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은 그 자체로 '순수한 축구대회'를 표방하지만 지구상 최대의 국제적 이벤트라는 점에서 '순수성'의 포장지를 가볍게 벗어던진다. 독재정권의 추악한 얼굴을 가리기 위해(1978년 아르헨티나) 열린 적도 있고 독재에서 벗어나 그 억압적 이미지를 벗기 위해(1982년 스페인) 열린 적도 있다. 역대 개최국들은 악착같이 월드컵을 국운 상승의 호기로 삼았다. 미국(1994년)과 프랑스(1998년)는 경제적 효과와 '일시적' 인종화합의 장으로 삼기도 했다. ㅡ<축구장을 보호하라> 中ㅡ
월드컵의 역사가 증명하듯 본래 월드컵은 '순수한 축구대회'와는 거리가 있었다지만,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유독 상업주의와 관련하여 '순수성'이 발가벗겨지는 모습이 많이 보이는 것 같다. 특히 이와 관련해서는 SBS의 공로를 특별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SBS는 월드컵 단독중계를 강행하면서 독점한 '상품'을 통해 최대한 많은 돈을 뽑아내기 위해 가히 천박할 정도로 혈안이 되어 있는 듯하다. 덕분에 월드컵 경기를 전후로 보이는 광고들은 오직 소수의 대기업의 것으로만 채워져 있고, 시민들을 위해 전광판에 광고 대신 축구를 보여주고자 하는 전광판 업체들의 호의는 그에 대해 돈을 요구하는 SBS에 의해 무산되기도 했다. 게다가 열정적이고 자발적인 거리 응원은 발 빠르게 장소를 선점한 기업들에 의해 그 순수성의 상당부분을 위협받고, 많은 돈을 지불한 월드컵 '공식' 스폰서들을 위한 FIFA의 특혜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처럼 순수성이 훼손된 월드컵에 냉소가 자리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한국 대표팀이 지난 2002년 월드컵의 영광을 재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누군들 없겠는가마는, 이미 순수성이 적나라하게 발가벗겨진 상황에서 한국 대표팀의 승리는 천박한 자본주의와, 혹은 때로는 정권을 쥐고 있는 이들의 승리를 아울러 의미하고, 그것은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다. 한국 대표팀의 조별 경기만으로도 이미 손익분기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SBS의 수익은 한국 대표팀이 토너먼트에 진출할 때부터 급격히 늘어나는데, 이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의 중계권마저 독점으로 보유한 SBS의 향후행보에 타당성을 안겨주고, 또한 한국 대표팀의 경기가 있을 때 몇몇 국민적 합의가 필요한 일들을 서둘러 처리하려는 '독재적' 정권은 대표팀의 승리가 있을 때마다 벙커에서 승리의 휘파람을 부는 것이다. 그 꼴을 볼 바에야 차라리 대표팀이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오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축구가 그렇게 희생만 치른 것은 아니다. 프랑코 독재시대를 끝낸 스페인에게 축구는 희망의 예광탄이었으며 남미와 아시아에서도 축구는 거역할 수 없는 저항적 에너지가 되기도 했다. 구체적인 스트라이크의 계기는 물론 아니다. 그러나 축구가 없는 독재를 상상해 보자. 무슨 낙으로 그 혹독하고 지루한 세월을 견딜 것인가. 물론 그 참담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경기가 독재자의 안녕에 이바지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권력자가 애용하는 축구라고 해서, 이를테면 약 20년 동안 집권했던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신의 이름을 딴 아시아 지역 축구대회를 열어 독재의 달콤한 맛을 즐겼다고 해서 그 자리에 모인 수만 명의 관중들이 오로지 독재자에게 충성을 다짐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ㅡ<축구장을 보호하라> 中ㅡ
하지만 월드컵이 개막한 이후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단지 냉소만으로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어떤 가치들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예컨대, 우려스러웠던 팔 부상에도 불구하고 끝내 조별리그 첫 경기에 잠시 모습을 드러낸 드록바가 2006년 월드컵 당시 자국의 내전 중단을 눈물로 호소했던 이야기라거나, 혹은 북한 대표팀 선수로서 월드컵 무대를 밟아 세계최강 브라질을 상대하게 된 정대세가 만감이 교차한 듯 눈물을 쏟았다는 이야기라거나, 혹은 1966년 월드컵에서 8강에 진출했던 북한이 준결승 티켓을 양도해야만 했던 상대인 포르투갈과 44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나서 다시 맞붙게 되었다는 이야기라거나, 또는 시한부 인생 선고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출전 의지를 불태운 호주의 해리 큐얼에 대한 이야기 등, 월드컵이 엮어내는 문화적,역사적 '드라마'에는 문자 그대로 '월드컵'이기에 접할 수 있는 전세계의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이 존재하고 있고, 이에 대한 반응은 결코 냉소일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리면 이제 '냉소'는 눈을 씻고 봐도 흔적을 찾기 어렵다. 거슬리는 부부젤라의 소음과 지나치게 다루기 힘든 자블라니의 탄성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은 열의를 다해 경기장에서 땀을 흘리고, 그 선수들을 보며 관중들은 때로 환호하고 때로 슬픔의 눈물을 흘린다. 한국 대표팀 선수들 역시 그 어느 대표팀 선수들 못지않게 열심히 그라운드를 누비고, 와중에 훌륭한 경기력으로 승리를 기록하기도 하고 아쉬운 경기력으로 패배를 기록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경기장에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오직 '축구경기'가 펼쳐지고, 그것은 세계의 많은 나라 그리고 각국의 많은 선수들이 바라마지 않던 순수하고 역사적인 현장인 셈이다. 그렇기에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며 거리로 나선 붉은 악마들의 순수성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고, 이는 또한 여전히 유효한 축구의 가치를 확고히 웅변하는 것이다.
축구는 철저히 산업화되었다. 수익성이 없는 것은 곧 무익한 것으로 변했다. 어린아이가 공을 가지고 놀거나 고양이가 면실 꾸러미를 가지고 노는 것과 같은 순수한 쾌락은 상실되었다. 프로 축구의 관료화는 단순한 주력과 체력적 강인함만을 요구한다. 즐거움을 박탈하고 환상을 쇠퇴시키고 대담성을 금지시켰다. 금지된 자유를 향해 모험적으로 돌진하는 육체의 순수한 쾌락이 사라졌다. ㅡ<축구, 그 빛과 그림자> 中ㅡ
<축구, 그 빛과 그림자>에서 축구의 역사를 "즐거움에서 의무로 변해가는 서글픈 여행의 역사"라고 단언한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말은, 그래서 그 대단한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정답은 아니다. 그가 지적하듯이 "수익성이 없는 것은 곧 무익한 것"이 되고, "어린아이가 공을 가지고 노는 것과 같은 순수한 쾌락"은 상실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축구장에서 "환상"과 "대담성"과 "즐거움"을 만난다. 최고의 무대에서 승부를 가리려는 그 승부의 원초적 순수성은 월드컵 역사에서 있었던 몇몇 의심스러운 경기에도 불구하고 면면히 이어져왔고, 이제 월드컵은 수억의 인구가 지켜보는 축제의 장이 되면서 더 이상 적어도 경기장 안에서의 순수성을 훼손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축구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그러므로 결코 천박한 상업주의와 과잉된 민족주의만이 아닌, 축구경기에 대한 혹은 나아가 축제에 대한 기대와 환희와 즐거움이기도 한 것이며, 이는 오늘날의 축구가 오로지 '의무'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반증하는 것이다.
물론, 축구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경계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축구와 월드컵에 환호하는 이들의 순수성을 이용하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월드컵을 마치 '악의 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도할 이유로까지 확대되기에는 불충분하다. 움베르토 에코는 "과연 월드컵이 벌어지는 일요일에 무장투쟁이 가능한가? 축구경기가 있는 일요일에 혁명이 가능한가?"라고 물었다지만, 지난 2006년 <한국일보>의 한 칼럼에서 강준만이 서남대 김욱 교수의 말을 인용한 바에 따르면, 이에 대해서는 이런 반론도 가능한 것이다. "축구경기가 없는 일요일에는 언제나 혁명이 가능한가?"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강준만은 월드컵 열풍에 대한 비판이 '관심'의 기회비용을 걱정하는 것이라고 분석하면서, "월드컵 과잉은 4년에 한 달이지만 나머지 3년 11개월이 더 문제가 아닌가?"하는 재반론도 가능하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특히 <축구는 한국이다>에서 강준만이 소개한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의 비유는 월드컵에 대한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사람들에게 속 시원한 해답의 하나를 제시한다고 믿는다.
"때로 경기 하나가 인식의 일대 전환을 가져오고 그것이 실제의 물적 질적 변화를 선도한다. 그러니 이 대목에서 혹여나 촌스런 애국주의에 대한 민망함에 그를 질타하는 분석은 참아 달라. 지난 월드컵 애국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근엄한 분석을 접할 땐, 어렵게 만난 멋진 연인과 이제 겨우 연애 좀 시작해 보겠다는데 연애 너무 집착하면 자칫 살인나는 수도 있다는 훈계부터 듣는 기분이었다." ㅡ<축구는 한국이다> 中ㅡ
1970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우승하며 줄리메 컵을 영구히 소장함에 따라, 새로이 월드컵 트로피를 고안하게 된 이탈리아의 조각가 실비오 가자니가는 월드컵 트로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광의 선수는 초인이 아니라 위대한 인간이어야 하며 더욱이 최선을 다해 고난을 이겨낸 영웅이어야 한다. 그 선수가 세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어쩌면 우리가 월드컵을 둘러싼 '순수성의 훼손'에 대해 과도한 비판을 하는 건, 월드컵에서 초인의 모습을 기대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의 비루하고 천박한 감정과 행태 따위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월드컵은, 그리고 축구는 오직 '인간'의 놀이라는 점을 다시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월드컵에는 종종 인간의 추악한 모습이 끼어들기도 하지만,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인간의 모습도 상존하는 것이다. 땀을 흘리며 공을 좇는 순수성이 있고, 거기에 기뻐하고 슬퍼하는 인간들의 '진실한' 감정이 넘실댄다. 물론, 그런 이유로 월드컵을 향한 비판이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겠지만, 또한 그런 이유로 월드컵을 향한 열광도 이해될 수 있어야 마땅하다. 요컨대, 월드컵은 그 트로피의 형상이 그러하듯 단언컨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고, 바로 그것이 우리가 끝내 그 '그림자'의 암울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축제인 월드컵을, 차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유일한 이유일 것이다.
"월드컵에 가장 바라는 것은... 인간을 고무시키고 단합시키는 (축구의) 힘이다." ㅡ넬슨 만델라ㅡ
멀미나는 알제리 시절, 그 수난의 햇살 아래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던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알베르 카뮈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궁극적으로 알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윤리와 의무는 축구선수로서 지녀야 할 윤리와 의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ㅡ<축구장을 보호하라> 中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