁을 벌이면서 만물의 근원인 소립자를 하나씩 발견하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게 써 놓았다. 역시 진리를 탐구하려고 힘쓰는 모습은 언제 봐도 감동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 그 감동을 얼마나 크게 하느냐는 글 쓰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그 점에서는 작가가 성공한 듯 하다.

 

솔직히 그 책을 보지 않고 자세한 내용을 여기에 일일이 다 쓸 능력은 전혀 없다. 1학년 때 들었던 물리학 수업에서 배운 내용도 아주 얼핏 기억이 나는 형편이고, 고등학교 때 공부했던 과학도 거의 다 까먹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이런 교양 과학책을 읽을 때 내가 가장 걱정하는 점은 읽은 뒤에 자꾸만 까먹는다는 것이다. 진짜 기초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고서는 이런 어려운 책은 읽어봐야 쓸모가 없다는 생각도 요즘 자꾸 나를 괴롭힌다.

 

아무리 봐도 신문 경제면을 많이 읽으면 경제에 눈을 뜰 수 있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교양 과학책을 많이 읽으면 과학에 어느 정도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듯 하다. 만약 그것이 분명히 내가 머리가 안 좋아서 그렇다는 반론이 들어온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그저 부지런히 공부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현대 과학의 30가지 화제'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일본이 자주 나온다는 사실이 매우 부러웠다. 가다야마 야스히로라는 일본 사람이 썼다고 해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필요는 없다. 날조한 것도 아니며 일본이 매우 높은 과학 기술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나온 교양 과학책에 우리나라에서 이룬 업적이 당당하게 소개되는 그 날을 이 책을 읽으면서도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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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기행 - 나는 이런 여행을 해 왔다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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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 어떤 주제를 정한 뒤에 그에 관한 것을 취재한 뒤 쓴 글을 묶으면 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보통 기자들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다치바나 다카시라는 '지(知)의 거인'이 한 일이라서 그런지 색다르게 다가온다. 그가 쓴 글 가운데 책에 관한 글을 모았더니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라는 책이 되었고, 여행에 관한 글을 모았더니 이 책 '사색기행'이 되었다.
 

'뇌를 단련하다. 도쿄대 강의 ①-인간의 현재'를 읽은 뒤 다치바나 다카시라는 인물에게 홀딱 빠져버린 나는 '뇌를 단련하다. 도쿄대 강의 ②-진화의 코스몰로지'가 나오기만 목이 자라처럼 변하도록 기다렸다. 그러나 이 책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아서 나를 안타깝게 했다. 그 책이 나오기만 기다리다가, 기왕이면 이 사람이 쓴 모든 책을 사서 읽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계획을 실천하다가 몇 권은 돈이 없어서 결국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와서 매우 안타깝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한국에 번역되어 나오지 않은 책들도 있다는 겅시다. 일본어를 전혀 모르니 일본어 원서를 살 수도 없고, 이 사람이 지은 책 가운데 상당수가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나온 책이라서 절판된 것도 좀 많다고 하니 통탄할 일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산 책을 대충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저자는 모두 다치바나 다카시이므로 쓰지 않는다).

 

 

이규원 옮김. '사색기행'

박연정 옮김. '청춘표류'

윤대석 옮김. '임사체험' 상, 하권

전현희 옮김. '우주로부터의 귀환'

이언숙 옮김.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여기에서 '사색기행', '청춘표류',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만 읽었다. 모두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 가운데 이 책 '사색기행'이 특히 재미있었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와 비슷한 '나는 이런 여행을 해 왔다'라는 부제도 붙어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 같이 위대한 인물은 과연 어떤 여행을 했을지 너무 궁금해져서, 만약 이 책을 못 사면 속이 터져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토록 벼르고 또 벼르다가 드디어 내 손에 책을 쥐었다. 부지런히 읽은 뒤에 요즘 유행하는 말로 '낚였다'고 생각했다.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이 류비셰프가 쓴 일기장을 본 뒤에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다음 글을 보자.

 

 

나는 일기장을 뒤적여보았다. 1916년의 일기, 1917년의 일기, 1940년과 1941년의 일기를 살펴보았지만 다 똑같았다. 이건 일기라 할 수가 없었다. 하루 동안 한 일을 간단하게 나열하고 시간과 분을 계산한 후에 옆에 다시 알 수 없는 숫자를 적어두었다. 전쟁 이전의 일기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시시콜콜 적고 자기 생각을 풀어 내려가는 보통의 일기와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 지음. 이상원, 조금선 옮김.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41쪽

 

 

어쩌면 내 생각과 저렇게 같을 수가 있을까? 나는 책을 뒤적이기도 하고 꼼꼼하게 읽기도 하면서, 이 책을 끝까지 보았다. 이 책에 나온 글은 내가 생각했던 기행문이 아니었다. 어디에 갔고 어떤 것이 좋았고……이런 내용을 시시콜콜 쓴 평범한 기행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면 평범한 기행문이라는 말도 적절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보고', '독점 특종- 텔아비브 사건', '뉴욕 1981', 'AIDS의 황야를 가다'와 같은 글은 기행문이 아니라 취재 보고서이다. '무인도에서 보낸 엿새', '가르강튀아 풍의 폭음폭식 여행', '유럽 치즈 여행' 따위가 그래도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여행기에 좀 가깝지만, 그래도 '지의 거인'이라는 대단한 칭호(?)답게 엄청나게 많은 정보가 꽉 차 있다. 

 

'낚였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책은 대단히 재미있었다. 과연 한평생 진리만 좇으며 살아온 진정한 지식인이라는 칭송을 받을만 했다. 특히 '유럽으로 반핵 무전여행을 떠나다'에서 나오는 젊은 다치바나 다카시를 보고 나는 온몸을 옥죄는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젊은 다치바나 다카시는 피가 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진정한 젊은이였다. 솔직히 혼자서 외국에 나가기는 겁이 나서 역시 우리나라가 좋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나와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났다. '대기만성'이라는 고사성어로 자기를 애써 위로하고 있던 나를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속담이 진짜임을 증명한 젊은 다치바나 다카시가 때려눕힌 셈이다. 매우 아팠다.

 

좀 아프기는 해도, 다른 글에서 재미를 느끼면서 달걀을 굴릴 수 있었다. '무인도에서 보낸 엿새'는 읽은 뒤에도 자꾸 읽고 싶을 정도로 군침을 삼키게 했다. '가르강튀아풍 폭음폭식 여행'과 '유럽 치즈 여행' 같은 글은 아예 침을 질질 흘리도록 했다. 실제로 '가르강튀아풍 폭음폭식 여행'을 읽을 때는 배가 한창 고플 때여서, 보다가 나도 모르게 이불에 침을 흘리고 말았다. '기독교 예술 여행'을 읽으면서 그가 말하는 기독교 예술이 지닌 아름다움은 어떤 것인지 직접 느끼고 싶어졌다. 그러다가 라틴 아메리카를 침략한 유럽인들이 원주민들을 철저하게 학살한 만행을 폭로한 글을 보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놀랍게도 여기에 실린 글은 상당히 오래된 글인데도 전혀 생명을 잃지 않은 듯 했다. 특히 '팔레스타인 보고'가 그렇다. 대부분 한국 사람들이나 일본 사람들이나 팔레스타인이라고 하면 일단 테러범과 이슬람 원리주의자를 떠올린다. 그런 편견은 9.11 테러,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라크 침공 따위가 터지면서 미국이 열심히 선전한 정보 때문에 더욱 심해졌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국제정치 흐름을 읽을 수 없다고 다치바나 다카시는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을 미리 예측했다고 내가 짐작하게 할 정도로, 팔레스타인 사태에 관한 핵심만을 뽑아 '팔레스타인 보고'를 썼다. '팔레스타인 보고'를 읽으면서 지금까지 일어난 중동 또는 아랍과 관련된 사건을 생각해 보면, 좀 부풀려서 그것들이 모두 '팔레스타인 보고'라는 줄기에 매달린 고구마인듯 하다.

 

그리고 이 책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는 다치바나 다카시가 설명하는 여행을 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는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에서 밝힌 오토마톤 구조와 같은 원리를 여행이 중요한 까닭을 설명하는데서도 응용한다. 곧 새로운 자극을 얻으려면 여행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것이다.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어떤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고, 뇌는 익숙한 것은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되도록 적응한다는 것이다. 또 몸이 직접 가야만 느낄 수 있는 것도 있으니 여행을 다녀야 할 까닭은 더욱 분명하다.

 

달콤한 치즈를 씹고 포도주를 맛보고, 큰 교회에서 음악을 듣다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그의 입 안에서 녹아내린 치즈, 그의 입 안에 향기를 가득 채운 포도주, 웅장하고 진중한 음악에서 나오는 감동을 머금은 눈물이 문체에 묻어나는 듯 하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구축한 끝이 보이지 않는 독특한 세계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유혹이다. 너무 많은 정보를 끝없이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좋지 않다는 비판을 잠재울 만큼 그 유혹은 대단하다. 나는 이미 그 유혹에 단단히 넘어가버렸다.

 

이 책에 단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번역 문제다. 이규원 씨가 '뇌를 단련하다. 도쿄대 강의 ①-인간의 현재'도 좀 지저분하게(?) 옮겼는데, '사색기행'에서도 그와 같은 일이 벌어져서 좀 짜증이 났다. '살아있는 역사'를 한국어로 옮긴 김석희 씨보다는 확실히 실력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일본말이 한국어를 좀 많이 오염시켜서, 일본말을 우리말로 옮길 때 문제가 많다고 한글학자들이 매우 많이 지적했다. 그런 형편인데도 이 사람이 옮긴 책에는 일본어 번역투가 여전히 많이 보였을뿐만 아니라, 충분히 한국어로 옮길 수 있는 영단어도 그냥 놔두는 바람에 글을 읽기가 좀 껄끄러웠다. 지금까지 번역한 경력을 보아하니, 다치바나 다카시가 쓴 책이 새로 나오면 이 사람이 또 옮길 듯 하다. 다음에는 좀 더 깔끔한 번역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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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바둑스토리 2
강철수 / 동아출판사(두산)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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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라는 어린이들이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데 바둑이 매우 좋다는 말을 들으신 아버지 손에 이끌려 어린 나는 기원에 처음 갔다. 나와 또래이거나 나이가 엇비슷한 어린이들이 있는 곳은 좀 왁자지껄했지만,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이 있는 곳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었다. 무엇인지 모르는 분위기에 짓눌려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역시 어린이답게 거기에는 동화에서나 봤던 산신령들이 모여있는 줄 알았다. 산신령들이 흔히 바둑을 두면서 시간을 보내니까 말이다.
 

어떤 아이들이 바둑을 두는 것을 보았다. 흰 돌과 검은 돌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두 아이는 번갈아 가면서 계속 돌을 놓았다. 가끔씩 돌 한 두개를 들어내고, 어떤 때는 돌을 아주 많이 들어냈다. 들어내는 아이는 낄낄 웃었고 상대는 울상을 지었다. 그러더니 나중에 들어낸 돌을 다시 놓으면서 깔끔하게 정리(?)를 했다. 그러더니 몇 집이 났으니 누가 이겼다고 말하고 판을 치웠다.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원장님에게 인사를 한 뒤, 그 날부터 바로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여러모로 좋다고 열심히 다니라고 으름장을 놓으셨지만, 그저 놀기만 좋아했던 나는 바둑에 그다지 흥미가 붙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 기원에 같이 다니던 친구들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배웠다. 집, 옥집, 오궁도화, 화점, 삼삼, 소목 따위 기본 개념부터 배우고 그 뒤 축, 장문, 먹여치기, 패 따위 기본 기술을 배웠다.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인 뒤에야 원장님은 다른 아이들과 대국을 허락했고, 그때부터 나는 신나게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얼마 다니지 않다가 그만 둔 뒤에도 나는 바둑을 계속 뒀다. 여러 사람들과 계속 둔 보람이 있었는지 한 자리 급수 실력으로 보인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입시에 시달리고 컴퓨터 게임에 정신이 팔리기 시작하면서, 바둑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지금은 삼삼에 침투해 집을 지을 줄도 모르니 어떻게 이렇게 다 잊어버릴 수 있는지 신기하다. '박락형 지식'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인 듯 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바둑을 못 두는 것보다 더욱 아쉬운 것이 있다. 바둑,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단순해 보이는 그 놀이(?) 안에 담겨 있는 깊은 세계를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은 굉장히 큰 차이가 있기에, 바둑을 두지 못하는 것이 그렇게 가슴을 아프게 할 줄은 몰랐다.

 

어쨌든 바둑을 한창 둘 때 재미있게 읽었던 만화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만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강철수 화백이 지은 '新 바둑스토리'라는 책이다. '신(新)'이라는 글자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바둑스토리'도 있는데,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이 만화책이 정말 재미있어서 '바둑스토리'도 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구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다시 읽어도 재미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림도 재미있고 구수한 사투리도 재미있다. 바둑을 좀 둘 줄 아는 사람들은 자주 등장하는 문제 풀이와 바둑 기보를 분석하는 쏠쏠한 재미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주요섭이 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나오는 옥희가 여기에서는 요석이라는 아이로 나온다. 요석이라는 어린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이기에 더욱 재미있다. 한 때 바둑을 접고 다른 길을 찾는 장면에서는 어린이다운 생각에 저절로 폭소가 터졌다. 그러나 더욱 재미있는 것은 만화에서 드러나는 깊이다.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다시 읽어보니까 그 깊이가 무엇인지 나름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책날개에 강철수가 왜 유명한지 나와 있던데, 만화를 보면서 과연 그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프로기사가 되고 싶은 요석이, 돈이 없어 사랑하는 여자에게 퇴짜를 맞아 내기바둑을 두기 시작하는 요석이 막내삼촌, 그런 막내삼촌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기는 천재내기꾼 박봉, 그런 아버지를 싫어하면서도 아버지가 놓은 돌은 숭상하는 박봉의 딸 현정……이 사람들이 중심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주목해야 할 사람은 박봉이라는 노인이다. 프로 기사도 한 두 점 정도 접고(?)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는 바둑신에 가까운 기력을 자랑하는 이 노인은, 사기꾼이라고 봐야 할 지 진정으로 바둑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봐야 할 지 판단하기 힘든 인물이다. 그토록 쓴맛을 보고 한 때 폐인이 될 정도로 절망했던 막내삼촌도 박봉이 죽은 뒤 사기를 좀 쳐서 그렇지 훌륭한 노인(?)이었다고 말한다. 작가도 박봉이라는 노인이 보인 바둑에 대한 애착에 집중하고 싶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내가 공을 들여 묘사하려 했던 것은 묘기 백출의 기보도, '바둑 황제' 박봉의 인생 궤적도, 처절한 내기 바둑꾼의 세계도 아니다. 나는 다만 장인 정신으로 치부해 주고 싶은 한 인간의 집념을 소개하고 싶었다."

 

 

자질구레한 단상을 더는 남길 필요가 없을 듯 하다. 억지로 짜내는 글만큼 추한 것도 드물기 때문이다. 머리도 돌아가지 않는다. 다만 이 책에서 어쩌면 진짜 주인공이라고도 볼 수 있는 천재(?)내기꾼 박봉이 남긴 말 가운데 몇 마디만큼은 그냥 넘어가기 아까워서 여기에 남긴다. 어떻게 보면 잔인하고 인정머리없어 보이면서도, 또 다르게 생각하면 그런 것이야말로 바로 진리로 보인다. 순간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바둑은 담소가 아니고 죽고 죽이는 전쟁이여! 내가 먼저 쏘지 않으면 상대가 나를 찔러죽이는 살인게임이여.

 

바둑을 조화라고 얼빠진 비유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먹고 살만 해져서 하는 헛소리! 바둑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략과 죽임의 예술이여.

 

바둑돌의 진퇴, 미동 하나까지도 죽임과 연관되지 않으면 바둑의 본질에 대한 배신행위여.

 

전장에서 포병의 오조준이 있듯이 바둑에도 자객의 실수가 있지만 그렇다고 살의를 중단해선 안돼.

 

전세가 기울어 이길 수 없을 때는 적장을 껴안고 동반폭사라도 해서 바둑과의 신의를 지켜야 해."

 

 

……

 

 

현정 : 오늘은 얼마 따셨어요?

 

박봉 : 별로여.

 

현정 : 그래도 많이 따셨네요. 행복하세요?

 

박봉 : 승부사의 분복이여.

 

현정 : 아빤 벌받구 말 거예요.

 

박봉 : 씨잘데없는 소리 말어.

 

현정 : 아빤 정말 벌받구 말 거에요!

 

박봉 : 야가 오늘 워째 안허던 소리를 허구 이래?

 

현정 : 아빠한테 바둑을 지고 돈을 잃은 사람 입장을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제발 사람들 그만 좀 괴롭히세요. 네? 

 

박봉 : 얼빠진 소리! 나한테 깨지지 않으면 다른 놈 누구헌테 깨잘 자들이여.

 

현정 : 이제 제발 내기바둑 그만 두세요! 저도 이제 직장 다닐 거예요.

 

박봉 : 이런 얼빠진! 세상이란데를 잘 보면 제법 아기자기 질서있게 굴러가는 것 같아도 세상은 승부의 각축장이여! 승부 아닌 데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어?

 

승부란 준엄하고 고결하고 공평한 거여! 승부를 피해간 민족은 모두 망했고 삼류국가가 되었어!

 

현정 : 사람들이 그 승부에 집착해서 세상이 사막처럼 황폐해져 가는걸 모르세요?

 

박봉 : 타협하고 담합해서 세상이 썩어가는 거여!

 

현정 : 남을 이기겠다고 기를 쓰고 악을 쓰기 때문에 몰염치해지고 잔악해진 거예요!

 

박봉 : 인류의 역사란게 뭐여? 그것은 단지 승자들의 기록이여! 문명이란게 뭐여? 그것은 승자들의 전리품이여!

 

나약한 패자들이 눈물로 써 내려간 비망록, 그것은 역사가 아니고 공배여!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는 덧없음이여!

 

현정 : 그래서 늘 승리해서 무엇을 얻으셨어요? 명예를? 재산을? 가정을?

 

박봉 : 승리의 보수는 승리일 뿐이여.

 

현정 : 아빤 패배자에요. 태어나서 한 번도 남을 사랑해 본 적이 없는 패배의 인생.

 

박봉 : 난 바둑을 사랑했어.

 

현정 : 아빤 패배한 거예요.

 

박봉 : 난 늘 즐거웠어. 승부가 있고 쓰러뜨릴 상대가 있는 한 난 항상 행복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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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 1
백동호 지음 / 북하우스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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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大盜)! 큰 도둑! 이만큼 백동호라는 사람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이 소설을 쓰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남자는 오로지 도둑질로 먹고 살았던 사람이다.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고 처음에는 험난한 세상에서 도둑질밖에 할 것이 없어서 돈을 훔치기 시작했던 그는, 세월이 흐르면서 전문 금고털이범으로 성장했다. 교도소를 몇 번이고 드나들었고 어두운 세계에서 하류 인생을 사는 사람으로서 겪을 수 있는 온갖 고난을 다 겪었다. 그 모든 경험들이 전혀 여과되지 않은 진솔한 표현으로 바뀌어 이 책에 담겼다.
 

태어났을 때부터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다는 말이 딱 알맞을 듯 하다. 친아버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친어머니는 백동호를 낳은 뒤 그대로 굶어죽었다. 어쩌다가 형편이 넉넉한 양부모를 만났지만, 양어머니가 심하게 학대하자 집을 나온 뒤 그는 소위 '하류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양아치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도둑질을 하고, 창녀촌에서 여자들과 뒹굴고, 수시로 교도소를 드나들고, 교도소에서도 온갖 소동을 일으키고……한 마디로 대단하다.

 

그리고 단순히 하류 인생을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이 아니라, 머리가 워낙 좋은 사람이다 보니까 분명히 뭔가 독특한 점이 있다. 아는 것이 많고 입담도 좋아서 여자를 꼬드길 때도 그런 것을 잘 써먹고, 교도소에서도 현금수송차를 탈취하겠다는 목표를 이루고자 마취학을 공부한다. 그런 머리로 이렇게 소설을 썼으니 이 '대도'라는 소설은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흔히 말하는 '어둠의 세계'를 이토록 글로 잘 표현한 소설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하긴 진솔하고 거침없는 문체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이 소설을 읽다가, 어떤 때는 침을 꿀꺽 삼키고 어떤 때는 혼자서 흥분해 씩씩대기도 했다. 이런 것이 정말 잘 쓴 소설이라는 생각도 할 정도였다. 물론 요즘은 지나치게 학술에 관한 내용에만 집착하는 편이라, 내용 자체는 별로 좋게 보지 않지만 말이다.

 

백동호라는 남자가 살아온 인생을 보고, 내가 한 때 이런 인생을 열망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터무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싸움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아니었던 정말 철없던 시절에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싸움 잘 하고 여자들과 어울려 다니며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양아치들 모습이 멋있어 보일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과 어울리려고 오락실에서 실컷 오락을 하다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함께 담배를 여러 번 피웠다. 내가 중학생 때만 하더라도 지금은 대개 2500원씩이나 하는 담배가 비싸봐야 그 절반밖에 되지 않았으니, 중학생이 받는 용돈으로도 충분히 담배값을 채울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때는 용돈 받는 것 말고도 수시로 부모님 호주머니를 뒤져 돈을 꺼내 썼으니 나름대로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껏 여자를 만나고 다닐 만한 돈은 없었다. 그리고 싸움을 못하고 성격도 그렇게 사나운 편이 아니라서, 순수한 양아치들과는 어울릴 수가 없었다. 어떤 때는 재수없다고 그들한테 실컷 얻어맞기도 했다. 그러면서 차츰 어이없는 생각을 깨기 시작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만약 그들과 잘 어울리는데 성공했다면, 나는 지금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한 때 모터사이클(물론 동네 할아버지들도 타고 다니시는 그런 차량이기는 했지만)을 타고 도로를 질주하며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물론 나야 모터사이클이 없었으니, 주로 신문 배달을 하는 녀석들과 어울려 다녀야 했다. 차 타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어서 자주 타고 싶었는데, 그런 녀석들과도 사이가 안 좋았는데다가 몇 번이고 싸워서 어쩔 수 없었다.

 

이런저런 짓을 해 봐도 역시 나는 원단 양아치는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제대로 하기는 싫었다. 역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에게는 훨씬 더 심한 후회와 번민이 찾아왔고, 그렇다고 해서 어떤 뚜렷한 방법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 때 쓴 일기를 읽어보면 항상 의지를 불태우고 계획을 세우기는 하지만, 제대로 실천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지금까지 그런 일기를 남기고 있다면 과연 나는 어떤 모습일까?

 

철없이 살던 시절과 이 책에서 떠올릴 수 있는 영상이 겹쳐 나를 뒤흔들었다. 두꺼운 소설을 다 읽은 뒤, 나쁜 꿈에 시달리면서 땀에 흠뻑 젖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심한 나날을 보냈던 기억에 사로잡힌 것은 그만큼 끔찍한 일이었다. 예전에 내가 했던 일을 애써 잊고 부정하려고 해 보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차라리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까발릴 것은 까발리는 것이 속이 더 시원했다. 그도 이 소설을 쓰면서 그런 상쾌함을 느꼈을까?

 

전문 금고털이범이었던 백동호! 그가 남긴 '대도'라는 소설은 무엇인가? 범죄자로서 살았던 험난하고 어두웠던 삶을 청산하는 신호라고 봐야 하는가? 자기가 힘써서 벌어 먹고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뚝뚝 묻어나는 작품인가?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과감하고 솔직하게 부끄러운 과거를 드러낸 용기만으로도, 박수 갈채를 받을 자격이 있다. 이 소설이 또다른 장편 소설 '유서'와 더불어 나름대로 대박이 터졌다고 하니, 사람들도 자기 힘으로 먹고 살겠다는 그 의지를 높이 평가한 듯 하다. 한 상자나 되는 격려 편지를 받고 크게 감동해서 더욱 열심히 일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크게 성공한 셈이다. 

 

나름대로는 참 추한 삶을 살았다고 나는 계속 말한다. 그러나 백동호라는 남자에게는 기분이 나쁜 말일 수도 있지만, 그와 견주어 보면 구더기 앞에서 주름 잡는 꼴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 섬뜩한 경고를 하려고 이 소설을 썼는지는 잘 모른다. 어떤 것을 접했을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자기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한 때 잘못된 길로 빠질 뻔 했던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더욱 경각심을 가지고 올바른 길을 걸으려고 힘써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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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1
김진명 지음 / 해냄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2005년 말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한 황우석 교수 파문은 대한민국에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노벨상 후보로까지 거론되었던 황우석 교수가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는 모습을 바라본 사람들은, 혹시가 설마로, 설마가 진짜로 변하자 크게 실망했다. 난치병 환자들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까지 막연하게 품고 있던 희망을 크게 꺾어버린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번 파문은 대한민국 안에서 곪았던 모든 것들이 터졌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수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과학, 정치, 사회, 문화 따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 사태를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굉장히 어려울 듯 하다. 그래도 문제들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문제가 터졌는데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터졌다가 잠깐 잠잠해진 상처는 다시 곪아 또 터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에서 가장 거센 비판을 받아야 할 사람은 당연히 2005년 논문에 제 1 저자로 나와 있고 그동안 온갖 혜택과 영예를 누렸던 황우석 교수다. 2004년 논문에 이어 발표한 2005년 논문이 말하는 것은 맞춤형 줄기세포를 만드는데 성공할 확률이 크게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동안 세계에서 70여 개 특허 신청이 나올 정도로 줄기세포 기술은 많이 발전했다. 그러나 기술은 있어도 그 기술에 따라 줄기세포를 배양하는데 성공할 확률이 낮아서, 어느 기술도 뚜렷하게 훌륭하다고 인정받지는 못했다. 황우석 교수 연구팀이 내놓은 발표 성과에서 확률이 중요한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2004년 논문에서는 천 개가 넘는 난자를 써서 겨우 줄기세포 1개를 만들었다면, 2005년 논문에서는 난자를 180여 개 정도만 썼는데 줄기세포를 11개나 만들었다는 것이다.

 

영롱이, 스너피, 2004년 논문, 2005년 논문……성과가 계속 나오면서 황우석 교수에게 쏟아지는 찬사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최고 과학자로 선정된 뒤 대통령급 경호, 보통 과학자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연구비 따위 온갖 혜택을 누렸다. 최재천 교수, 김병종 교수와 함께 쓴 '나의 생명 이야기'도 불티나게 팔렸고, 교과서에 황우석 교수가 이루어 낸 업적들이 실렸다. '황우석 증후군'이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였다. 

 

그런데 PD 수첩에서 감히 위대한 황우석 교수를 비판했다. 황우석 교수가 줄기세포 연구를 하면서 쓴 난자를 얻는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PD 수첩 편을 들어주는 진영은 완전히 묻혀야 했다. PD 수첩을 맡은 한학수 PD 가족들은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에 시달려 집 밖에도 못 나갔고, 한학수 PD는 인터넷에서 난자당했다. 누리꾼들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황우석 교수에 관한 어떠한 비판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했다. 

 

MBC는 그야말로 파탄으로 치닫는 듯 했다. 뉴스데스크에 광고가 끊기고 PD 수첩은 방송을 그만뒀다. 얼마 뒤 YTN이 MBC가 취재 윤리를 어겼다는 보도로 MBC에 치명타를 먹였다. 주주 총회가 열려 방송사 전체가 위기에 빠져 있다고 평을 내릴 정도로 MBC는 추락했다.

 

MBC와 같은 노선을 걷는 한겨레,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따위를 조중동 같이 세상 흐름을 타는데만 익숙한 수구 언론들은 언론으로서 자격이 없다면서 비난했다. MBC를 비난하는데 집중하기는 했지만, 항상 그들과 대립해 온 여러 인터넷 언론들과 한겨레도 그런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런데 그토록 비난이 심했는데도 황우석 교수를 비판하는 움직임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갈수록 커졌다. 젊은 생명공학자들이 모인 BRIC에서 논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MBC와 같은 언론들은 도를 넘어선 비난에도 고개를 절대 숙이지 않았다. MBC는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도 언젠가는 자기들이 옳다고 밝혀질 것이라고 믿었다.

 

결국 걱정했던 일이 터졌다. 황우석 교수가 그토록 말이 많던 2005년 논문을 철회했다. 황우석 교수는 생명윤리를 위반했고 논문을 조작했다고 인정했다. 설마 했던 일이 사실로 드러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였다. 핵폭탄이 터지면서 나오는 열선, 열풍과 같은 폭풍이 대한민국을 휩쓸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황우석 교수와 황우석 교수를 무작정 지지하는 사람들, 소위 '황빠'들을 비판하며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한 MBC, 한겨레 따위 언론은 지옥 문턱까지 몰렸다가 살아났지만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황우석 교수를 영웅으로 만들면서 이치에 맞는 비판을 잠재우는데 힘썼던 조중동도 완전히 태도를 바꿔서 흔히 말하는 '황까'가 되어 버렸다. 

 

황우석 교수가 끝없이 추락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국민들은 여러 가지 반응을 보였다. 그 가운데 내가 가장 가당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로 PD 수첩이 윤리 문제를 제기했을 때부터 황우석 교수에 대한 어떤 비판도 막아버리려고 작정한 골수 '황빠'들이다. 그들은 황우석 교수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 뒤에도 황우석 교수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강변하면서, 이치에 맞는 비판도 아예 듣고 자기들한테 이로운 말만 골라 들었다. 내가 한 때 심하게 논쟁을 벌였던 청사모(청주를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과 어쩌면 그렇게 똑같을까.

 

그들이 보이는 추태를 여기에서 일일이 다 쓸 필요는 없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그들이 제기하는 음모론이었다. 황우석 교수 파문을 둘러싸고 연세대 음모론, 삼성 음모론, 북한 주사파 음모론, 프리메이슨 음모론, 미국 음모론 따위 온갖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끈질기게 제기되는 것이 미국 음모론이다. 섀튼 교수가 미국에 파견되어 있는 우리나라 줄기세포 연구원들을 미국에 남도록 권유하고, 그 뒤 줄기세포 기술을 특허 신청을 냈다는 소식이 뜬 뒤 미국 음모론이 대세로 자리잡었다.

 

그 뒤에 벌어진 이야기, 그리고 빠진 이야기들은 여기에서 굳이 쓸 필요가 없을 듯 하다. 다른 글에 써도 충분하다. 나는 그저 '미국 음모론'을 이야기하려고, 지금까지 이렇게 긴 이야기를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황우석 교수 파문에 관한 생각을 정리할 목적도 있었으니 돌 한 개로 두 마리 참새를 잡은 셈이다. 혹시 이 글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독후감을 쓰는 독특한 방식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저 넘어가 주면 대단히 고맙겠다. 독후감을 어떻게 쓰라는 정확하고 엄격한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미국이 위대한 대한민국 과학자 황우석을 죽이려고 한다. 황우석 교수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사진을 실수가 아니라 일부러 잘못 집어넣고 줄기세포를 바꿔치기한 노성일 이사장이 죽일 놈이다. 미국 시민권이 있는 노성일 미즈메디 병원 이사장이 미국에서 사주를 받고 황우석 교수를 죽이기 이미 윤리 문제가 불거지자 섀튼 교수가 발을 빼려고 한 것은, 섀튼 교수도 동반자가 아닌 미국 앞잡이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 엄청난 국익을 선사하고 대한민국이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황우석 교수를 매장하려는 모든 세력은 미국이 사주한 매국노다."

 

미국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이 책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자연스레 떠올렸다.

 

깡패들이 웬 남자를 죽이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단순한 살인 사건으로 여겨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런데 권순범이라는 젊은 기자가 관심을 가지고 의문점을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한다. 이용후를 살해한 이야기를 해 줬던 조폭 두목 박성길이 교도소 안에서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권순범은, 그 남자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며 그 죽음 뒤에는 뭔가 거대한 것이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죽은 남자가 천재 핵물리학자인 이용후라는 것을 안 뒤 의심은 확신으로 바뀐다.

 

박정희 대통령을 모셨던 고급 요정 마담 신윤미, 이용후의 친딸 이미현, 이용후와 같이 미국에서 연구하다가 고국인 인도로 돌아간 핵물리학자 라프르 간다……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수많은 사건에 휘말려 때로는 목숨을 잃을 뻔 하면서, 권순범은 그 살인 사건 뒤에 숨어 있는 거대한 음모를 밝혀낸다. 그 음모는 미국이 꾸민 것이었다.

 

"세계 속에 우뚝 선 강한 대한민국을 꿈꾸던 박정희 대통령이 이용후 박사를 설득하여 핵무기를 개발했다. 지하 핵실험만 남겨놓은 상황이었는데 이것을 알아챈 미국이 이용후 박사와 박정희 대통령에게 마수를 뻗쳤다. 이용후 박사는 미국이 사주한 깡패들에게 살해당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인 박정희 대통령은 지하 핵실험을 강행하려고 하다가 미국이 사주한 김재규에게 총을 맞고 서거했다."

 

그는 그 음모를 밝혀낸 뒤, 대통령에게 핵무기 개발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대통령은 남북 합작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시도하지만, 정부 기관 안에 숨겨진 미국 앞잡이 때문에 모든 것이 들통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미국으로 가려던 매국노 이한수를 권순범이 비행기 안에서 처단하여 위기를 넘긴다.

 

남북은 힘을 합쳐 드디어 핵무기를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국방부에서는 핵무기를 마련한 한국군에게 필요한 전쟁 시나리오를 모집한다. 권순범이 쓴 원고가 1등을 차지하고 국방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원고 내용이 흘러나오면서 소설은 끝난다.

 

문체도 어떤 생각을 드러내는 부분에서는 '~가?'라는 의문형 종결 어미를 많이 써서 심금을 울리게 했고, 내용 자체도 애국심을 자극하다 보니까 사람들은 소설에 정신 없이 빠져들 수 있었다. 그런 장치를 마련하는 솜씨는 칭찬받을만 하다. 그 솜씨 덕분인지 몰라도 이 책은 약 450만 부나 팔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대박이 터진 소설 가운데 하나인 '퇴마록'이 약 800만 부가 팔렸다고 하니 그와 견주어 볼 때 나름대로 크게 성공한 셈이다. 대박이라는 말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 까닭을 나름대로 알아봤는데, 내가 알아본 바가 맞다면 참 우울하다.

 

이 소설이 성공하여 김진명이 떼돈을 벌었을 때인 1990년대에 조문 파동이 일어나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골수 극우파인 박홍 신부가 주사파들이 이번 조문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내란을 부추기고 있다고 하여,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운동권 세력이 된서리를 맞았다. 전경들이 연세대 도서관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일까지 벌어졌고, 수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끌려갔다. 수구 언론은 그토록 강조했던 국가 안보를 더욱 열심히 선전했고, 드디어 어느 정도 햇빛을 보기 시작했던 학생 운동도 다시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뭇매를 맞기 시작했다.

 

수구 세력이 원하는 대로 남북 관계가 얼어붙으면서, 사람들은 언제까지 북한에 시달려야 하는지 모른다고 불만을 품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다시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군사 독재라도 상관없으니 대한민국을 세계 속에 우뚝 서도록 한 영웅인 박정희 대통령이 다시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주장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 주장은 참여 정부가 나라를 잘 이끌지 못하고 휘청거리면서 더욱 강해기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권력을 쥐고 있을 때 반공과 국가 안보를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이순신과 같이 나라를 지키거나 강하게 만든 영웅을 그리워하도록 만들었다. 그 덕분에 차관에 의존해서라도 경제를 빠르게 개발하여 자기도 영웅으로 국민들 의식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 그러면서 독재 권력을 정당한 것처럼 만들고, 부당한 독재 권력에 대항하는 민주 운동가들을 철저하게 탄압할 수 있었다. 남한 사람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빨갱이들이 추종하는 김일성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나오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 성립하는 '적대적 의존성'이라는 개념을 박정희와 김일성 사이에서는 '적대적 공범자'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적용할 수 있다.

 

어쨌든 아직도 박정희 대통령 같은 독재자가 또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별로 달갑지 않다. 심지어 민주화 운동이 대한민국 발전에 매우 큰 걸림돌이 되었으며, 한국 사람들은 역시 국민성이 낮아서 민주주의는 아직 이르다는 주장도 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런 주장이 오히려 형편없이 낮은 사람들 의식 수준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영웅을 아예 무시해서는 안 된다. 유신사관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자연과학사와 인문사회사는 분명히 다르다. 인문사회사에서 유신사관을 사람들이 널리 받아들일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닌다면 곤란하다. 설사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폭군과 같은 독재자는 영웅이 될 수 없다. 설사 독재에 맞서 사람다운 삶과 정당한 권리를 얻어내려고 싸운 민중이 있었기에, 역사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발전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천재 수학자는 이론을 제시하고 실력 있는 수학자는 그 이론을 증명한다는 말이 있다. 천재 수학자도 중요하지만, 실력 있는 수학자도 역시 중요하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발전한 원동력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하던 개인 수완보다 피땀과 눈물을 쏟았던 민중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아예 무시하려는 것인가? 왜 그토록 박정희 대통령에게 집착하는 것인가? 그토록 영웅에 열광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 1조를 단순한 법조문이 아닌 현실로 바꿔놓은 힘은 바로 민중에게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법조문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가, 아니면 애써 무시하는 것인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그때만 하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착착 감기는 조청과도 같았다. 북한과 힘을 합쳐 핵을 개발하여 민족 공조를 높인다는 내용은, 언제까지 북한과 원수로 살아야 할지 걱정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강한 대한민국과 겹쳐 희망을 키웠다. 그리고 미국이 심어놓은 매국노를 처단하고 핵무기를 만드는데 성공하는 내용도, 자기들은 많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NPT를 이용하여 다른 나라가 핵무기를 가지지 못하게 하는 미국에 대한 불만을 잠시나마 푸는데 한 몫 단단히 했다. 게다가 마지막에 핵미사일을 발사하여 일본을 무릎 꿇게 하는 장면에서, 사람들은 대단한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이다.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그런 대단한 일을 실현하려고 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사람들에게 어떤 인물인가? 당연히 잿더미에서 대한민국을 일으킨 영웅이지 않은가!

 

원래 자기가 존경하는 인물을 깎아내리면 사람들은 화를 내기 마련이다. 그렇게 화를 내는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자기들에게 위대한 인물을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치에 맞는 논리로 지적하지 못하는 것과, 그들이 화를 내는 까닭이 문제인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숭상하는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경제학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일갈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일군 단 하나뿐인 성과로 그들이 내세우는 경제 성장을 꼼꼼하게 뜯어보면, 그들이 그토록 강변하는 것처럼 완벽한 방법이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라면 경제학자들은 모두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엇갈린다. 물론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룬 경제 성장을 수구 세력처럼 철저하게 긍정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박정희 대통령을 숭상하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 사람들이 과연 대한민국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인가? 독재 권력에 빌붙어 단물을 빨아먹고 살았던 기득권 수구 세력이지 않은가?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과연 지금 이치에 맞는가? 이념 논쟁을 포기하면 나라가 망한다면서 빨갱이를 척결하고 적화 통일을 막아내자는 구호를 그와 전혀 상관없는 사립학교법 따위에 적용하는 낡아빠진 사고가 과연 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그들이 과연 정당한 비판을 받아들이는가?

 

그들과 황우석 교수를 무작정 지지하는 광신도(?)들이 무엇이 다른가? 사이비 교주, 줄기세포교, 파시즘이라는 말이 아무 까닭 없이 그저 황우석 교수를 매도하려고 나온 말인가? 처음에 난자 윤리 문제를 제기했을 때부터 그들은 황우석 교수를 비판하는 모든 시도를 차단하려고 했다. 난자 윤리 문제를 걸고 넘어지면 자기는 얼마나 깨끗하게 살았냐는 이상한 말로 받아쳤다. 젊은 생명과학자과 소장파 교수들이 논문을 의심하고 검증을 주장하자, 황우석 교수처럼 논문도 내 본 적이 없는 것들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느냐고 비난했다. 마음에 드는대로 끼워맞추면 그만이었지 이성에 따른 바른 논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논문 조작이 사실로 드러나고, 2004년 논문마저 조작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황우석 교수를 무조건 믿는 사람들은 기가 꺾이지 않았다. 온갖 음모론을 쏟아내면서 황우석 교수를 무작정 감싸기에 바쁘다. 황우석 교수에게 불리한 보도가 나오면 무조건 편파 보도이고 잘못되었다고 우긴다. 이런 사람들이 과연 정상이라고 볼 수 있는가? 과학은 끝없는 의심과 철저한 검증으로만 발전시킬 수 있으며, 그렇게 나온 결과만이 진정으로 국익을 창출할 수 있다. 그 기본 원리마저 무시하는 저들이 스스로 국익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며 애국자라는 착각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면 기가 차다. 

 

그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황우석 교수가 끝도 없이 추락하는 모습을 본 광신도들은 그들이 그토록 숭상했던 영웅이 추락하는 모습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식이 죽었다는 말을 애써 부정해서 위안을 얻으려는 어머니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황우석 교수를 살려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그들에게 김진명이 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매우 큰 영향을 주지 않았는지 의심스럽다. 이휘소 박사(이 소설에서는 이용후 박사)와 황우석 교수를 그들은 같은 선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덤으로 황우석 교수를 무작정 지지하는 사람들이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영웅(?)을 그리워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온다면 내 생각이 완전히 들어맞는 셈이다. 그런 사고를 불러일으키는데 김진명이 기여했다면, 그는 내 관점에서는 대한민국에 매우 큰 죄를 지은 셈이다.

 

한국에서 우익이라고 설치는 세력이 정체성이 썩어 문드러졌다고 일갈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형편 속에서, 김진명은 그나마 건강한 우익으로 평가받는 편이다. 이 소설에서도 북한과 협력하는 모습에 공을 들인 것을 보니까, 극우 세력과는 그나마 다른 사람인 듯 하다. 그리고 이 책이 매우 재미있어서 새삼스럽게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읽은 뒤 몇 년이 지나서야 독후감을 쓰면서, 김진명이라는 사람을 그다지 좋지 않게 보기 시작했다. 이화여대에 다니는 어느 여학생이 쓴 김진명 소설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읽으면서 그 말이 옳다고 믿었다. 김진명에 관한 수많은 자료를 읽으면서도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그가 쓴 다른 소설을 사 보고 싶다는 생각도 어느새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이문열이 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떠오른다. 내용은 그다지 상관이 없다 하더라도 제목만큼은 딱 알맞다. 황우석 교수와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일그러진 영웅을 감싸려고 발버둥치면서 이치에 맞는 비판을 모조리 거부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갑자기 맥이 탁 풀려버리도록 하는 이 소설 끝부분을 떠올릴 때 왜 그 두 인물이 겹치면서 떠오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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