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데 있어 내게 한 가지 원칙이 있다면 그건 그냥 내키는 대로 읽는다는 것인데, 그런 이유로 종종 약간의 의무감을 동반하고 읽는 소위 '무거운' 책은 어지간해서는 연속적으로 읽지 않는다. '무거운' 책 한 권쯤이야 단단히 마음먹고 읽어낼 수도 있지만, 그걸 다 읽고 다시 또 한 권의 '무거운' 책을 연이어 집어 드는 건 절대로 '내키는' 일이 아니까 말이다. 물론, '무거운' 책이라는 건 물리적으로 무거운 게 아니라 그 내용이 꽤 어렵고 따분하며 무엇보다 재미없다는 걸 의미하고, 이를테면 '철학', '종교', '인문', '역사' 등을 다루는 책들이 바로 내게는 '무거운' 책이다. 몸에 좋은 약은 대체로 쓰게 마련이니 나는 이런 '무거운' 책의 위대함을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쓴 약을 하나 삼킨 후 사탕 하나 입에 물 사이 없이 또 다시 꾸역꾸역 쓴 약을 입에 집어 넣는 것은 정말이지 할 짓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나는 절대로 부정할 생각이 없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읽은 후 <역사사용설명서>를 읽고, 그 다음으로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와 <산중에서 길을 물었더니>를 차례로 읽은 지난 7,8월의 내 독서 여정은, 그래서 위와 같은 평소 독서 스타일을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는 약간 흥미 위주의 책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차례대로 '역사', '역사', '역사', '종교' 서적을 읽은 셈인데,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전적으로 가장 먼저 읽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이 책에 대해서는 리뷰를 쓴 바 있으니 짧게 덧붙이자면, 이 책은 책을 읽을 때 기대함직한 거의 모든 것들을 독자에게 제공해 주는 듯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적 만족감, 나열된 사실 속에서 큰 줄기를 헤아리는 통찰력, 권력의 일방적인 역사관에 대한 대항의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과거의 시사점 등, '무거운' 책이 과연 몸에 좋은 것임을 이 책은 훌륭히 증명했고, 게다가 이 책은 꽤나 재미있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책을 덮은 다음에 <역사사용설명서>라는 만만치 않아 보이는 책을 들었다는 점에서 <거꾸로 읽는 세계사>의 흥미로움은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마거릿 맥밀런의 <역사사용설명서>는 제목의 유머러스함에도 불구하고 (내 입장에서는) 농담으로라도 재미있다고 할 만한 책은 아니다. 원제는 '역사의 사용과 악용'이라는 좀 더 근엄한 제목을 갖고 있거니와, 실제로 이 책은 원제 그대로 역사 속의 무수한 사례들을 끌어와 눈앞에 현란하게 들이밀며 역사가 어떻게 사용 혹은 악용되는지를 깊이 파고든다. 당연히 책은 유머와는 거리가 멀고, 혹 저자가 유머를 구사했을지라도 그게 나와 코드가 맞는 게 아닌 건 틀림없다. 하지만 대신 이 책은 상당히 유익하다. '유익하다'는 말은 대개 '재미없다'는 말과 동의어이고 나 또한 여기서 어느 정도 그런 뜻으로 사용했음을 부인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역사'라는 것에 대해 어떤 의문들을ㅡ그것이 무엇이든ㅡ가져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이 상당히 유익하며 심지어 의외로 흥미로울 수도 있다는 데에 열렬히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러한 유익함과 깊이가 생각할 거리를 늘려주는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많아지면 외려 그와 관련해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이고, 그게 내가 이 책에 대해 더 길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저 다시 말하건대, 이 책은 정말로 '유익'하다.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는 이미 말했듯 '역사' 보다는 '흥미'를 좇아 집어 든 책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굉장히 실망스러웠다.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건 이 책의 구조적인 문제다. 400페이지가 좀 넘는 이 책은 33명의 역사 속 인물들을 다루는데, 이는 사진을 제외하면 한 인물 당 기껏해야 10여 페이지 가량의 분량이 할애됨을 의미하고(이 책은 개정,증보되어 발간된 것으로, 처음 나왔을 때는 무려 50명을 다루었다고 한다), 이는 또한 독자가 이 책이 다루는 인물과 깊이 있게 마주하는 일을 대단히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구조적인 문제보다 더 실망스러운 건, 이 책이 소개하는 각 인물들에 대해 깊이 있게 파고들지도 못하면서 이내 섣부른 평가를 내리고 만다는 점이다. 예컨대, 클레오파트라 여왕에 대해 저자는 "아름다움이 전부인 여성이 아니"며 "엄청난 노력가였으며 뛰어난 정치가였고 개인보다는 나라를 위해 자신을 던질 줄 아는 호쾌한 위정자"라는 평가를 내리는데, 정작 클레오파트라에 관한 짧은 글 속에서 그러한 면모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또한 락슈미바이에 대해서는 "19세기 인도에서 여성의 권리에 대한 매우 급진적인 생각을 가졌으며 담대함과 용기, 지혜를 가진 여성으로, 인도 독립 운동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다."라고 하는데, 이러한 일방적인 외부의 평가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 외에 구체적으로 락슈미바이의 '여성의 권리에 대한 매우 급진적인 생각'과 '담대함과 용기, 지혜'를 알고자 한다면 오직 실망밖에는 얻을 게 없다.

 

물론 애당초 '흥미'를 목적으로 집어든 책에서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게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사용설명서>에서 마거릿 맥밀런이 '나쁜 역사서'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읽은 후에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를 읽으니 '나쁜 역사서'의 실제 예시를 접하는 느낌이 강렬한 건 어쩔 수 없다. 마거릿 맥밀런은 "나쁜 역사서는 주인공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가졌을 법하지 않은 통찰력을 가졌기를 바라거나 할 수 없었을 법한 결정을 내렸기를 기대할 때 그렇다. (중략) 나쁜 역사서는 충분한 근거도 없는 현상을 대충 일반화하고, 부합하지 않는 거북한 사실들은 무시해버린다."라고 말하며 결국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런 역사서가 주는 교훈은 너무 단순하거나 그저 틀린 것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는 마거릿 맥밀런의 주장을 훌륭히 뒷받침한다.

 

<산중에서 길을 물었더니>는 이 책이 꽤나 오랫동안 책장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게 눈에 밟힌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우리 시대 큰스님 33인과의 만남'이라는 부제 중, '33'이라는 숫자에 끌려서 집어 들었다. 이미 앞에 읽었던 책에서 33명의 인물을 만난 후 다시 33명의 인물과 만나는 건 결과가 좋든 나쁘든 어쨌거나 흥미로운 일일 것 같았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괜찮았다. 기본적으로 33명의 인물을 한 권의 책에서 만난다는 건 태생적으로 독자의 기억력과 책에서 다루는 인물과의 깊이 있는 만남에 부담을 주는 일이지만, 이 책의 경우에는 그런 문제를 쉽게 피할 수 있었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33명의 스님들이 각각 하시는 말씀은 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뒤섞이기 일쑤였지만 이에 대해서는ㅡ스님들도 종종 말씀하시듯ㅡ"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잠언으로 넘어갈 수 있고, 또 이 책은 저자가 직접 스님들을 찾아뵌 후 그 생생한 가르침을 기록한 것으로 짧은 글 속에도 스님들의 큰 자취가 물씬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간 과장하면 이 책을 처음 읽어나가기 시작했을 때는 마치 스님이 옆에서 죽비소리로 정신을 깨우쳐주는 듯한 상쾌한 느낌도 있었는데, 이제 다만 사실을 말하면 스님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는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뒤로 갈수록 심드렁해지는 느낌도 있었다. 내 생각에 이런 책은 매일 조금씩, 특히 아침에 읽고 하루를 시작하면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안중근 선생의 말씀을 실감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데, 불행히도 현대인의 아침은 지나치게 바빠서 입안의 가시보다는 위장의 공복을 신경 쓰기에도 벅찬 게 문제다. 뭐, 물론 대체로 비겁한 변명이지만.

 

그런데 책 속에서 다른 스님들이 모두 어느 종교를 믿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달리 한 스님이 "역사적으로 볼 때 국가적으로 불교를 권장했을 때 외침을 잘 막아냈었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게 이채로웠다(이 부분을 정확히 외우지는 못하지만 비슷한 의미였던 건 분명하다). 나는 이 비슷한 이야기를 몇 년 전 어느 목사님께서 하셨던 걸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불교를 믿는 나라치고 잘 사는 나라가 없다."라는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두 이야기 속에서 추출해낼 수 있는 공통점이 '아집'과 '독선'과 '편견'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어디까지나 지극히 단편적인 이야기에 따른 섣부른 비약일 뿐이지만, 나는 위의 두 분을 작은 방안에 모셔두고 서로의 종교에 대해 끝장토론을 하게 하여 어떤 합의에 이른 후에야 비로소 방문을 열고나올 수 있게 한다면 그 방문이 결코 쉬이 열리지 않으리라는 데 기꺼이 500원쯤은 걸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TV로 고스란히 보여준다면 충실한 시청자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역시나 궁금해서라도 한 번씩 채널을 돌리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물론, 이때 내가 궁금한 건 누가 더 깊은 신앙심을 보여주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얕은 인내심과 관용을 보여주는냐 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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