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구조주의(모든 인간 행위는 무의식적인 상징적 메커니즘에 의해 조종된다는 생각에 기반을 둔 이론들)'의 시대에 알튀세는 실천적 휴머니즘에 의해 보충되어야 하는 악명 높은 '이론적 안티 휴머니즘'의 공식을 제시했다. 우리는 실천 속에서 휴머니스트처럼 행동해야 한다. 즉 타인을 자유롭고 존엄한 인간으로 대하며, 자기 세계의 창조자로 대해야 한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우리는 휴머니즘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우리 자신의 곤경을 자생적으로 체험하는 방식이라고, 인간과 역사에 대한 진실한 지식은 개인들을 자립적 주체가 아니라, 독자적인 법칙을 갖는 구조 속의 요소들이라고 항상 생각해야 한다. 알튀세와 반대로 라캉은 우리는 실천적인 안티 휴머니즘을 인정해야 한다고, 니체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고 부른 차원을 넘어서는 윤리, 인간성의 지극히 비인간적인 핵심과 대면하는 윤리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인간존재의 잠재된 괴물성, 보통 '아우슈비츠'라는 단어로 포괄되는 현상들 속에서 폭발하는 악마적 차원을 두려움 없이 고려하는 윤리학을 의미한다. 

 

- 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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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쓰는 것이 정신분석적 글쓰기 인가요?
원래 무의식을 표현해내는 '정신분석'에는 의식의 특정 기준을 '재현'하는 정확한 모델은 없다. 그러나 내가 아는 모델로 <프로이드>의 작품분석 스타일과 꿈해석 스타일, 증상 해석 과정들이 있다.
여기에 과거 7년간 대학교에서 꿈해석 보고서로 받은 학생들의 생생한 글쓰기 모델이 있다.

요약하자면, <전치 & 압축> 글쓰기가 곧 정신분석만의 고유 스타일이다.

전치처음에 의식에 외견적으론 '사소'하게 지각되지만 뭔가 여운을 남기는 어떤 말-이미지-생각-느낌이 (뭔가에 추동된) 우연한 <연상>작용에 의해 전혀 뜻밖의 '숨겨진 사실'에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하는 기제이다. "머리 스타일을 <지그재그>로 해봐!"라는 꿈속 친구의 (평범하지만 여운을 남기는) 말 뜻을 연상하다가 우연히 유치원때 모르는 남성에게 집근처에서 성추행 위협에 놀라...<지그재그>로 정신없이 집에온 그 기억....과 그로인한 이후 이성관계에 심각한 문제를 겪었던 어느 학생"의 글쓰기 사례는 그것을 보는 독자로 하여금....." 저리 사소한 단서에서 저토록 큰 사실을 어찌 발견하게 되었지?....'연상'이라는 게 참 대단한 거구나...!"라는 놀라운 경탄과 함께 자신의 숨겨진 상처를 발견, 치유할 수 있는 어떤 비법을 얻은 듯한 감동이 일어난다.

마찬가지로 "우리집에서 Party해요"라는 꿈속 언어와 연관해 떠오르는 생각을 자유연상하다가 <어떤 강한 추동력에 힘입어> <무의식의 방어막을 뚫고> '파티'라는 사소한 단어에 교묘하게 <압축된> 무의식의 억압된 내밀한 의미들을 다중으로 연상해내고 동료들 앞에서 당당히 표현해내 자신의 과거를 용기있게 통합해낸 어느 학생 사례도 꿈수강생들은 기억할 것이다.

<압축>을 풀어내는 글쓰기는 (의식 표면자료에서 전의식의 중간자료를 거쳐 무의식의 심층 자료들에로 추적해 나아가기 때문에) 독자의 마음에 마치 점점더 흥미로움을 주는 탐정소설을 읽어가는 듯한 느낌과 더불어 '예기치못한 무의식의 발견'에서 오는 감동과 경탄을 준다. 보통사람은 해낼 수 없는 <방어막을 뚫은> 발견에 찬사를 보내고픈 마음이 자연히 공명하듯 든다.

전치와 압축은 논리적 사고과 이데올로기적 습관사고에 길들고, 딱딱한 방어막에 고착된 보통 사람들과 성격장애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결코 해낼 수가 없다. 그래서 정신분석 글쓰기가 귀한 것이고, 희소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상식의 굴레를 넘어서 뭔가를 본 자유인과 현자의 글쓰기이고, 수십년간 갇혀온 증상적 방어막의 함정을 뚫고 나온 영웅의 글쓰기 이다.

보통의 학생들로 하여금 그 영웅적인 글쓰기를 가능하게 했던 추동력에는, 방어막이 뚫려도 안전할 수 있을거라는 느낌을 주는, 오랜 수업을 통해 무의식이 감지한 <선생에 대한 신뢰, 인정받고픈 욕구,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기존 한계와 대결해 넘어서고 싶은 욕구, 동료들과의 경쟁에서 낙오되고 싶지 않은 욕구....., 우수한 학점..>등의 다양한 욕구가 압축되어 있다.

사소한 자료에서 뜻밖의 비밀(보물)스런 자료를 발견하게 하는 기발하고 자유로운 <지그재그>적 전치 글쓰기,
표면에서 심층을 향해 <방어막을 뚫고 나아가는> 영웅적 지하동굴 탐사작업인 압축 글쓰기...(글이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더 무의식을 두드리는 뜻밖의 깨달음과 더 음미하고픈 여운을 남기는...글쓰기)
이 두 글쓰기가 반영되어야....자신과 독자의 무의식을 공명시키는 정신분석 고유의 글쓰기가 창조됨을 음미하여.

예술작품 분석에 관한 마지막 글쓰기 마무리를 하기 바랍니다.


* 이미 '깨달은 자의 관점'에서 저자-작품-자기 분석을 하지 말고,
깨달음에 도달하는 그 복잡미묘한 과정과 심정....을 '구도자의 관점'에서 서술하기 바래요.

* 그리고 새로 발견된 '무의식의 자료'를 외부에 드러내기 어색하게 느껴지는 경우는.... 다시 압축-전치하고 미적으로 승화해서 표현하기 바래요.
'은폐'의 요소보다 '당당한 승화' 비율이 큰 <미적 표현>일수록, 독자와 자신에게 더 깊은 여운을 준답니다.


꿈-예술선생 

 

출처: http://www.freudphil.com/06community08.php?code=in_asoophilartfreud&mode=vie&page=8&number=205&keyfield=&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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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상호 수동성은 헤겔의 '이성의 간지' 개념과 정반대다. 이성의 간지에서 나는 타인을 통해 활동한다. 타자가 나 대신 행동하는 동안 나는 수동적으로 뒤에서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다. 내가 해머로 쇳덩이를 내려치는 대신 기계가 그 일을 한다. 내가 물레방아를 돌리는 대신 물이 그 일을 한다. 내가 다루는 대상과 나 사이에 다른 자연 대상을 끼워 넣음으로써 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유사한 일이 인간관계의 차원에서 발생한다.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그를 다른 사람과 싸우게 함으로써 나는 편안하게 둘이 서로 치고 박고 싸우다 박살나는 걸 지켜볼 수 있다.(이것이 헤겔의 절대 관념이 역사를 관통하여 지배하는 방법이다. 절대 관념은 인간의 열정들끼리 서로 투쟁해서 절대관념을 대신하는 일을 하게 하는 동안 열정들 간의 투쟁 바깥에 남아 있다. 고대 로마가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바뀐 역사적 필연성은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열정과 야망을 수단으로 실현된다.) 반대로, 상호 수동성의 경우 나는 타자를 통해 수동적이 된다. 나는 내 경험의 수동적 측면(즐김)을 타인에게 양보하는데, 그동안 나는 계속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녹화 비디오가 내 대신 수동적으로 즐기는 동안 나는 저녁에도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나 대신 곡비가 애도를 표하는 동안 나는 죽은 자의 유산을 처리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를 가짜 행위(false activity)란 개념으로 데려다 준다. 사람들은 뭔가를 바꾸기 위해 행동할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 행동할 수도 있다. 거기에 강박신경증자의 전형적인 전략이 있다. 그는 실재적인 것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죽기 살기로 활동한다. 이를테면, 어떤 폭발 직전의 긴장 상태에 있는 집단에서 강박적으로 행해지는 대화는 항상 어색한 침묵 상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그 침묵 상태가 참석자들에게 잠재된 긴장을 대면하도록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 치료 중 강박신경증자는 분석가에게 끊임없이 사건 사고, 꿈, 자기 인식의 말들을 쏟아낸다. 하지만 그의 끊임없는 발화 행위는 만약 잠시라도 말을 멈춘다면 분석가가 진실로 문제 되는 것을 물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지속되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들은 분석가를 꼼짝 못하게 하려고 말을 한다. 

 

 

  오늘날 진보 정치의 많은 부분에서 직면하는 위험은 수동성에 있는 게 아니라 유사 능동성, 즉 활동과 참여의 몰입에 있다. 국민들은 항상 개입하여 '뭔가를 하고자' 애쓰고, 학계는 끊임없이 의미없는 논쟁에 참여한다. 진정 어려운 것은 한발 물러서서 활동을 그만두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때론 비판적인 참여를 침묵보다 선호한다. 그들은 우리를 대화에 참여시켜 우리의 불길한 수동성이 파괴되었음을 확신시킨다. 실제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게 하기 위해 항상 활동 중에 있는 이런 상호 수동적 상황에 맞선 비판의 첫걸음은 수동성 속으로 물러나는 것, 참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첫걸음은 진실한 활동, 즉 좌표계 전체를 실질적으로 바꿀 그런 행위의 토대를 밝혀준다. 

 

 

- 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





  한때 넘쳐흐르곤 했던 나의 진지함은 이렇게, 지젝(이 말하는 라캉)에 의해 강박신경증임이 밝혀졌다. '뭔가를 하려고 애쓰는' 것이 도리어 상호 수동적으로 이용당한다면, 물러나야 한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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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화에서 시간의 경과는 예정의 형태를 띤다. 사태의 추이는 신들이 정했거나, 별자리에 씌어 있거나, 신탁에 들었거나, 성서에서 보았던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신화와 역사는 공존할 수 없다. 신화에 따르면, 인간은 운명의 행로에 개입할 수 없기 때문에 정말로 새로운 일이란 일어날 수 없다. 반면 역사 개념은 인간이 사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사람들이 의식적 행위자로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도덕적, 정치적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세상이 왜 이럴까에 대해 경험적 인과관계를 찾을 수 없을 때(혹은 기억할 수 없을 때) 신화가 대답을 제공한다. 이런 대답은 세계에 의미가 있기를 바라는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키지만, 세계를 불가피한 운명으로 감수해야 한다는 대가가 따른다.(중략) 

  근본적으로 「파사젠베르크」는 신화적인 역사이론들의 정체를 폭로하는 작업이다. 이들 이론의 각본이 - 지속적인 발전이든 불가피한 파국이든 - 어떠한 형태를 취하든 마찬가지다. 그러나 벤야민의 지속적인 공격의 대상은 뭐니 뭐니 해도 역사가 저절로 진보한다는 신화였다. 핵시대가 열리고 테크놀로지의 무해성이 의심받기 시작하던 벤야민 당시에도 이러한 신화는 대체로 흔들리지 않았으며, 벤야민은 이러한 신화를 최대의 정치적 위험으로 간주했다. 과거의 벤야민 해석자들은 역사의 흐름에 대한 벤야민의 비관주의를 나치-소비에트 불가침조약이나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비롯된 벤야민의 후기 사유의 특징으로 이해했지만, 「파사젠베르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벤야민의 비관주의는 다년간 지속된(그리고 어쩌면 점점 더 강화된) 관심사였다. 최초의 메모는 프로젝트의 목표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역사의 이미지로부터 모든 '발전'의 흔적을 몰아낼 것", "진보 이데올로기를(......)모든 면에서" 극복할 것. 1935년 이전 항목에서는 이러한 논의를 다음과 같이 발전시켰다.  

 『이 저작의 방법론적 목표 중 하나는 진보 이념을 제거한 역사적 유물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역사적 유물론은 부르주아적 사고방식과 선명하게 구별된다. 역사적 유물론의 기본 원칙은 진보가 아니라 현실화다.』 

   따라서 벤야민이 「파사젠베르크」에서 다원적인 사회진화론들을 직접 언급한 것은 진보적 발전이라는 전제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자연선택설"을 비판하는 이유는 "진보가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대중화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연선택설은 진보 개념이 인간행위 전반으로 확장되도록 조장한다." 반면 "자연사"라는 벤야민 자신의 관념 성좌는 행복한 결말을 가정하지 않는다. 사실 이 관념 성좌는 특정한 결말이 있다는 가정 자체를 부정한다. 

  역사가 전진할 때 자연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벤야민이 강조하듯) 자연은 역사적으로 진보한다. 산업과 테크놀로지라는 새 자연은 생산수단의 차원에서 실제적인 진보를 보여준다. - 그러나 생산관계의 차원에서 계급착취는 변하지 않는다. 여기서도 오류를 낳는 것은 자연과 역사의 혼동이다. 즉, 역사의 야만성을 자연적인 것으로 본다면 사회진화는 신화다. 그러나 산업의 진보가 출발점으로 간주된다면 자연에서의 발전을 역사의 발전으로 오해하는 신화적 오류가 발생한다.  

  벤야민의 후기(1940)논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역사철학테제)의 주장에 따르면, 독일 노동계급은 테크놀로지의 진보와 역사의 진보를 같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잘못된 정치적 목표를 설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독일 노동계급은 테크놀로지가 발전하는 방향과 자기 계급이 움직이는 방향이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공장 노동 자체가 정치적 성과라는 환상으로 이어졌다. 공장 노동은 기술적 진보의 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 어떻게 노동자의 것이 아닌 (공장의) 생산물이 노동자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간과되었다. 이들은 자연에 대한 통제력이 진보했음을 인정할 뿐 사회가 퇴행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원래 진보 이념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것이었다. 이들은 진보 이념을 가지고 역사를 평가하고 역사 오류를 지적했다. 진보의 개념이 "문제를 제기하는 비판적 입장이 아닌 무비판적인 현실성을 자처하는 입장"과 동일시되는 것은 "진보가 총체적인 역사의 흐름인 양 행세할 때"뿐이다. 벤야민은 이러한 잘못된 동일시의 기원을 추적한다. 벤야민은 "19세기에 부르주아가 권력을 잡았을 때" 진보 개념이 비판적 효력을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상당히 관습적인 네오마르크스주의 용어다. 그러나 벤야민은 이러한 주장을 파리의 물리적 변형을 중심으로 시각화해낸다. 관습을 상당히 벗어난 시도다.  

2.

  18세기 부르주아 계몽주의는 죄악과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의 도시와, 구원과 영원한 축복의 장소인 천상의 도시를 모순적 양극으로 놓는 신학적 입장에 도전했다. 계몽주의는 인간이 신에게 받은 자기의 이성을 사용하여 바로 지금 여기에 "천상"의 도시를 만들 것을 종용했다. 물질적 행복은 이러한 지상낙원 건설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였다. 산업혁명 이후에는 이러한 낙원이 정말로 실현될 것처럼 보였다. 19세기에 유럽 전역 나아가 전 세계의 수도들은 극적인 변신을 거쳐 그야말로 번쩍이는 진열장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지상-천국의 도래를 약속하는 새로운 산업 및 테크놀로지를 선보였다. 그중에서 파리보다 화려하게 번쩍이는 도시는 없었다. 19세기 초에서 말까지 살았던 보스턴 시민 토머스 애플턴은 기존의 개념과 새로운 개념을 하나의 문장으로 표현했다. "착한 미국인은 죽어서 파리로 간다." "이 지상의 도시는 가로수가 늘어선 대로, 상점, 술집, 극장, 좋은 음식과 포도주 등 구체적 이미지"가 너무나도 전설적인 것이어서 "천국의 진주 대문과 황금 계단 같은 희미한 환상을 쉽사리 능가할 수 있었다." 

  도시의 화려함과 사치는 역사상 새로울 것이 없지만, 이것이 세속적, 대중적으로 이용된 것은 새로운 점이었다. 근대 도시의 광채는 대로와 공원을 거닐거나 백화점, 박물관, 전람회, 유적지를 방문한 모든 사람이 경험할 수 있었다. 파리는 "거울 도시(looking-glass city)"로서 군중을 압도하는 동시에 기만했다.'빛의 도시' 파리는 - 처음에는 가스등으로, 다음에는 전기로, 다음에는 네온 불빛으로 - 100년 만에 밤의 어둠을 몰아냈다. '거울 도시' - 군중이 스펙터클이 되는 도시 - 파리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생산자가 아닌 소미자로 반영했으며, 그러면서 거울 이면에 존재하는 계급관계와 생산관계를 은폐했다. 벤야민은 파리의 스펙터클이 "환등상" - 착시를 이용한 환등 여흥으로, 상들이 수시로 크기를 바꾸며 다른 방들과 뒤섞인다 - 이라고 설명한다. 마르크스는 "환등상"이라는 용어로 상품의 기만적 외양을 지칭한 바 있다. 상품은 시장에 등장한 "물신"이라는 것이다. 「파사젠베르크」에서도 상품의 물신적 성격을 다루는 「자본론」을 인용하며, 교환가치로 인해 상품 가치의 원천이 생산 노동에 있다는 사실이 은폐되는 양상을 설명한다. 그러나 벤야민의 출발점은 역사경험의 철학이지 경제적 자본 분석이 아니었으며 새로운 도시 환등상 문제를 푸는 열쇠는 시장 안 상품이 아니라 진열-중-상품이었다. 진열중인 상품에서는 교환가치 역시 사용가치와 마찬가지로 실제적인 의미를 상실하며, 순수한 재현적 가치가 전면에 등장한다. 섹스에서 사회적 지위에 이르기까지 욕망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상품으로 변형될 수 있었으며, 진열-중-물신인 상품은 사적 소유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우에도 여전히 군중을 매료했다. 오히려 도저히 살 수 없을 고가의 가격표는 상품의 상징적 가치를 더했다. 나아가 새로움 자체가 물신이 되었고, 이와 함께 역사 자체가 상품 형식의 구현체가 되었다. 

(출전: 수잔 벅 모스(Susan Buck Morss),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2004, 112-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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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논리 

" 이것을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할 것이다."  

충동의 논리 

" 난 이것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하고 있다." 

환상의 논리 

" 난 타자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난 그것을 제공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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