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네티즌은 차두리가 골을 넣으면 세레머니로 비행능력을 공개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결국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 차두리는 비행능력을 끝내 공개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대신에 차두리는 눈물을 보였는데, 그것은 비행능력보다도 좀 더 멋있었고 훨씬 아름다웠으며 무엇보다도 감동적이었다. 그 눈물로써 차두리의 심장은 엔진이 아님이 밝혀졌고, '로봇'이 아닌 '인간'이었던 차두리의 어떤 진실한 감정의 분출은 확실히 사람의 마음을 촉촉하게 만드는 데가 있었다.

경기가 끝난 이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패배의 원인을 쏟아내는 글들은 이러한 눈물을 서둘러서 훔치는 듯해서 안타까웠다. 여전히 특정 선수의 특정 플레이가 패배의 원흉이고, 허정무 감독의 전술이 글러 먹었고, 조직력이 문제였다는 등, 일부 사람들의 글 속에는 감정이 아닌 그저 이성을 가장한 무정만이 넘쳐나는 듯했고, 나는 그들이야말로 정녕 로봇이 아닐까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물론 종종 그게 일인 사람들도 있고 그런 분석도 필요한 일이니 그걸 마냥 나무랄 수는 없다. 단지 그때의 내 감정은 그랬다). 감정의 여운을 느끼게 하기보다는 서둘러 감정과의 결별을 강제하는 SBS의 인터뷰도 그래서 못마땅했다.

개인적으로 패배 자체는 별로 아쉽지 않다. 4강 신화를 다시 재현할 수 없게된 것도 그다지 아쉽지 않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건 이번 월드컵에서 더 이상 한국 대표팀의 경기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이러면 결국 말 장난 같기도 하지만, 나는 이게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나는 승패보다도, 4강보다도, 무엇보다도 90분간 감정의 파노라마를 겪게 되는 일이 즐거웠었다. 어디가서 그러한 90분을 경험할 수 있단 말인가. 또 경기를 앞두고 느끼는 유쾌한 긴장감과 기대를 어디가서 쉬 경험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이제는 그런 일들이 당분간 끝났다는 게 정녕 아쉽다.

비록 패배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멋진 경기였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근래에 본 최고의 경기였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경기였다. 더불어 다른 선수들도 그랬지만 눈물 흘리는 '인간', 차두리가 있어서 경기 후의 여운도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지만, 이제 이것으로 '우리의' 월드컵은 끝났음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혼신의 힘'이라는 이 진부한 표현을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체현해낸 선수들이 대견하고, 특히 재미와 감동을 더한 차두리가 있어 즐거웠다. 차두리, 로봇이 아니라서 고마워!



덧 하나. 감동을 좀 더 지속시켜줄 말들.

두리한테서 자꾸 문자가 오네. 정말정말 아쉽네요. 난 이기는 줄 알았어요... 이러면서. 설마 아직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한 시가 다 되가는데...  ㅡ차범근 트위터 中ㅡ 

"이번 월드컵에 오기 전, 안전 문제에 대해 워낙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걱정을 하고 왔었다. 그런데 이곳에 막상 와보니 우리가 경기장, 훈련장, 숙소를 오갈 때마다 우리를 보는 많은 남아공 사람들, 어린아이들이 모두 환호하고 좋아해줬다." "어린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주는 것을 보니 축구선수로서 우리의 큰 임무를 완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ㅡ차두리ㅡ 

어느날 팀 마사지사가 "경기도 안 하는데 뭐하러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물은 모양이다.
그러나 두리는 의아해 한 마사지사에게 "나는 입으로 나의 위기를 벗어나고 싶지는 않다.
더 열심히 해서 실력으로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고 설명했단다.
그 자리에서 마사지사, 난 너에게 무릎 꿇어 존경을 보낸다며 무릎을 꿇는 시늉을 해보이더란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너무나 기특하고
또 어려움을 아빠가 원하는 방식대로 이겨내려고 애쓰는 그 마음이
고마워서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인생은 길다.
선수 생활이 끝나면 모든 걸 결산해야 하는 게 인생은 아니다
오늘도 경기를 마친 두리에게 물었다.
"경기 재미있게 했어?"
나는 잘 했느냐고 묻지는 않는다.
그게 중요하지는 않으니까.
단지 좋은 경기를 하고 나면
주변의 잡음이 줄어들고 본인이 마음 편해 하니까
나는 감사한 것일 뿐이다.
 

ㅡ차두리 어머니 오은미 씨의 글 中ㅡ (출처 : http://blog.naver.com/haena37/140025725820)

"한국 선수들은 고개를 들기 바랍니다. 당신들은 고개를 떨굴 이유가 없는 멋진 축구를 했고, 고개 들어 당당하게 어깨펴고 고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고개를 드세요." ㅡ독일의 한 캐스터ㅡ (출처 : http://v.daum.net/link/7769310) 

덧 둘. 차두리에 관한 재밌는 일화.

이젠 우리 두리 녀석도 제법 컸다. 분데리스가 선수들에 관한 폭넓은 지식과 정보를 가진 전형적인 꼬마 팬이다. 아빠인 내가 얻어다 주지 않으니까 레버쿠젠 팀의 리벡 감독에게 직접 전화를 걸고서는 "내가 두리인데 우리 아빠가 자꾸 까먹어서 그러니까 사인 두 장만 보내달라."고 해서 기어이 사인지를 손에 넣을 만큼 열성이다. 한 번은 장차 독일 국가대표가 될 것인가 아니면 한국 국가대표가 될 것인가 하는 주제 넘은 고민을 하기도 했다. 또 1986년 겨울엔 내가 깁스를 해서 한쪽 밖에 양말을 신을 수가 없었는데 그것도 아빠가 하는 것이라 좋아 보였는지 녀석도 겨우내 한쪽 양말만 신고 다녔다.

또 1986년 9월의 일이다. 반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두리 녀석과 마당에서 공을 차고 있었다. 이날도 두리 녀석은 11번이 새겨진 유니폼에 팬츠, 그리고 무릎 위로 올라오는 기다란 스타킹에 뽐이 제법 뾰족뾰족한 축구화를 신고 있었다. 내가 볼을 갖고는 뺏으라고 했더니 갑자기 내 정강이를 향해 두 발로 덮치는 것이었다. 어찌나 아픈지 '악' 소리만 하고 두 손으로 정강이 뼈를 붙들고 주저않고 말았는데 두리 녀석은 옆으로 쓱 오더니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아무 일 없다는 듯 냉큼 돌아서는 것이었다. 화가 나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해서 "야! 볼을 보고 태클을 해야지 다리를 차는 게 어딨어? 그리고 아빠가 아파 죽겠다는데 미안하다는 말도 없어?"하고는 소리를 냅다 질렀다. 그런데 녀석의 하는 말이 더 걸작이었다. "월드컵 선수들은 다 그렇게 하는 거야." 

ㅡ차범근 에세이 中ㅡ (출처 : http://blog.naver.com/jordyinny/110005679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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