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 1
황규영 지음 / 웍스비전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이 무협소설에 무언가 범상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느낀 건 '상검상단'이 등장할 때부터였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상검상단'에 관한 서술이 하나 둘씩 쌓여 '상검상단'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이미지가 형성되어 갈 즈음, 어쩐지 이 '상검상단'이라는 가상의 이익집단이 내가 딛고 있는 현실 속의 어느 이익집단과 대단히 흡사하다고 생각하면서부터였다. 이를테면, 상검상단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문어발식 경영을 하고 있다거나, 혹은 그들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거래처를 압박하는 한편 소비자들로부터는 폭리를 취하고 있다거나, 혹은 관부의 사람을 뇌물로 포섭하여 어지간한 비리로부터는 손쉽게 면죄부를 얻는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게 단순히 무협소설 속의 과장된 설정만은 아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상검'이라는 단어의 모음과 자음을 적절히 조합하면 익숙한 단어 하나를 쉽게 연상할 수 있다는 것도 마냥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려웠다.

 

한번 그런 쪽으로 생각하고 나자 더 이상 이 무협소설이 흔한 무협소설로 여겨지지 않았다. 소설 속 누군가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라고 소리치면, 이 대사의 그 놀랄만한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대담하고 신선하게 느껴졌고, 또 누군가 "오해입니다."라고 변명하면 그 지극히 일상적인 대사가 사뭇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뿐인가, 외국의 사신으로 온 공주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공주에게 내어준 건물의 담장을 넘는 '무례하고 제멋대로인' 왕자들의 이야기에서 나는 어느 유명축구감독과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슬리퍼를 신은 채 나타났다는 어느 나라의 왕자를 떠올렸고(소설 속 왕자들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그들이 형편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 있을 뿐이다), 군사적으로 대립하는 이웃나라를 두고 있으면서도 정작 위정자들은 그것을 정치적으로만 이용할 뿐 거기에 무관심하다는 이야기에서 안보와 보수를 부르짖으면서 정작 그들 스스로는 총 쏘는 법도 알지 못하는 어느 나라의 왕 이하 관리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건 그저 '무협'이 아니었다.

 

상황이 이쯤에 이르자 이제 나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에서 어쩌면 어떤 중대한 메시지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별 하나에 그리운 이름 하나를 불러보았다는 어느 시인의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마음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이미 결론을 내놓고 거기에 맞춰 파란색 매직으로 쓰인 숫자를 증거로 찾아낼 줄 아는 직관적이고 맹목적인 어느 명탐정의 심정으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악당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보았다. ooo, ooo, ooo, 기타등등. 파란색 매직으로 각 이름의 자음과 모음 중 필요한 것에만 덧칠하면 '니가 바로 범인이다.'라고 못할 것도 없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는 깨끗이 포기했다. 나는 시인은 결코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역시나 파란색 매직으로 쓰인 숫자 하나로 모든 것을 파악하는 명탐정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다만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여느 무협소설과 다르게 조선시대와 흡사한 시대를 배경으로 선택한, 그래서 어떤 의도가 느껴지는 이 소설 속 왕의 성이 '이'씨 라는 것, 그리고 이 탐욕스럽고 소심하며 비겁한 데다 음흉스러우며 무능력하기까지 한 왕이 조선시대 그 어떤 왕과도 닮지 않았고, 외려 어쩐지 오늘날 우리 시대 높은 자리에 있는 누군가를 연상하게 만든다는 것.

 

'후기'에서 "이전에 쓰던 글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고 밝히는 저자는 짤막한 '후기'를 이렇게 끝맺는다. "다만, 멀리 가지는 못했습니다. 더 멀리 가도 되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저자가 생각하는 '다른 길'이 내가 생각하는 '다른 길'과 같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고, 그렇기에 '멀리 간다는 것'도 내가 생각한 것과 같은 의미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확실히 '다른 길'을 걷는 독특한 이 무협소설을 좀 더 흥미롭게 읽기 위해서는 애당초 이 소설이 '현실 비판적 무협소설'이라고 믿거나 혹은 독자 스스로가 '현실 비판적 무협독자'가 될 필요가 있어 보이며, 둘 모두가 아니라면 꽤나 재미없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며 '다른 길'을 함께 걷는다는 믿음 혹은 착각은 사뭇 유쾌한 일이지만, 그런 믿음 혹은 착각이 사라지는 순간 이 책은 '무협' 본연의 멋을 상실한 천덕꾸러기가 될지도 모를 테니까.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다른 길'을 걷는 모든 것들의 숙명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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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10-09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황규여의 개천만은 읽지 않았는데 한번 구해서 읽어봐야할 듯 합니다. 가끔 무협지들 중에서 명작들이 등장합니다.

Fenomeno 2012-10-10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솔직히 굳이 구해 읽을 만한 작품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유쾌한 재미가 있지만, 혹시라도 많은 것을 기대하신다면 실망이 크실 것 같습니다. 작가의 의도가 제가 읽어낸 것과 같은지도 장담할 수 없고요. 리뷰를 너무 호의적으로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드네요;;;
 

'아름다운 우리말'이라는 건 다른 나라의 말과 비교해서 하는 말이 아닌 그저 우리말만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일 뿐일 테지만, 나로서는 설령 그것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하는 말이라고 해도 전혀 불만이 없다. 어차피 우리말은 내가 아는 유일한 말이니 이왕이면 우리말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누가 딱, 정해주면 아 네, 하고 냉큼 받아들일 생각도 없지 않다. 혹은 누군가 우리말이 아름답지 않다고 하면 우리말이 아름다운 이유를 한 100가지쯤 대면서 항변할 재간 따위는 물론 없지만, 니가 아름다운 우리말을 개뿔이나 아냐, 라는 식의 마뜩찮은 표정을 지어줄 용의 정도는 얼마든지 가지고 있다. 요컨대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우리말이 아름답다는 데 대해 나는 전혀 반감이 없다는 거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우리말'을 기꺼이 인정한다고 해도 도무지 아름답지 않게 생각되는 우리말도 있다. 당연히 아름답지 않은 험한 말들을 제외하면, 나는 유독 '올케'라는 말이 마음에 안 든다. 일단 '올케'에 쓰인 '케'는 우리말에서 찾아보기 쉬운 글자는 아니다. 실제로 국어사전에서 '케'로 시작하는 단어를 찾아보면 '케이스', '케이크', '케첩' 등 외래어들이 눈에 띌 뿐 우리말 중에는 '케케묵다'가 유일하다. '케'로 끝나는 말 중에도 '부리나케' 정도가 생각날 뿐 딱히 떠오르는 다른 말이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올케'는 어쩌다가 생긴 말일까.

 

어느 유래에 따르면 '올케'는 '오라비'에 '겨집'이 합쳐져서 '오랍겨집'이 되었고 그것이 축약되어 '올케(올겨집)'가 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기는 어렵다. 대관절 오랍겨집을 어떻게 축약해야 올케가 된단 말인지. 이리저리 발음해 보고 특히 술이 취했을 때라든지 혹은 무언가를 먹으면서 말할 때를 가정해 보아도 납득하기가 어렵다. '계집'이라는 단어가 번연히 살아남은 판에 하필 '오랍겨집'의 '겨집'을 '케'로 만들 건 뭐란 말인지. 그것도 잘 쓰이지도 않는 글자를 가져다가.

 

'올케'가 마음에 안 드는 이유는 단 하나, 그 어감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올케'의 어감에서 '수캐'의 어감과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이 '수캐'는 특히 어느 시에서 그러했듯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에서의 바로 그 '수캐'다. 또는 '발정난 수캐'의 그 '수캐'라고 해도 좋다. 수캐한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도무지 '건강한 수캐'라든지 '정숙한 수캐' 따위의 말들은 어딘가 모르게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올케'의 경우에는ㅡ어디까지나 내 느낌일 뿐이지만ㅡ영락없이 '얄미운 올케'가 어울린다. '다정한 올케'랄지 '사랑스러운 올케'와 같은 말들은 역시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다. 물론 이런 인식 한편에는 실제 혹은 드라마 속 '올케'에 대한 이미지와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그러한 이미지를 공고히 하는 데 '올케'라는 좋지 않은 어감이 한몫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면 그저 과장일 뿐일까. '오랍겨집'에서 왔음에도 정작 오빠의 아내에게는 호칭어로 '(새)언니'라 하고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호칭어로 '올케'를 쓰는 이유를, '올케'의 어감 때문에 손윗사람에게 쓰기 꺼려진 데서 찾는다면 그 또한 억측에 지나지 않을 뿐일까.

 

어쨌거나 우리나라에서 우리말을 하면서 남자로 살아가는 데에는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지만, 평생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올케라 부를 일도,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올케라 불릴 일도 없는 건 분명 좋은 점 중의 하나다. 세상에 좋은 올케는 얼마든지 있고 우리말은 아름다운 말이지만, 그래도 나는 '올케'라는 말만큼은 사양하고 싶다.

 

덧. 비슷한 이유로 '개구리 중사 케로로'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케로로'와 '뽀로로'는 단 한 글자 차이지만, 내 생각에 그 차이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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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전혀 상관 없을 것 같은 3권의 책을 읽었는데, 공교롭게도 세 권의 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게 재미있다. 먼저 김찬호의 저서인 <사회를 보는 논리>에서는 우리 사회의 여러 현상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그 나아갈 바를 독자와 함께 모색해 나가고자 한다. 쉬운 설명과 간결한 논지를 통해 이끌어 내는 이 책의 문제의식이 그 자체로 패러다임의 변화를 지향하고 있는 건 당연한 노릇이다. <광고천재 이제석>에서 저자 이제석이 말하는 핵심도 결국 패러다임의 변화다. 그는 책 속에서 "판을 바꾸라."라고 말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 증명해 낸 그 실례를 천재적인 자신의 광고를 곁들여 털어 놓는다. 마지막으로 황규영의 무협소설 <개천>은 제목부터 '開天(하늘을 열다)'이다. 이 '개천'은 저자가 '후기'에서 말하듯 '파천(破天)' 이후에 시작되는 것으로, 주인공 강대수의 여정은ㅡ약간 과장되게 말해서ㅡ패러다임의 변화를 위한 투쟁에 다름없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렇듯 비슷한 핵심을 가진 듯한, 그러나 당연히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내용을 펼쳐내는 이 세 권의 책의 차이가, 저마다 각기 속한 장르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이건 한편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가장 온순하고 부드러운 세기를 가진 것은 물론 인문학 서적에 해당하는 <사회를 보는 논리>이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저자는 책에서 우리 사회의 제반현상들에 대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분석하고 비판하지만, 대안의 모색은 모두의 과제로 남겨둔다. 예컨대 결혼식 문화에 대해 저자는 '체면유지'와 '차이에 대한 집착'과 '악순환' 등의 표현으로 거침없이 날을 세우지만, 그렇다고 "그딴 결혼식 따위는 당장 치워버려라."라고 일갈하지는 못한다. 또한, 일찍이 '애정남'에서 정한 것처럼 "결혼식 축의금은 성수기에 3만원이다."라는 식으로 무엇 하나 정해주지도 못한다. 다만, 책에서는 스스로 생각하는 결혼식에 대해 토론할 거리를 남겨줄 뿐이다. 그래서 당연히 약간 미적지근한 느낌이지만, 진짜 '애정남'처럼 정해주었다면 그건 그거대로 좀 웃기겠다는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다. 어쨌거나 인문학이란 게 코미디는 아닐 테니까.

 

<광고천재 이제석>은 무엇보다도 책 표지에 한눈에 반해서 관심을 가졌고 결국 읽게 되었다. 초반에는 조금 불편한 느낌도 있었다. 가히 천재적이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은, 책에 소개된 저자의 광고들은 감탄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치열한 노력과 그에 따른 성공으로 얻은 자신감이 종종 지나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천재란 기실 노력의 산물이라는, 그 평범한 클리셰를 되풀이하는 듯하던 이 책은 결정적으로 조금 다른 행보를 보인다. 진취적인 태도와 끊임없는 노력으로 성공을 얻은 저자가 그저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저자는 '이제석 광고 연구소'를 차려 공익 광고를 제작해 시민단체에 기부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둘러싼 불리한 환경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판을 바꾸어" 성공을 이뤄냈던 저자가 이제 세상이라는 거대한 "판을 바꾸려"는 의미 있는 일보를 내딛은 셈이고, 에세이라는 장르 안에서 자신의 삶을 유일한 증거로 하여 펼쳐낸 이렇듯 치열한 '진실성'은 자못 감동적인 데가 있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거창한 무엇이 아닌, 결국 자신과 자신의 주변부터 바꿔나가는 것이라는 진부한 교훈이 한 개인의 실제 삶과 만날 때면 그것이 무엇이든 언제나 찬란하게 빛나게 마련이니까. 조금만 겸손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은 여전히 떨치기 어렵다.

 

당연한 말이지만, 역시 무협소설이라는 장르는 어떤 한계를 깨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알맞은 장르다. <개천>은 다분히 저자의 어떤 의도가 느껴지는 설정 하에서(조선시대를 모델로 한 가상의 세계) 말 그대로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무능한 위정자와 부정부패한 관료와 탐욕스러운 거대상인 등이 판치는 세상에서 주인공 강대수는 기득권 세력을 완전히 타파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세상을 뒤집는 것(파천)' 외엔 없다고 굳게 믿는다. 그리하여 펼쳐지는 주인공의 활극 속에는 묘하게 현실 비판적인 메시지가 곳곳에서 느껴져서 나름의 재미와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다만 굳이 덧붙이자면, 그러한 현실 비판적 메시지를 제외하고 순수하게 무협소설 자체의 재미를 따진다면 솔직히 좀 약한 것 같기는 하다. '현실 비판적 메시지'란 게 진짜 이 작품 속에 있는지 어떤지 장담하기 어렵지만, 독자보다도 오히려 저자 쪽에서 그것을 좀 더 어필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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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데 있어 내게 한 가지 원칙이 있다면 그건 그냥 내키는 대로 읽는다는 것인데, 그런 이유로 종종 약간의 의무감을 동반하고 읽는 소위 '무거운' 책은 어지간해서는 연속적으로 읽지 않는다. '무거운' 책 한 권쯤이야 단단히 마음먹고 읽어낼 수도 있지만, 그걸 다 읽고 다시 또 한 권의 '무거운' 책을 연이어 집어 드는 건 절대로 '내키는' 일이 아니까 말이다. 물론, '무거운' 책이라는 건 물리적으로 무거운 게 아니라 그 내용이 꽤 어렵고 따분하며 무엇보다 재미없다는 걸 의미하고, 이를테면 '철학', '종교', '인문', '역사' 등을 다루는 책들이 바로 내게는 '무거운' 책이다. 몸에 좋은 약은 대체로 쓰게 마련이니 나는 이런 '무거운' 책의 위대함을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쓴 약을 하나 삼킨 후 사탕 하나 입에 물 사이 없이 또 다시 꾸역꾸역 쓴 약을 입에 집어 넣는 것은 정말이지 할 짓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나는 절대로 부정할 생각이 없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읽은 후 <역사사용설명서>를 읽고, 그 다음으로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와 <산중에서 길을 물었더니>를 차례로 읽은 지난 7,8월의 내 독서 여정은, 그래서 위와 같은 평소 독서 스타일을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는 약간 흥미 위주의 책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차례대로 '역사', '역사', '역사', '종교' 서적을 읽은 셈인데,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전적으로 가장 먼저 읽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이 책에 대해서는 리뷰를 쓴 바 있으니 짧게 덧붙이자면, 이 책은 책을 읽을 때 기대함직한 거의 모든 것들을 독자에게 제공해 주는 듯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적 만족감, 나열된 사실 속에서 큰 줄기를 헤아리는 통찰력, 권력의 일방적인 역사관에 대한 대항의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과거의 시사점 등, '무거운' 책이 과연 몸에 좋은 것임을 이 책은 훌륭히 증명했고, 게다가 이 책은 꽤나 재미있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책을 덮은 다음에 <역사사용설명서>라는 만만치 않아 보이는 책을 들었다는 점에서 <거꾸로 읽는 세계사>의 흥미로움은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마거릿 맥밀런의 <역사사용설명서>는 제목의 유머러스함에도 불구하고 (내 입장에서는) 농담으로라도 재미있다고 할 만한 책은 아니다. 원제는 '역사의 사용과 악용'이라는 좀 더 근엄한 제목을 갖고 있거니와, 실제로 이 책은 원제 그대로 역사 속의 무수한 사례들을 끌어와 눈앞에 현란하게 들이밀며 역사가 어떻게 사용 혹은 악용되는지를 깊이 파고든다. 당연히 책은 유머와는 거리가 멀고, 혹 저자가 유머를 구사했을지라도 그게 나와 코드가 맞는 게 아닌 건 틀림없다. 하지만 대신 이 책은 상당히 유익하다. '유익하다'는 말은 대개 '재미없다'는 말과 동의어이고 나 또한 여기서 어느 정도 그런 뜻으로 사용했음을 부인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역사'라는 것에 대해 어떤 의문들을ㅡ그것이 무엇이든ㅡ가져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이 상당히 유익하며 심지어 의외로 흥미로울 수도 있다는 데에 열렬히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러한 유익함과 깊이가 생각할 거리를 늘려주는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많아지면 외려 그와 관련해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이고, 그게 내가 이 책에 대해 더 길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저 다시 말하건대, 이 책은 정말로 '유익'하다.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는 이미 말했듯 '역사' 보다는 '흥미'를 좇아 집어 든 책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굉장히 실망스러웠다.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건 이 책의 구조적인 문제다. 400페이지가 좀 넘는 이 책은 33명의 역사 속 인물들을 다루는데, 이는 사진을 제외하면 한 인물 당 기껏해야 10여 페이지 가량의 분량이 할애됨을 의미하고(이 책은 개정,증보되어 발간된 것으로, 처음 나왔을 때는 무려 50명을 다루었다고 한다), 이는 또한 독자가 이 책이 다루는 인물과 깊이 있게 마주하는 일을 대단히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구조적인 문제보다 더 실망스러운 건, 이 책이 소개하는 각 인물들에 대해 깊이 있게 파고들지도 못하면서 이내 섣부른 평가를 내리고 만다는 점이다. 예컨대, 클레오파트라 여왕에 대해 저자는 "아름다움이 전부인 여성이 아니"며 "엄청난 노력가였으며 뛰어난 정치가였고 개인보다는 나라를 위해 자신을 던질 줄 아는 호쾌한 위정자"라는 평가를 내리는데, 정작 클레오파트라에 관한 짧은 글 속에서 그러한 면모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또한 락슈미바이에 대해서는 "19세기 인도에서 여성의 권리에 대한 매우 급진적인 생각을 가졌으며 담대함과 용기, 지혜를 가진 여성으로, 인도 독립 운동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다."라고 하는데, 이러한 일방적인 외부의 평가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 외에 구체적으로 락슈미바이의 '여성의 권리에 대한 매우 급진적인 생각'과 '담대함과 용기, 지혜'를 알고자 한다면 오직 실망밖에는 얻을 게 없다.

 

물론 애당초 '흥미'를 목적으로 집어든 책에서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게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사용설명서>에서 마거릿 맥밀런이 '나쁜 역사서'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읽은 후에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를 읽으니 '나쁜 역사서'의 실제 예시를 접하는 느낌이 강렬한 건 어쩔 수 없다. 마거릿 맥밀런은 "나쁜 역사서는 주인공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가졌을 법하지 않은 통찰력을 가졌기를 바라거나 할 수 없었을 법한 결정을 내렸기를 기대할 때 그렇다. (중략) 나쁜 역사서는 충분한 근거도 없는 현상을 대충 일반화하고, 부합하지 않는 거북한 사실들은 무시해버린다."라고 말하며 결국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런 역사서가 주는 교훈은 너무 단순하거나 그저 틀린 것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는 마거릿 맥밀런의 주장을 훌륭히 뒷받침한다.

 

<산중에서 길을 물었더니>는 이 책이 꽤나 오랫동안 책장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게 눈에 밟힌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우리 시대 큰스님 33인과의 만남'이라는 부제 중, '33'이라는 숫자에 끌려서 집어 들었다. 이미 앞에 읽었던 책에서 33명의 인물을 만난 후 다시 33명의 인물과 만나는 건 결과가 좋든 나쁘든 어쨌거나 흥미로운 일일 것 같았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괜찮았다. 기본적으로 33명의 인물을 한 권의 책에서 만난다는 건 태생적으로 독자의 기억력과 책에서 다루는 인물과의 깊이 있는 만남에 부담을 주는 일이지만, 이 책의 경우에는 그런 문제를 쉽게 피할 수 있었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33명의 스님들이 각각 하시는 말씀은 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뒤섞이기 일쑤였지만 이에 대해서는ㅡ스님들도 종종 말씀하시듯ㅡ"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잠언으로 넘어갈 수 있고, 또 이 책은 저자가 직접 스님들을 찾아뵌 후 그 생생한 가르침을 기록한 것으로 짧은 글 속에도 스님들의 큰 자취가 물씬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간 과장하면 이 책을 처음 읽어나가기 시작했을 때는 마치 스님이 옆에서 죽비소리로 정신을 깨우쳐주는 듯한 상쾌한 느낌도 있었는데, 이제 다만 사실을 말하면 스님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는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뒤로 갈수록 심드렁해지는 느낌도 있었다. 내 생각에 이런 책은 매일 조금씩, 특히 아침에 읽고 하루를 시작하면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안중근 선생의 말씀을 실감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데, 불행히도 현대인의 아침은 지나치게 바빠서 입안의 가시보다는 위장의 공복을 신경 쓰기에도 벅찬 게 문제다. 뭐, 물론 대체로 비겁한 변명이지만.

 

그런데 책 속에서 다른 스님들이 모두 어느 종교를 믿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달리 한 스님이 "역사적으로 볼 때 국가적으로 불교를 권장했을 때 외침을 잘 막아냈었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게 이채로웠다(이 부분을 정확히 외우지는 못하지만 비슷한 의미였던 건 분명하다). 나는 이 비슷한 이야기를 몇 년 전 어느 목사님께서 하셨던 걸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불교를 믿는 나라치고 잘 사는 나라가 없다."라는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두 이야기 속에서 추출해낼 수 있는 공통점이 '아집'과 '독선'과 '편견'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어디까지나 지극히 단편적인 이야기에 따른 섣부른 비약일 뿐이지만, 나는 위의 두 분을 작은 방안에 모셔두고 서로의 종교에 대해 끝장토론을 하게 하여 어떤 합의에 이른 후에야 비로소 방문을 열고나올 수 있게 한다면 그 방문이 결코 쉬이 열리지 않으리라는 데 기꺼이 500원쯤은 걸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TV로 고스란히 보여준다면 충실한 시청자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역시나 궁금해서라도 한 번씩 채널을 돌리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물론, 이때 내가 궁금한 건 누가 더 깊은 신앙심을 보여주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얕은 인내심과 관용을 보여주는냐 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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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세계사 - 개정판 거꾸로 읽는 책 3
유시민 지음 / 푸른나무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여름, 나를 충격과 공포 속으로 밀어 넣었던 책은 여름을 노리고 본격적으로 쏟아진 스릴러물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해당 책은 '역사'에 관한 책으로, '거꾸로 읽는 세계사'라는 제목이 다소 도발적이기는 해도 이런 '역사' 관련 책이 스릴러물보다 더한 '충격'과 '공포'를 내게 안기리라고는 감히 짐작하기 어려웠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건 사실 공평하지는 않다. 지난 여름은커녕 최근 몇 년간을 아무리 돌이켜보아도 내가 스릴러물을 읽은 기억은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스릴러물보다 이 책, 정확하게 말해서 이 책에서 핵과 관련해 인용한 내용 중의 일부가 정녕 두려웠던 건, 거기에는 주인공도 악당도 없이 다만 온통 끔찍한 피해자만 가득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위협이 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간과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사설이 길었는데, 1945년 8월 6일과 9일, 각각 한 발씩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후의 상황을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인용해 놓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전차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B29 두 대가 꽤 높은 상공에서 북동족으로 날아갔다.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다음 순간 번쩍! 맹렬한 빛이었다. 순간 그 자리에 엎드렸다. 그리고 그 다음은 모른다. 정신을 차리고 손발을 움직여 보니 움직여졌다. "아아, 살았구나, 살았다." 일어나 히로시마역 쪽으로 달렸다. 여기저기 길에서 사람들이 나왔는데, 큰길에는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유령처럼 양손을 흔들흔들하는 반라의 여자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도 넘쳐흘렀다. 눈도 귀도 입도 녹아서 얼굴이 수박같이 되었다. 여기저기를 헤메다가 마침내 해안에 도착, 거기서 군인들에게 물을 받아 마시고 멍석 위에 누웠다. 그러자 구토가 나 아침에 먹은 걸을 토하고 잠들었다. ......화상을 입은 얼굴에서는 고름과 피와 땀이 흘렀다. 왼쪽 귀가 녹아내려 구더기가 끓고, 매일 학질 걸린 것처럼 고열이 났다. ......그해말 귀국했는데, 윤곽만 남은 자식의 모습에 부모님은 피를 토하듯 우셨다. (한국인 원폭피해자 협회장 신영수 씨의 증언) (p357~358)

 

물론 일본에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두 번의 폭격이 단순히 '폭격'이라는 무심한 단어 이상의 끔찍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너무나도 유유히 떨어진 단 두 개의 물체가 누군가의 터전을 망가뜨리고,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가고, 누군가의 현재와 미래 모두를 짓밟았으리라는 것도 전혀 상상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종종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참혹한 짐작과 상상을 마주하는 대신에 단순한 인과론과 일방의 정의에 의한 단선적 서술을 목격하곤 한다. 위의 사례를 가지고 말하자면,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을 앞세워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유린한 일본의 기도를 분쇄하고 끝내 일본 천황의 입에서 "항복"이라는 말을 내뱉게 한 것이 바로 두 발의 원자폭탄이었다고 말하곤 끝내는 식이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두 발의 폭탄은 독립을 알리는 축포와도 같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단선적인 레일 위의 역사를 탈피한다는 점에서 무척 가치가 있는 책이다. 자본주의는 지구상 유일의 성공한 체제이고, 미국은 우리의 영원한 우방이며,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는 우리의 대척점에 서있다는 등의 일방적인 역사적 시각에 대항하여, 이 책은 외려 '거꾸로' 역사를 바라봄으로써 그 이면을 깊이 들여다보며 되묻는다. 과연 세계를 전쟁의 공포로 밀어 넣었던 나치즘은 단지 한 미치광이 전쟁광의 광기였을 뿐인지, 베트남 전쟁은 그저 한국이 우방국가 미국을 도와 치른 정의로운 전쟁이었을 뿐인지, 말콤X는 다만 백인을 증오하는 극렬분자였을 뿐인지, 핵은 인류의 진보를 표상하는 위대한 발명품일 뿐인지 등.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어쩌면 우리가 꽤 오랫동안 유일한 것이라고 배워왔던 객관식 답안과는 다를 수도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역사사용설명서>에서 마거릿 맥밀런이 말했듯, "집단의 입맛에 맞는 억측에 이의를 제기하는 역사는 고통스럽"기 마련이고, 때문에 이 책에서 말하는 역사도 입맛에 맞기보다는 오히려 쓴맛을 남긴다. 나치즘을 한 개인의 탓이 아닌 자본주의의 비민주적 속성에서 끌어내고, "벗을 돕는 것이 목적이 아닌" 베트남 전쟁에서 "우리의 추한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을 대면하고, 말콤X에게서 사회에 깊이 박힌 편견과 증오의 뿌리를 확인하고, 핵이 지닌 그 피아를 가리지 않는 파멸적 힘의 공포를 깊숙이 들여다보는 일은 확실히 즐겁고 유쾌한 일과는 거리가 멀다. 악당과 영웅이 등장하고, 적과 친구가 분명하며,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한 단선적 역사에 비해 "이의를 제기하는 역사"는 좀 더 복잡, 난해하며 당혹스럽기도 하다. "저는 노벨처럼 새로운 발견에서 인간성이 악보다도 선을 많이 얻는다고 믿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라는 퀴리의 인간에 대한 믿음도 '거꾸로 읽는' 역사 속에서 위태로워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역사는 현세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쓰여서는 안 되고, 인간사가 복잡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쓰여야 한다."라고 마거릿 맥밀런이 단언하듯이, 이 책이 '거꾸로 읽는' 목적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역사를 지향하는 데에 있다. 그로 인해 이 책이 보여주는 역사 속에서 인류의 선함에 대한 신념과 진보에 대한 장밋빛 전망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신뢰와 우방에 대한 믿음은 왕왕 흔들리기도 하지만, 바로 그러한 '복잡성' 속에서 우리가 역사를 더 잘 이해하게 될 수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요컨대, '복잡한 인간사'를 포괄한 '역사' 속에서 우리는 오로지 영웅과 친구와 피해자가 아니고 또한 반대로 오로지 악당과 적과 가해자도 아니며, 다만 우리는 그 사이를 복잡하게 오가며 그 모든 입장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의 시각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는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거꾸로 읽는' 이 책의 시각을 배제하면 우리가 보는 역사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일방적이며, 따라서 거기에서 얻을 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영국의 역사가 존 아널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과거를 방문하는 것은 타국을 방문하는 것과 같다. 거기서는 똑같이 돌아가기도 하고 다르게 돌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우리는 거기서 이른바 '고국'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만약 역사의 의미가 '고국(현재)'을 더 잘 이해하는 데 있다고 동의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역사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선택이 아닌 필수임을 인정한다면, 이 책이 전하는 "지적 반항"은 더 이상 '반항'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개정판 서문에서 저자가 "역사를 쓰는 데 필요한 자료를 정치권력이 제멋대로 통제하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과 토론을 억압하는 풍토가 사라져 아무도 이 책이 전하는 '지적 반항'에 귀기울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내가 진정 바라는 일"이라고 쓴 지 십수 년이 지난 현재에도, 저자의 바람은 아직도 요원하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2011년도 저물어가는 지금, 이 책의 "지적 반항"이 여전히 유효함을 나 역시 진정 슬프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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