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눈을 떴을 때 모로 누워 있었다. 새벽인 듯 했으나 정확한 시간은 가늠할 수 없었다. 왠지 누드였다. 골반에 살짝 걸쳐있는 홑이불 말고는 걸친 것이 없었다. 몽롱한 와중에 끄지 않은 스탠드가 통 유리창에 전신 실루엣을 찍어냈는데, 아 진짜 야해. 핥고 싶어.

 

물이 올랐다. 다시 운동을 시작한지 2년쯤 됐다.

 

 

#. 2

 

인생이 그렇듯, 몸매도 거저 주어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상은 생활과 습관의 산물이었다. 그걸 몸이 허물어지고 나서야 알았다. 이별을 하고 사랑을 느꼈다는 바보처럼 몸매를 잃고 그제야 비통했다. 전 직장을 다닐 때였다. 과로와 스트레스가 원인이었겠지. 식욕이 떨어졌고, 잠들지 못했다. 일에 집중할 수도 없었다. 복서였는데 스르륵 떨어지는 샤워타월에 한 박자 느린 헛손질을 했을 때 속까지 망가졌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말뚝 박을까 했던 직장을, 살려고 그만뒀다.

 

그때 좀 쉬었어야 했는데 도태될 것 같다는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공부를 하러 외국에 갔다. 전쟁터 같은 도서관에 First In Last Out을 밥 먹듯 했더니 머리에 지식이 쏙쏙 들어오는 게 아니라 머리칼이 쏙쏙 빠졌다. 매일 방바닥이 머리칼이 수북했다. 먹는 것도 엉망이었다. 매일 얼린 볶음밥을 먹었는데 내 냉동실에 늘 가득 차 있었던 것은 수혈 팩처럼 쌓인 비닐 팩. 1kg에 3달러쯤 하는 조각 야채와 베이컨, 굴소스와 참기름을 넣고 대충 볶은 국적불명의 전투식량이었다. 그걸 아침마다 전자렌지에 하나씩 데워서 백팩에 쑤셔넣었다.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나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의 매튜 매커너히처럼 비쩍 곯아있었다. 맥없이 푸석했고 힘, 유연성, 스피드, 근지구력, 지구력. 신체의 능률을 나타내는 모든 지표가 엉망진창이었다. 다시 취직을 한 다음엔 조금 여유가 생겼지만 게으름에는 관성이 붙더라. 몸을 rebuilding할 때 가장 힘들었던 것도 관성을 끊어내는 일이었다.

 

 

#. 3

 

계기는 이랬다. 어느 날 워킹데드를 시청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내일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시작된다면 나는 릭이나 캐롤처럼 살아남을 수 있을까? 몰려드는 좀비 떼를 밀쳐내고, 뒷통수에 나이프를 쑤셔 박고, 구르고, 달리고 그렇게 일곱 시즌이나.

 

 

그리고 보면, 3분남은 ‘인류 종말시계’는 오늘도 12시에 임박하고 있다. 예술작품을 통해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가능성을 점쳐볼까. 핵 전쟁(메트로 2033), 쓰나미와 해수면 상승(2012), 운석의 충돌(딥 임팩트), 외계인의 침공(우주전쟁), 치명적인 좀비 바이러스의 유포(워킹데드), 빙하기의 도래(설국열차), AI의 역습(매트릭스), 자동차의 반란(트럭), 열려버린 차원의 문(미스트), 사도의 침략(신세기 에반게리온) 생각해보니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닥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아니, 지금 이 순간이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그저께 택시운전사를 보니까 1980년의 광주에는 법도 도덕도 없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이 합병할 때, 너네들의 돈은 규정으로부터 보호받았는가? 얼마 전 어느 미친놈이 강남 화장실에서 칼부림을 할 때, 공권력은 그가 그래도 될 만큼 충분히 먼 곳에 있었다. 법이란 얼마 전까지는 박근혜의 사적 소유였고, 도덕은 나이가 많거나, 서열이 높거나, 돈이 많은 놈들이 휘두르는 무형의 채찍이다.  
 
몰라몰라. 리즈시절로 돌아가자. 어떻게 해야 할까. 괜히 예민한 시기였기 때문에 운동에 할애하는 시간과 몸의 피로가 삶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기를 바랐다. 집 앞에 시설이 잘 갖춰진 무료 피트니스 센터가 있었지만, 거기까지 걸어가기도 싫었다. 시간은 짧아야 했다. 방법은 간단해야 했다.

 

계획은 이랬다. 퇴근 후 하루에 3분. 최소한의 종류로. 핵심은 빅 머슬 위주의 프리웨이트 운동이었다. 기관차가 움직이면 객차는 따라가는 법. 대신 관절 가동 범위를 최대화 하고 근육을 비틀어 몸의 세부로 효과가 충분히 파급되도록 하자. 종류는 가슴(팔굽혀펴기), 배(크런치), 등(턱걸이), 다리(스쿼트), 어깨와 팔(밀리터리 프레스, 암컬)정도. 여기에 3km런닝를 섞어주면 다 해서 일곱 종류. 흔하지만 가장 확실한 운동이었다. 하루에 한 종목을 하면 일주일 단위로 끊어진다.

 

밀리터리 프레스를 위해 무게를 조절할 수 있는 덤벨을 창고에서 꺼냈고. 크런치할 때 바닥에 깔려고 폭신폭신한 요가 매트를 하나 장만했다. 운동하러 밖에 나가는 날은 금요일 하루뿐. 연습 없이 풀코스를 뛰던 체력이었는데, 처음에는 3km를 15분 안쪽으로 끊을 수도 없었다. 고작 그걸 뛰면서 여름 강아지처럼 할딱거렸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 4

 

결론, 효과는 레얼이다. 군살은 쪽 빠지고 근육이 올라붙었다. 섹시해. 기능성 측면에서도 생각이상의 진보가 있었다. 고중량을 다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쿼트, 데드리프트, 벤치 프레스를 몸무게의 1.5배로 다루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Navy seal의 체력테스트 기준을 달성했다. 몸은 가볍고 예전만큼 피로감을 느끼지 않는다, 3km를 고속으로 주파하고 바로 고중량 스쿼트를 해도 가뿐하다. 이 정도면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바디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부작용도 있다. 졸라 힘들다는 거다. 비루한 몸과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어려웠다. 다시 바닥부터 다져야하는 까마득함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늘 몸에 한계치의 부하를 걸고, 그것을 극복하는 일은 날마다 새로운 괴로움이다. 3분은 세 시간처럼 길게 느껴진다. 아직도 3km를 뛰기 전에는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파블로프의 개처럼 몸이 고통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게 핵심이다. 나는 버핏의 투자방법에서 영감을 얻었다. 전부라고 해도 될 만큼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우량주를 쥐고도 돈을 잃는다. 버핏은 기다린다. 투자하는 회사가 성장하며 더 나은 이윤을 창출하기를. 실제로 회사가 이윤을 창출하고, 그 과정이 몇 년이고 반복되어 결국 주가에 반영될 때까지. 평균적으로 한국 개미들은 일주일 쯤 기다린다. 미국 개미들은 한 달 정도 기다린다. 버핏은 코카콜라 주식을 사고 30년을 기다렸다.

 


#. 6

 

‘근육의 성장’은 반복적인 자극으로 파괴된 근육이 다시 회복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운동은 근섬유를 손상시키고, 손상된 세포는 수용기에 붙어있는 사이토카인Cytokine이라는 염증성 분자를 방출해 면역계를 활성화 시켜 회복을 도모한다. 회복된 근섬유는 처음보다 굵어지고, 강해진다. 이 과정이 반복되며 신체는 담금질 된다.(muscular hypertrophy) 이 매커니즘은 ‘개혁改革’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킨다. 고칠 ‘개’자에 가죽 ‘혁’, 가죽을 벗겨 새롭게 만든다는 뜻이다.

 


#. 7

 

회사 동료가 취미를 물었다. “미잘님은 집에 가면 뭐해요?” 잠만 자고 고대로 다시 출근할 것 같다고. 난 뭘 하지? 나도 궁금하다. 나는 뭘 하는 사람인가.

 

취미에 대해 써 보기로 했다. 1번,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바디 만들기. 집에 가면 거의 매일 하는 일이다. 어째서 이 고통스러운 것을 즐긴다고 할 수 있냐면, 바울선생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 아멘.  

 

그러니까.. 나는 스스로를 괴롭히며 가학적 쾌감과 피학적 쾌감을 동시에 즐기고, 알몸을 감상하며 희열을 느끼는 변태 성욕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달까. 최소한 매일 3분 정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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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7-08-10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의 인물 같네요. 지성적이고 분방하며 부유할 것 같은데...... 환란을 겪게 하고 싶네요.ㅎㅎ 단지, 글로써.^^

...저는 공놀이나, 등산은 매일매일 지쳐도 에너지를 쥐어짜 내며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주안점을 <반복>에 두어야 하는 일체의 운동에는 소질이 없네요. 지긋지긋한 걸 염오하는 타입이라 그럴까연?

뷰리풀말미잘 2017-08-10 10:13   좋아요 1 | URL
수철님 안녕하세여. 환란은 하루 3분 정도의 작은 규모 이상은 부담스럽습니다. 단지 글로도요. ㅠ 저는 공놀이를 엄청나게 못해요. 왜 못하는가 발이 세모인가 생각해 봤는데, 팀웍이 음슴. 한 번에 두 사람 이상이 머릿속에 안 들어옵니다. 등산도 즐기지를 못하겠더라구요. 목적지향적이라 그런 것 같아요. 빨리 해 치우고 정리해야 되거든요. 그러니 풍경도 뭣도 보이지 않죠.

그건 그렇고 책 읽다가 수철님한테 물어보고 싶은게 있었는데, 마실 한 번 나갈께요.

AgalmA 2017-08-11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뷰리풀말미잘님 글이 있네@@ ‘이별을 하고 사랑을 느꼈다는 바보처럼 몸매를 잃고 비통‘ㅋㅋ 이런 문장은 뷰리풀말미잘님 정말 잘 쓰는 듯~ 근육 키우는 작전에 버핏이 코카콜라 주식 사고 30년 기다린 얘기가 버무려 지는 것도 역시나 ㅋㅋㅋㅋㅋㅋㅋ

매일 3분 근육 운동 얘기에 환란까지 등장ㅋㅋㅋㅋㅋ
오늘 최고 웃긴 글였음요👍🏻

뷰리풀말미잘 2017-08-11 14:18   좋아요 0 | URL
그 문장 별로라고 생각하면서도 막 타이핑 한 건데.. ㅠ 구글에서 개발한 알라디너형 AI로 추정되는 분이 막 그런 말 하고 그러시면 부끄럽단 말입니다.

AgalmA 2017-08-11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말여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르잖아요. 말미잘님의 글은 앞뒤로 배경이 두루 조성되어 있어서 시시해 보일 수도 있는 문장이 재밌어지는 것^^
그런데...알라디너형 AI? 저요? 저 정도가 AI면 프로젝트 실패인 거 아녀요ㅋㅋ

뷰리풀말미잘 2017-08-12 00:54   좋아요 0 | URL
일단 튜링테스트는 통과하셨습니다. 요즘 딥러닝중인것도 확인됐구요. 게다가 아갈마님의 두번째 대문자 A가 artificial을 의미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그러고 보니 예전엔 소문자였던 것 같은데. 제 기억이 가공됐나요?) 금요일 밤이네요. 일주일 중 가장 평화로운 시간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