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의 한 대학 연구진의 발표에 따르면, 메이저 대회를 개최하게 되는 나라의 국민들은 방금 결혼한 커플보다 1.5배나 더욱 기쁨을 느낀다고 한다. 나는 아직 결혼해 본 적이 없어서 메이저 대회 개최의 기쁨을 결혼의 기쁨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지난 2002년 월드컵 개최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비록 그때 나는 군대에 짱 박혀 있었지만-확실히 메이저 대회 개최의 기쁨이 컸었던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물론 2002년 월드컵의 경우에는 한국 대표팀의 활약 덕에 기쁨이 배가된 측면도 있겠으나, 그 활약 여부를 논외로 하더라도 지구촌 최대의 축제 중 하나를 내 나라에서 접할 수 있었던 것은 평생을 두고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거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런 기쁨을 혹 다시 누릴 수 있게 된다면, 그건 또 한 번 환상적인 일이 될 것임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으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시점에서 또 한 번 월드컵 개최를 위한 노력을 경주한다는 게 과연 덮어놓고 찬성할 만한 일일까.

지난해 2월, 한국의 2022년 월드컵 유치 신청 발표가 있기 한 달쯤 전만 해도 대한축구협회의 조중연 회장은 한 라디오 프로에서 "2022년 월드컵 유치는 현실성이 없다."고 단언했었다. 하지만 이 발언 이후 2022년 월드컵 유치 신청을 한 조중연 회장은 FIFA에 우리가 월드컵 유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알리는 게 중요하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고, 이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이 전면에 나서면서 한국의 월드컵 유치는 어느 정도 경쟁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자평하는 모양새다. 특히 정몽준 명예회장은 최근 기자회견을 통해 지난 2002년 월드컵 유치 경쟁에 비하면 이번에는 여건이 더욱 낫다고 전하며, 월드컵 유치가 "정부와 국민이 힘을 모은다면 충분히 가능"하며, 또한 한반도에서의 월드컵 개최가 "동북아 및 한반도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정부와 국민이 힘을 모아 또 한 번 한반도에서의 월드컵을 개최하고, 이것이 동북아 및 한반도 평화에 기여할 수도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낙관적인(심지어 공상적인) 결과론일 뿐, 거기에 이르기 위한 현재의 유치 과정은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가장 먼저, 국민 대다수의 염원이 모여 그 힘을 바탕으로 월드컵 유치를 하는 게 순서일 텐데, 이미 신청을 한 지 오래고 그 동안 소리 소문 없이 유치활동을 하다가 이제 유치 결정을 불과 두 달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힘을 모아야 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다. 최근의 한 신문광고에서는 "서울 G20 의장회의의 의장국, 대한민국이 자랑스럽습니다."라는 문구를 곁들이며 "2022년 월드컵 개최를 온 국민과 함께 이루어내겠습니다." 운운하는 것을 보았는데, 일단 이게 G20 유치 광고인지 월드컵 유치 광고인지 의심스러운 건 차치하고, 과연 서울 G20 의장회의 의장국인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하며 2022년 월드컵 개최를 염원하는 국민이 얼마나 많을지는 의심스럽기만 하다. 국민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내실을 쌓은 후든 아니든, 그저 어떻게든 일단 유치 의사를 밝히면 국민은 거기에 동조해야 하고, 나아가 그것이 실제 성사된다면 무조건 자랑스러워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적어도, 그 '국민'에 내가 포함되지 않는 건 분명하다.

개인적으로 2022년 월드컵 유치를 원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2002년 월드컵을 개최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몽준 회장도 역시 시기적으로 두 번째 월드컵 개최 시기가 너무 빠름을 잘 인식하기 때문인지 2022년 월드컵은 '두 번째 월드컵'이 아니라 제대로 하는 '첫 번째 월드컵'(First full world cup)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지만, 이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에 불과하다. 지난 월드컵 개최의 기쁨이 아직도 선연한 이상 또 다른 월드컵 개최는 한국의 '두 번째' 월드컵이 될 게 너무도 명백하고, 그렇기에 조금 과장되게 비유하자면 2022년 월드컵 유치는 이제 막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혼인신고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다음 결혼식 날짜를 잡으려는 것과 같다. 물론 이때 실제 결혼 날짜는 좀 더 나중의 일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지금은 결혼식의 기쁨을 추억하며 일상의 결혼생활 내에서 행복을 찾는 게 지극히 현명한 일일 것이며, 이는 대한축구협회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아닌 게 아니라, 월드컵 유치가 아니더라도 대한축구협회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쏟아야 할 한국축구의 문제는 산적해 있다. 텅텅 비는 다수의 K리그 경기장과 K리그 경기 중계를 외면하는 방송사들, 그리고 한국축구의 나아갈 길이자 아킬레스건인 승강제까지, 내실을 다져야 하는 만만치 않은 현안들을 안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의 놀라운 성과와 2010년 월드컵에서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않는 '안'의 문제들이 이렇듯 여전함에도, '밖'으로만 관심을 기울이는 대한축구협회의 모습은 스러져가는 내부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그저 외부의 페인트칠에만 몰두하는 격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더군다나 한국이 현재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과 2015년 광주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유치했고, 또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와 2020년 부산 올림픽 유치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환기해보면, 국가적으로도 2022년 월드컵 유치는 다소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각각의 대회 유치에 대한 적정성은 차치하고라도, 이처럼 줄줄이 메이저 대회 유치 활동이 진행 중임에도 '현실성 없다던' 월드컵을 또 유치하기 위해 과연 '정부와 국민이 힘을 모아야' 할까. 이쯤 되면 2022년 월드컵 유치의 진정한 의도와 재임기간 중 기어코 어떤 '대회'를 개최하고자 노력하는 자치단체장들의 정치적 의도가 어쩐지 겹쳐보이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실제로 지난 해 한국이 월드컵 유치 의사를 밝혔을 무렵, 한 칼럼에서는 2022년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2022년 월드컵이 누군가에게 엄청난 정치적 이득을 안겨줄 수도 있다는 시나리오를 예상하기도 했었다. 한국의 2022년 월드컵 개최가 현실이 되기란 녹록치 않은 일이니 그 시나리오는 실현될 확률이 낮겠지만, 적어도 지금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현실성 없던' 2022년 월드컵 유치가 '충분히 가능'한 일로 둔갑되는 과정과 한 인물의 등장 시기는 완전히 무관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정몽준 명예회장이 전면에 등장하는 시점과 대한축구협회의 뒤늦게 요란해지는 유치활동 시점이 묘하게 겹쳐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정몽준 명예회장이 FIFA의 부회장이니 그가 유치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일면 당연하다. 하지만 2022년 월드컵 유치를 현실성 없는 일로 보았던 '현'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생각이 극적으로 변하는 과정과, 현재의 월드컵 유치활동을 보면 과연 대한축구협회가 '무엇'을 위한 조직인지, 심지어 '누구'의 조직인지 의심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나는 한 사람의 축구팬으로서 몇 번의 월드컵을 모국에서 거푸 치러내는 것을 보고 싶은 욕심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월드컵이 동일 국가에서 몇 번씩 치러질 수 없다면, 다음 월드컵은 다음 세대의 기쁨으로 남겨두어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물론 모두가 같은 마음일 수는 없으니 또 다른 월드컵을 유치하는 게 절대적으로 틀린 일이라고까지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월드컵이 진정 '정부와 국민이 힘을 모아야' 가능한 것이고, 또한 그 이전에 월드컵이 진정 '국민의 기쁨'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이 월드컵이 '기쁨'만이 아닌 '비용'이라는 '대가'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좀 더 진지한 논의를 통해 뜻을 모으는 게 먼저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혹 그러한 논의를 거쳐 국민이 또 한 번의 월드컵을 현시점에서 염원한다면 그것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또 한 번의 월드컵이 그저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더군다나 그의 머릿속에 사특한 계산이 아주 약간이라도 도사리고 있다면, 섣부른 '결혼식' 추진을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그때는 '결혼식'은커녕 오히려 '이혼'을 생각해야 할 것이고, 이때 이혼의 당사자는 물론 대한축구협회와 정몽준 명예회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정몽준 명예회장이 한국 축구에 일정 부분 기여한 바는 인정해야겠지만, 이제는 서로를 위해서라도 분명 헤어져야 할 때이다.

덧. 메이저 대회 개최가 언제나 '기쁨'이 되는 것은 아닌데, 이와 관련해서는 정희준의 <어퍼컷>을 읽어 보면 놀랍고 흥미로운 내용을 많이 접할 수 있다. 내 마음 같아서는 관련된 내용 전부를 인용하고 싶지만 스크롤의 압박상 여기에 약간의 내용만 인용한다.

스포츠 메가 이벤트는 그래서 그 규모가 크면 클수록 개최 도시에겐 빚잔치였다. 올림픽 때문에 쪽박을 차게 된 기념비적 사례는 1976년 올림픽을 개최했던 몬트리올이다. 당시 몬트리올 시장은 올림픽으로 인해 재정 적자가 날 가능성은 남자가 아이를 낳을 가능성보다도 낮다고 했지만 결국 몬트리올 시는 엄청난 적자로 인해 파산 직전까지 몰렸고 그 빚을 갚는 데 30년을 허비해야 했다. 그래서 몬트리올 사람들은 올림픽 경기장을 'The Big Owe(거대한 빚)', 'The Big Mistake(엄청난 실수)'라고 부른다. (p163) 

많고 많은 '빚더미 올림픽' 중에서도 동계 올림픽 삼수에 도전하는 강원도 평창이 특히 주목해야 할 곳이 있다. 1998년 동계 올림픽을 개최했던 이웃 일본의 나가노다. 일본, 아니 아시아 최대의 겨울 휴양지로 사실상 '준비된 개최지'였던 나가노는 물경 190억 달러를 투자해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그러나 폐막 후 다른 역대 개최지와 마찬가지로 곧장 포스트올림픽 불경기Post-Olympic Slump로 빠져들었다. 필자는 2006년 일본에서 만난 미디어 마케팅 전공 교수와 나가노 올림픽에 참여했던 세계적 광고 회사 덴츠의 스포츠 마케팅 담당 임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가노가 동계 올림픽을 개최한 것이 지역 주민들에게 잘된 일이었나요?" 두 사람은 입을 맞춘 듯 동시에 대답했다. "NO." (p165)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스포츠 메가 이벤트의 경제 효과란 고상하게 말하면 '환상'이고 쉽게 표현하면 '뻥'이다. 지역 경제와 도시 공학 분야의 외국 학자들은 스포츠 메가 이벤트와 지역 경제 활성화의 상관관계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영국 경제학자인 시맨스키Szymanski는 <월드이코노믹스>지에 실린 '월드컵의 경제 효과'라는 논문에서 "월드컵의 거시 경제적 효과는 없다"고 결론 내리며 "국가는 스포츠 이벤트 유치에 나서면서 갖은 경제적 효과를 '창조inventing'하는 나쁜 버릇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p169) 

그런데도 왜 우리나라 지자체들은 국제 대회를 유치하는 데 '환장'하는 것일까. 첫째는 지자체장들, 정치인들의 욕심이다. 이들에게 이런 대규모 국제 스포츠 이벤트만큼 좋은 건 없다. 이만큼 '폼' 나는 게 없다. 방송 타고 사진 찍힐 가장 좋은 기회다. '국제적'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외제라면 환장하고 국제도시라면 앞뒤 안 가리는 동네 사람들 허파에 바람 넣기 가장 좋다. 공장을 유치해 일자리 만드는 그런 정도에 비할 게 아니다. 게다가 일단 유치만 하면 몇 년 후인 개최 때까지 재선이고, 삼선이고 도대체 걱정이 없다. 아무런 업적이 없어 현직 프리미엄은커녕 2010년 지방 선거를 앞두고 당 공천조차 걱정해야 하는 허남식 부산 시장이나 박광태 광주 시장이 각각 올림픽과 유니버시아드 유치에 목을 매는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p169-170)

국제 행사 유치에 일단 눈이 멀면 이들에겐 혈세도 곶감으로 보인다. 강원도는 결국 실패한 동계 올림픽 유치에 6,000만 달러, 물경 600억 원을 썼다. 아시안 게임 유치전이 막바지까지 접전을 벌이게 되자 인천시는 급한 나머지 스포츠 약소국 지원 프로그램에 2,000만 달러를 지원하고 참가국의 숙박과 항공료 일체를 부담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게 무려 400억 원어치란다. 한마디로 '묻지마 유치', '퍼주기 유치'다. 광주는 2013년 하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유치에 100억 넘는 돈을 쏟아 붓고도 실패해 그 돈의 출처와 사용처가 문제가 됐었는데 그 논란을 정말 끝끝내 '쌩' 까고 2009년 5월 기어이 2015년 대회를 유치하고야 말았다. 이번엔 얼마를 썼는가. 정말 누구를 위해 유치하는가. (p17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