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존재
이석원 지음 / 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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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1980년, 컬러TV의 국내 시판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해의 가을과 겨울이 교차할 무렵, '한 남자'가 10개월 여의 어둠 속 칩거를 끝내고 마침내 총천연색의 빛으로 둘러싸인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ㅡ

위에서 언급한 '한 남자'란 다름 아닌 '나'를 가리키는 것인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컬러TV가 시중에 유통되어 많은 사람들이 다채로운 색의 향연을 누리게 된 것과 내가 태어난 것 사이에 필수불가결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우길 생각은 전혀 없다. 그렇게 따지자면, 유사한 인과관계를 주장할 사람이 족히 수만은 될 테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른바 '컬러 시대'에 태어난 내가 좀 더 "반짝반짝 눈이 부신" 삶을 살기는커녕, 흑백텔레비전의 무채색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게 되리라고는 감히 짐작하지 못했다. 아무거나 골라잡아도 상관없던 어린 시절, 너무나 많은 가능성 때문에 오히려 단 하나의 장래희망을 고르지 못하곤 했지만, 그게 훗날 장래희망이 그저 맘대로 고른다고 되는 게 아님을 예견한 셈이 되리라고도, 나는 차마 상상하지 못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보통의 존재'임이 이제는 분명해졌고, 이건 확실히 그다지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면, 자랑은커녕 '보통의 존재'는 판타지나 로망과는 억만광 년쯤 떨어져있으면서 콤플렉스와는 꽤나 사이가 좋은, 가능하다면 이쪽에서 내팽개쳐버리고 싶은 감투다. 화려하고 넓은 집과 비싸고 멋진 차, 근엄하고 존경스러운 아버지와 자애롭고 현명한 어머니를 비롯한 완벽한 가정, 잘생긴 외모와 탁월한 능력 등등. TV화면에 비치는 찬란한 어떤 판타지 같은 삶들은 '보통의 존재'에게는 당연한 귀결로 허락되지 않고, 그 대신 '보통의 존재'는 그 대척점의 삶 속에서 콤플렉스에 휩싸이며 번민할 뿐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그럼에도 끝내 내게 고스란히 물려진 것들에 대해, 그리하여 이상과는 거리가 먼 현실에 대해, 무엇보다도 특별하지 않은 나의 존재에 대해. 과연 이러한 '보통의 존재'에게도 희망과 로망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스스로 '보통의 존재'를 자처하는 이석원은 이 책에서 '보통의 존재'로서 '보통의 존재'에게 말을 건넨다. '보통의 존재'답게 그의 이야기들은 대개 소소한 것들에 관한 것이고 종종 음울하고 쓸쓸한 이야기들이며 자주 애잔함과 서글픔을 자아내지만, 놀랍도록 솔직하고 잔잔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글은 놀랍게도 독자에게 애틋한 공감과 위로를 전해준다. '보통의 존재'로서 일상적으로 느끼던, 하지만 섣불리 말하기는 어려운 내밀하고 꺼림칙한 고민과 불안들이 책을 읽어나가는 가운데 저자의 사유와 만나 고요하게 가라앉고, 또한 나아가 보통의 존재에게도 허락된 따스한 추억과 소소한 즐거움 그리고 마음속 깊숙이 숨겨둔 빛바랜 희망이 새삼 꿈틀대는 것을 느낀다. 그리하여 종래에 그는 '보통의 존재'인 스스로와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틀림없는 '보통'의 존재이지만, 중요한 건 여전히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데에 있다고.

평일 밤 아홉 시쯤, 느지막이 서점을 찾아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한적한 서점 이곳저곳을 거닐 때면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좀 더 젊은 시절에는 이런 사소한 일에 행복을 느껴야 하는 내 처지가 가여웠던 적도 있었지만 행복 중의 으뜸은 평범한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부터는 더더욱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오늘도 서점을 찾고 있다. (p308)

생각해보면 타인의 삶을 접하며 느꼈던 감정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색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지닌 이의 삶이 보여주는 당당함과 찬란함, 그로부터 비롯되는 선망과 부러움이 그 하나고, 마치 검푸른 바다색과 같은, 깊이 침잠할 대로 침잠해 버린 삶을 사는 이의 슬픔과 고통, 그로부터 비롯되는 연민과 자기기만적 안도가 다른 하나다. 여기에는 '공감'이 자리할 여지는 적다. 이에 비해 이석원이 공개일기를 통해 보여주는 그의 삶은 무채색처럼 선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마치 무채색이 빛에 의해 밝고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듯, 적나라한 자기응시로 드러내는, 그러나 결코 과잉되는 법이 없는 그의 감정들이 내밀하고 절제된 글들을 통해 독자라는 빛에 닿아 이런저런 감정 상태를 낳는 듯하다. 때로 유치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개인적인 일 같기도 한 그의 글 속에서 이렇듯 커다란 공감과 따스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닮은 '보통의 존재'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보통의 존재'란, 간단히 말해 지갑에 5천원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누구나 화려하고 찬란한 어떤 것들을 원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지갑에는 언제나 5천원 밖에 없다는 게 문제다. 이 5천원으로는 영원한 사랑을 사는 데에도, 주연 배역을 사는 데에도, 금석 같은 친구를 사는 데에도, 이상적인 가족을 사는 데에도 불충분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5천원으로 종종 추억과 즐거움과 행복을 사곤 한다.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커피를 마실 때나 서점에서 책을 뒤적일 때에나 즐겨 찾는 블로거의 새로운 글을 읽을 때 5천원은 충분하고, 이것은 결코 값싼 자기만족이 아니다. 중요한 건 보통의 존재에게도 5천원쯤은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이고, 이건 이석원이 말하듯, 우리의 '위대한 유산'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러나 해답을 알 수 없는 오랜 물음을 던진 끝에 어느 날, 내가 그토록 달아나고 싶고 회의하던 것들로부터 나와 내 삶이 이우러져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인 순간, 나의 모든 아쉬움들은 그제야 비로소 위대한 유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바로 잘나지 않은 내 가족과 친구들, 무엇보다 늘 부끄럽게 여기던 내 자신까지, 바로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수많은 것들이 내게 건넨 힘과 그들과 함께했던 세월 덕택이었습니다. 비록 조금 뒤늦긴 했지만, 이젠 내겐 이 화려한 유산을 마음껏 쓰는 일만 남았습니다. (p99)

생각하기에 따라서 '보통의 존재'도 얼마든지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이석원은 하지 않는다. 물론 설령 그런 거짓말을 하더라도 이쪽에서 고분고분 믿어줄 마음도 없긴 하지만. 그러나 쉽게 꺼내기 힘든 고민도 서슴지 않고 펼쳐내는 그의 솔직한 글들은 독자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과 더불어 독자의 마음마저 솔직하게 만들어 주고, 하여 독자가 그의 글 속에서 문득 조우하게 되는 솔직한 마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보통의 존재'는 종종 유감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슬픔과 좌절의 필요충분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그렇다면 '보통의 존재'라고 너무 침울해 할 필요는 없다는 것. '보통의 존재'에게도 즐거움과 행복은 남의 일만은 아니거니와, 무엇보다도 '보통의 존재'란 나만을 일컫는 것도 아니니까. 아무튼 그러니까, 기운을 내자!

ㅡ2010년, 컬러TV가 국내에 시판된 지도 30여 년이 지났다. 그리고 이제 태어난 후 서른 한 번째 새해를 목전에 둔 '한 남자'는 종종 슬퍼하고 불안해하며 좌절하기도 하지만, 또한 때때로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며 끝내 마음속 로망이 실현되기를 바라며, 꽤나 잘 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보통의 존재로서'ㅡ

아무튼 기운 내. 너만 그런 건 아니니까.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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