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 좀 들어봐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8월
품절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때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어. 그렇잖은가? 음악이 멈추고 갑자기 서로의 눈이 처음으로 마주치는 따위의 극적인 순간 같은 건 없다고. 물론, 어떤 사람한테는 그런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아냐. 아침에 잠이 깼는데 같이 잔 남자가 코를 골지 않는 걸 보고 사랑에 빠졌다고 말한 친구가 있었어. 그게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잖아? 진짜같이 들리긴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건 당신이 뒤를 돌아보고 여러 순간 가운데 어떤 특정 순간을 택한 다음 그 순간에 얽매여 있는 것 같아. 우리 엄마는 항상 말했어. 엄마가 아빠에게 반한 것은, 아빠가 파이프에 담배를 채울 때 손가락 움직임이 매우 정확하고 부드럽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이었다고. 난 언제나 엄마 말은 반만 믿어. 하지만 엄마는 항상 확신에 차서 말했어. 그리고 모든 사람이 준비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해. 그렇잖아? 나는 그때 사랑에 빠졌다. 나는 그것 때문에 사랑에 빠졌다. 이런 건 말하자면 사회적 필수품이야. 당신은, <아, 잊었어> 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 돼. 또, <분명치 않은데>라는 말도 하면 안 돼. 안 그래? -97쪽

내 영국 친구 중에 어떤 여자 애는 결혼하고 6주만에 외도를 했었대요. 그런데 이게 아주 놀랄 일인가요? 당신은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동시에 갑갑하다고 느낄 수도 있어요. 안전함을 느끼면서 돌연 공포를 느낄 수도 있고요.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요.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신혼 초기는 가장 위험한 시기랍니다. 왜 그러냐 하면 - 뭐라고 말해야 하지? - 감정이 민감해져 있기 때문이지요 . L'appetit vient en mangeant (먹으면 식욕이 온다). 사랑하고 있으면 사랑에 빠지기 쉽죠.-209쪽

그리고 딸애가 한 말이 또 하나 있는데, 무척 신랄한 말이었어요. 그 앤 말했죠. 「엄마, 난 규칙이 있는 줄 알았어. 」
행동의 규칙을 말한 게 아니라, 그 이상의 뭔가를 뜻하는 말이었어요. 사람들은 결혼하면 으레 하는 소리처럼 결혼이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많지요. 그 애가 그런 말을 믿을 만큼 고지식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이 결혼의 변할 수 없는 규칙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에 의해 – 적어도 잠시 동안이라도 – 어떤 식으로든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거나 그냥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나이 이제 오십이 넘었고, 만약 당신이 결혼의 변할 수 없는 규칙들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 가지는 생각해 낼 수 있어요. 남자들이 나이 많은 여자 때문에 아내를 떠나는 일은 없다는 겁니다. 이걸 빼고는, 어떤 일이든지 다 있을 수 있는 다 정상이랍니다. -211쪽

내가 얻은 결론은 이겁니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면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능력은 서서히 상실하는 반면, 상대방에게 상처 입힐 능력은 줄지않고 그대로라는 것이죠. 그리고 물론, 상대방에게 상처 입힐 능력이 줄면,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능력은 서서히 늘겠지요. -279쪽

그리고 내가 남자들을 상대하기 시작했을 때 그건 슬롯머신에서 딸기 세 개를 일렬로 나란히 세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같이 보였어. 딸기 하나를 붙들어 놓고, 그다음 또 하나를 세울 수는 있겠지만, 그때쯤이면 처음 것은 이미 달아나 버리고 없지. <그대로 HOLD!>라고 표시된 버튼이 있었지만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지 않았어.
사랑, 존경, 남성적 매력. 이 세 가지 모두를 스튜어트에게서 얻었다고 생각했어. 이 세 가지 모두를 올리버에게서 구했다고 생각했고. 하지만 이 셋을 한꺼번에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아. 두 개까지는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그대로!> 버튼은 항상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고.
-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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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5-09-11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이 책 재밌어요? 줄리안 반즈의 소설을 좋아라해요. (겨우 한 권 읽었음ㅋ)
211쪽의 글귀들에 진한 공감하면서...옮기느라 수고하셨어요. 추천드려요.

Laika 2005-09-11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어요.. 줄리안 반즈의 책을 다 읽어보려고요..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이미 옆에 두고 있습니다.

플레져 2005-09-11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 그 소설 재밌어요. 권해요. 리뷰 썼으니 참고 하시길 =3

Laika 2005-09-11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꼭, 읽어볼께요..

이리스 2005-09-1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줄리안 반즈네요. ^^;
옮기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추천 한 방~

Laika 2005-09-11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너무 많이 옮겼나보네요..ㅎㅎ 감사합니다.

superfrog 2005-09-22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참.. 입력해둬야 할 작가가 자꾸자꾸 늘어요..ㅠ.ㅜ

Laika 2005-09-22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입력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