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 - 메이저리그 124승의 신화
민훈기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메이저리그 124승의 신화 박찬호>를 읽은 건 박찬호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책의 저자인 민훈기 때문이었다. 한 포털 사이트에서 우연히 민훈기 기자의 메이저리그 관련 칼럼을 읽게 되었는데 사뭇 마음에 들었고, 이후 그의 글은 일부러라도 찾아서 읽곤 했다. 냉정히 말하면 아름다운 문장도 아니고 완전히 새로운 자료를 제시하지도 않지만, 평이한 문장과 새삼스러울 것 없는 자료를 가지고 그는 기어이 어떤 의미들을 찾아내곤 했다. 그 의미란 때로는 1회에 던져진 95마일의 강속구 하나이기도 했고, 타격 슬럼프 와중에 나온 꾸준한 출루이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한 타자에게 두 번의 홈런 허용 이후에 나온 한 번의 삼진이기도 했다. 공 하나 하나가 던져지는 순간의 중요함을 캐치하고, 똑같은 통계자료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아내고, 나빴던 순간에도 좋았던 점을 찾을 줄 아는 저자의 밝은 눈은 기어코 그를 다른 야구 전문가와 차별하게 만든다.

 

익히 알려져 있다면 알려져 있는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여정을 다루는 이 책에서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전적으로 저자의 특별함에 힘입은 바 크다. 박찬호의 전성기 시절, 내 다이어리에는 박찬호의 승리가 숫자로 기록되었던 때도 있었듯 누구나 박찬호의 승리 숫자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이 책은 그러한 단순한 숫자 혹은 결과로서의 승리가 아니라 새로운 무대를 개척해 나가는 박찬호의 집념을 좇으며 그 과정을 상세히 복기해놓고 있다. 책 속에는 승리의 환희만이 아니라 고통과 좌절의 패배, 행운과 불운의 교차, 인고와 재기의 순간이 숨김 없이 펼쳐지며, 때문에 이 책은 저자가 말하듯 "승리한 자의 기록이이지만 동시에 온전하게 패배할 줄 아는 자의 기록이기도 하다."

 

사실 박찬호가 LA에서 전성기를 구가한 것이나 텍사스에서 힘겨운 시기를 보낸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가 샌디에이고, 뉴욕 메츠, 필라델피아, 토론토, 뉴욕 양키스, 피츠버그 등에서도 분투를 이어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설령 단편적인 뉴스를 통해 그의 이적 소식을 들었을지라도 그가 여러 팀에서 어떤 활약을 선보였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잊혔다고 사라진 것은 아니며, 선발에서 불펜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그가 던지는 공 하나 하나의 중요성이 작아진 것도 아니었으며, 패배라고 해서 오로지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이 숨을 쉬어야 살듯이 야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박찬호는 묵묵히 공을 던졌고, 그것은 과장하자면 단지 살아가는 것의 경이로움만큼이나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인생의 축소판에 비견되는 야구의 진면목은 책 속에서 박찬호라는 한 야구선수의 도전을 매개로 하여 실로 매력적으로 드러난다.

 

저자의 안내대로 박찬호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무심코 넘겼던 많은 부분들이 큰 의미로 다가온다. 개인적으로는 특히 동양인 최다승인 124승을 달성하는 과정이 사뭇 감동적이었다. 책에 따르면 박찬호는 2010년 10월 2일, 소속팀 피츠버그가 플로리다에 3대 1로 앞서던 5회 말에 마운드에 올라 3이닝을 완벽하게 막으며 대망의 124승 째를 거뒀다고 한다. 당시 러셀 감독은 박찬호에게 신기록의 기회를 주기 위해 4회까지 호투하던 선발투수 다니엘 매커친의 양해를 얻어 박찬호를 넣었고, 모두가 알다시피 그 경기의 승리는 박찬호의 마지막 승리가 되었다. 한편 매커친 또한 대선배의 기록 달성을 위해 양보를 했고, 다음 날 박찬호는 매커친에게 아이패드를 선물했다고 한다. 쉽게 얘기되는, 혹은 단지 동양인들만의 무의미한 기록으로 폄하되는 박찬호의 기록달성에는 이와 같은 배려와 양보가 숨어 있었고, 이는 박찬호가 걸어온 발자취의 위대함을 아름답게 증명한다.

 

IMF시대에 박찬호의 야구가 국민에게 큰 희망과 기쁨을 주었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가 국민에게 더 이상 희망과 기쁨을 주지 못한다고 여겨질 때에도, 그는 오직 야구를 했었다고 이 책은 항변하는 듯하다. 박찬호의 여정은 그 자체로 위대하지만 그 여정을 훨씬 깊이 있고 풍요롭게 만든 것은 저자의 넓고 깊은 식견과 순간순간의 성적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냉철함, 무엇보다도 취재 대상에 대한 한결같은 애정이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 대단한 야구 여정에 우리를 초대해주어서 고맙다."는 저자의 마지막 말은, 그래서 저자에게도 또한 되돌려 주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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