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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 1
백동호 지음 / 북하우스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대도(大盜)! 큰 도둑! 이만큼 백동호라는 사람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이 소설을 쓰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남자는 오로지 도둑질로 먹고 살았던 사람이다.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고 처음에는 험난한 세상에서 도둑질밖에 할 것이 없어서 돈을 훔치기 시작했던 그는, 세월이 흐르면서 전문 금고털이범으로 성장했다. 교도소를 몇 번이고 드나들었고 어두운 세계에서 하류 인생을 사는 사람으로서 겪을 수 있는 온갖 고난을 다 겪었다. 그 모든 경험들이 전혀 여과되지 않은 진솔한 표현으로 바뀌어 이 책에 담겼다.
태어났을 때부터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다는 말이 딱 알맞을 듯 하다. 친아버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친어머니는 백동호를 낳은 뒤 그대로 굶어죽었다. 어쩌다가 형편이 넉넉한 양부모를 만났지만, 양어머니가 심하게 학대하자 집을 나온 뒤 그는 소위 '하류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양아치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도둑질을 하고, 창녀촌에서 여자들과 뒹굴고, 수시로 교도소를 드나들고, 교도소에서도 온갖 소동을 일으키고……한 마디로 대단하다.
그리고 단순히 하류 인생을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이 아니라, 머리가 워낙 좋은 사람이다 보니까 분명히 뭔가 독특한 점이 있다. 아는 것이 많고 입담도 좋아서 여자를 꼬드길 때도 그런 것을 잘 써먹고, 교도소에서도 현금수송차를 탈취하겠다는 목표를 이루고자 마취학을 공부한다. 그런 머리로 이렇게 소설을 썼으니 이 '대도'라는 소설은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흔히 말하는 '어둠의 세계'를 이토록 글로 잘 표현한 소설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하긴 진솔하고 거침없는 문체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이 소설을 읽다가, 어떤 때는 침을 꿀꺽 삼키고 어떤 때는 혼자서 흥분해 씩씩대기도 했다. 이런 것이 정말 잘 쓴 소설이라는 생각도 할 정도였다. 물론 요즘은 지나치게 학술에 관한 내용에만 집착하는 편이라, 내용 자체는 별로 좋게 보지 않지만 말이다.
백동호라는 남자가 살아온 인생을 보고, 내가 한 때 이런 인생을 열망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터무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싸움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아니었던 정말 철없던 시절에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싸움 잘 하고 여자들과 어울려 다니며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양아치들 모습이 멋있어 보일 때가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들과 어울리려고 오락실에서 실컷 오락을 하다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함께 담배를 여러 번 피웠다. 내가 중학생 때만 하더라도 지금은 대개 2500원씩이나 하는 담배가 비싸봐야 그 절반밖에 되지 않았으니, 중학생이 받는 용돈으로도 충분히 담배값을 채울 수 있었다. 게다가 그 때는 용돈 받는 것 말고도 수시로 부모님 호주머니를 뒤져 돈을 꺼내 썼으니 나름대로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껏 여자를 만나고 다닐 만한 돈은 없었다. 그리고 싸움을 못하고 성격도 그렇게 사나운 편이 아니라서, 순수한 양아치들과는 어울릴 수가 없었다. 어떤 때는 재수없다고 그들한테 실컷 얻어맞기도 했다. 그러면서 차츰 어이없는 생각을 깨기 시작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만약 그들과 잘 어울리는데 성공했다면, 나는 지금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한 때 모터사이클(물론 동네 할아버지들도 타고 다니시는 그런 차량이기는 했지만)을 타고 도로를 질주하며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물론 나야 모터사이클이 없었으니, 주로 신문 배달을 하는 녀석들과 어울려 다녀야 했다. 차 타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어서 자주 타고 싶었는데, 그런 녀석들과도 사이가 안 좋았는데다가 몇 번이고 싸워서 어쩔 수 없었다.
이런저런 짓을 해 봐도 역시 나는 원단 양아치는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제대로 하기는 싫었다. 역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에게는 훨씬 더 심한 후회와 번민이 찾아왔고, 그렇다고 해서 어떤 뚜렷한 방법이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 때 쓴 일기를 읽어보면 항상 의지를 불태우고 계획을 세우기는 하지만, 제대로 실천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지금까지 그런 일기를 남기고 있다면 과연 나는 어떤 모습일까?
철없이 살던 시절과 이 책에서 떠올릴 수 있는 영상이 겹쳐 나를 뒤흔들었다. 두꺼운 소설을 다 읽은 뒤, 나쁜 꿈에 시달리면서 땀에 흠뻑 젖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심한 나날을 보냈던 기억에 사로잡힌 것은 그만큼 끔찍한 일이었다. 예전에 내가 했던 일을 애써 잊고 부정하려고 해 보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차라리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까발릴 것은 까발리는 것이 속이 더 시원했다. 그도 이 소설을 쓰면서 그런 상쾌함을 느꼈을까?
전문 금고털이범이었던 백동호! 그가 남긴 '대도'라는 소설은 무엇인가? 범죄자로서 살았던 험난하고 어두웠던 삶을 청산하는 신호라고 봐야 하는가? 자기가 힘써서 벌어 먹고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뚝뚝 묻어나는 작품인가?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과감하고 솔직하게 부끄러운 과거를 드러낸 용기만으로도, 박수 갈채를 받을 자격이 있다. 이 소설이 또다른 장편 소설 '유서'와 더불어 나름대로 대박이 터졌다고 하니, 사람들도 자기 힘으로 먹고 살겠다는 그 의지를 높이 평가한 듯 하다. 한 상자나 되는 격려 편지를 받고 크게 감동해서 더욱 열심히 일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크게 성공한 셈이다.
나름대로는 참 추한 삶을 살았다고 나는 계속 말한다. 그러나 백동호라는 남자에게는 기분이 나쁜 말일 수도 있지만, 그와 견주어 보면 구더기 앞에서 주름 잡는 꼴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 섬뜩한 경고를 하려고 이 소설을 썼는지는 잘 모른다. 어떤 것을 접했을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자기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한 때 잘못된 길로 빠질 뻔 했던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더욱 경각심을 가지고 올바른 길을 걸으려고 힘써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