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복이다. 가을이 절룩거리는 계절의 등허리를 걷어찰 시간이다. 그 농장주 새끼가 우리 엄마한테 그랬던 것처럼. 여름은 어차피 불구가 된 채 잊혀갈 주제에 문턱을 긁어대며 악을 써 대고 있었다.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날이면 그 여자가 생각난다. 1966, 브루클린이었다. 우리는 더럽고 비좁은 호텔방에서 며칠째 널브러져 있었다. 해직된 부두노동자들은 밤새 싸구려 보드카를 마시고, 아침이 되면 그 병을 다 부숴가며 소란을 피워댔다. 알뜰한 새끼들. 한바탕 소란이 끝나면 베트남전 참전을 독려하는 시끌벅적한 캠페인이 악다구니를 쳤다. 창문을 닫고 싶었지만, 너무 더웠고, 어차피 잘 닫히지도 않았다. 나는 바닥에 누워 잤는데, 몸이라도 뒤척이면 낡아빠진 목조 마루의 이음새가 비명을 질러댔다.

 

-그년 좀 닥치게 해줄래?

 

쿠션이 다 꺼져 스프링이 도드라진 침대에는 텍사스 출신 촌뜨기 여자가 반쯤 동공을 풀고 벽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칡뿌리처럼 엉킨 블론드 헤어. 잠옷이지만 외출복이 되기도 하는 가난한 원피스에 언젠가 뒷골목 파키스탄인의 좌판에서 마리화나 거스름돈 대신 받은 한심한 가죽 팔찌를 차고 있다. 꼬락서니 하고는.

 

-더워.

 

-배고파.

 

-시끄러워.

 

-좆같아.

 

우리는 경쟁하듯 불만을 쏟아냈다. 전날 아침 식빵 한 쪽 이후로 먹은 것도 없었지만, 바깥으로 나갈 자신이 없었다. 더위와 가난, 난장을 벌이는 노동자들과, 무기력증이 방문 앞을 겹겹의 바리케이트로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넌 참 못생겼다.

 

-좆까.

 

-너나 좆까.

 

-씨발새끼.

 

한 채집통에 갇힌 두 마리 모기같은 몰골로 서로를 헐뜯어 허기를 달랬다. Fuck. 그녀는 병 바닥에 말라붙다시피한 싸구려 와인을 짜서 목구멍에 털어넣고는 침대 구석에 묻어 둔 기타를 뽑아냈다. 그녀가 노래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Summer time.

And the livin' is easy

Fish are jumpin'

And the cotton is high

여름이었어.

사는건 뭐 괜찮았어.

물고기들은 팔딱거리고

목화는 높게 자랐지.

 

그녀가 쇠를 짓뭉개는 칼칼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건 내 어린 시절이었다. 문득 저 창문 아래를 내다보면 거지같은 실업자 패거리와 눅눅한 골목 대신 내 고향 뉴올리언즈의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을 것 같았다. 강에 물고기가 뛰고, 목화가 높게 자라고.

 

Your daddy's rich

And your mamma's good lookin’

너네 아빠는 부자.

그리고 너네 엄마는 미인.

 

여기까지 부르고 그녀는 킥킥거리며 재떨이를 뒤적여 찾은 장초에 불을 붙였다. 우리 아버지는 노예 출신에 주정뱅이고, 엄마는 허리도 못 펴는 불구다. 나는 불만의 표시로 침대에 한쪽 팔을 걸쳐 올린 다음 몸을 지탱해 일어났다. 그녀는 마리화나 연기를 내 쪽으로 훅 뱉어낸 다음 다시 코드를 변주해갔다.

 

So hush little baby

Don't you cry

그러니까 빽빽거리지 말거라. 작은 꼬맹아.

울지 말아라.

 

나는 가운데 손가락을 열렬히 흔들어 댔고, 유일한 팬을 의식했는지 가수는 줒대없이 가사의 기조를 바꿨다.

 

One of these mornings

You're going to rise up singing

Then you'll spread your wings

And you'll take to the sky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노래를 부르면

너는 날개를 쭉 펴고

하늘까지 날아갈 거야.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고 매캐한 탁성을 쭉쭉 뽑아냈다. 취하는 것은 연기 때문일까 노래 때문일까. 그래서, 그 다음은? 나는 모이 먹는 토끼처럼 그녀 앞에 몸을 옹그리고 귀를 세웠다.

 

But till that morning

There's a'nothing can harm you

With daddy and mamma standing by

아침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너를 해칠 수 없단다.

왜냐하면, 아빠 엄마가 널 지키고 있을테니까.

 

꿈에서도 바랄 수 없었던 일들이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머릿속에 그려진다. 마치 정말 존재했던 일 처럼. 마리화나 연기에 취한 탓일까, 그 말도 안 되는 가사에, 특히 울지 말라는 가사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울었다. 노래가 끝났을 때는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쳤다.

 

-You‘re my fucking pretty flower.

 

-좆같은 비유 하지마.

 

내심 신이 난 그녀는 몇 곡을 더 부르고 다시 잠이 들었다. 나는 그녀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뒤, 지갑의 돈을 다 털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샌프란시스코로 갈 차비가 되기를 바라. Dear J.J, ‘The Flower'

 

나는 부두로나 가 볼 생각이었다.  

 

2년 후, 나는 용산 캠프의 레코드 가게 앞을 지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앨범에는 그 때 브루클린의 거지같은 호텔방에서 부르던 그 곡이 실려 있었는데, 어설픈 가사가 바뀌지도 않은채였다는 점이 퍽 감동을 줬다. 그날 잠들기 전에 혼자 그 호텔 방문을 열고 나가서 그 먼 샌프란시스코까지 며칠이나 걸려 도착해 냈을 그녀의 여정을 그려봤다. 

 

2사단에서 6년을 더 복무했고, LA에서 온 신참에게 그녀가 자살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호텔이라고 했다. 미국으로는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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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7-08-11 1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퇴근해야돼.

한수철 2017-08-12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 혹시 결말부를 고치셨나요? 어제 차 안에서 동료의 스마트폰을 잠깐 빌려 <그림처럼> 휙 읽었을 때와는 좀 다른 느낌. 그때는 뭐랄까 압도적이었는데, 지금은 약간 설명조로 바뀐 듯.

감상: 말미잘 님 글을 읽으면 공연히 기분이 좋아짐. 계속 써 주세연. 뿌뿌~

뷰리풀말미잘 2017-08-12 19:44   좋아요 3 | URL
헉, 예리하시긴. 고쳤습니다. 압도적인거랑 설명적인거 중에서 더 좋은 건 역시 압도적인거겠죠.. ㅠ 뭘 써야 되는지, 왜 써야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말복에 제니스 조플린 노래를 듣다가 옛날 생각이 나기라도 해야 쓰게 되네요. 어느덧 칠십줄에 접어들다 보니 귀차니즘만 나날이 더해가는군여..

한수철 2017-08-14 12:22   좋아요 0 | URL
뭐가 더 좋은 건지는 모르겠고, 뭐랄까 저는 제 기억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알코올 중독에 따른 기억능력의 현저한 저하 탓이겠지만, 실은 내가 기억하는 바가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가령 오늘 집에서 나왔을 때 내가 달걀프라이를 해 먹느라 사용했던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오프로 돌려 놓고 나왔는가를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기억에 따르면 항상 잠급니다. 신중한 타입의 인간이니까요. 그런데 믿을 수가 없어서 미량의 초조감이 하루 종일 잔존합니다.

점심 맛있게 드세영..... 영감靈感님...

뷰리풀말미잘 2017-08-14 17:03   좋아요 1 | URL
님의 기억력에 대한 제 소견입니당. 알코올 중독에 따른 기억능력의 현저한 저하는 문학적으로만 존재하는 걸로.. 저는 벤조디아제핀 중독에 따른 현저한 저하가 있는데 이건 레얼임. 근데 가스렌지 밸브(관에 달린거 맞죠?) 그거 꼭 잠궈야 됩니까? 전 평생 안 잠그고 다녔는데 문제 없더라구여.

광복절엔 무슨 책을 읽으실겁니까? 저는 김애란 신간 주문했는데 이놈의 알라딘은 아직도 배송 시작조차 하지 않았군요. 두억시니같은 놈들. 대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을 읽을까 합니다.

한수철 2017-08-14 22:25   좋아요 0 | URL
찬호께이의 소설과 갑자기 이름이 기억 안 나는 이의 ‘재미가 지배하는 세계‘를 읽거나 말거나 할 듯요.

p.s 근데 이제 당분간 댓글 안 쓸 겁니다.

뷰리풀말미잘 2017-08-14 22:31   좋아요 1 | URL
왜죠?

한수철 2017-08-14 23:00   좋아요 0 | URL
재충전하고 싶어서여.

AgalmA 2017-09-13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최근 할란 엘리슨 소설을 봐서 그런가...뷰리풀말미잘님이 원래 그런 성향이 있었지 싶기도 하면서.... 아직 할란 엘리슨 안 읽어 보셨음 읽어 보시길요/ 왜 읽어 보라고 했는지 대번에 알게 되실 듯. 내가 이런 거 쓰려고 했는데! 하실 거 같아서ㅎ 설명적인 거보다 압도적인 거에 더 가까운 작가이기도 하고ㅎㅎ

뷰리풀말미잘 2017-09-13 12:52   좋아요 0 | URL
오, 바로 보관함에 넣었어요. 저는 게으르고, 세상에는 읽을 책이 참 많군요. 하지만 전 소설은 쓰지 않아요. 못써요. ㅠ 글에 관한한 기능공이지 아티스트는 못 되죠. 반면 아갈마님은 아티스트의 기질을 가지고 있어요. 학자의 기질도 가지고 있고, 또 구도자이기도 하고요. 장차 저도 아갈마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AgalmA 2017-09-13 12:54   좋아요 0 | URL
어느 나락에 던지려고 절 그렇게 추켜 세우세요-,,-; 전 그냥 저일 뿐;
할란 엘리슨 가독력 짱~ 심심하실 때 읽어보시길요^^/

뷰리풀말미잘 2017-09-13 12:56   좋아요 0 | URL
헤헷- 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