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쉬곤 하지.

평생 딱 한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야.

 

왕가위 , 아비정전 中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산문적이라면, 왕자웨이는 운문적이다. 베르톨루치는 설명하고, 왕가위는 속삭인다.

 

속삭인다. 속삭임은 의미가 아니라도 좋다. 누군가 팔베개를 해 주고 귀에 무슨 말인가 속살거리면, 내용이야 뭐라도 좋지 않은가. 그래서인가. 사실주의에 입각한 비평가들은 왕가위의 영화에 내러티브가 빈곤하다고 지적한다. 그들에게 왕가위는 꿈을 헤매는 몽유병 환자처럼 보인다.

 

 

아비의 독백처럼,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발 없는 새를 닮았다. 통 현실에 내려앉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왕가위는 매번 고심해서 홍콩의 가장 은밀한 골목을 섭외하지만, 누가 거기에 남아 있으려 하던가. 아비정전의 아비와 선원도, 해피투게더의 보영과 아휘도, 화양연화의 모완과 수리첸도, 떠났거나, 떠나거나, 떠나고 싶어 안달을 할 뿐. 카메라가 종종 백타산처럼 골목이 아닌 곳을 비추면 대개 그곳은 맞설 수 없는 현실에서 달아나 스스로를 유폐시킨 장소에 불과하다.   

 

골목을 홍콩의 메타포로 본다면,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의 이유도 명확해진다. 뭔가 거대한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평론가들은 은유의 기저를 파헤쳐 홍콩의 중국 귀속 증후군의 냄새를 맡았다. 심증은 중경삼림에서 통조림의 유통기한에 ‘51이 찍혀있을 때 확고해졌다. 홍콩의 반환일은 ‘71이었다.

 

  

정해진 운명의 시간을 향해 초침이 째깍거리며 임박할 때, 다만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허무한 발버둥이라도 쳐 볼 것인가. 9771일 이전의 왕가위는 후자를 택했다. 9771일 이후의 왕가위는 차라리 특정할 수 없는 모종의 공간(2046)으로, 먼 타국의 골목(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으로, 무림의 저 끄트머리로(일대종사) 달아난다. 그의 여린 감성은 중국이라는 강압적인 질서에 배치될 수 없는 보색이다. 수업 시간에 창밖의 세계를 공상하는 소녀처럼 현실에서 눈을 돌리자, 세계는 아름답고 슬픈 꿈으로 가득했다. 나도 그랬다.

 

이제, 왕가위의 맞은편에 베르톨루치를 가만히 놓아본다. 굳이 이해를 구하고 싶지는 않다. 이건 나 혼자 즐기는 인형놀이다.

 

 

#. 2

 

세상을 바꾸려 하기 전에 너도 세상의 일부라는 걸 알아야지

 

베르톨루치 , 몽상가들

 

베르톨루치는 달변가다. 단단한 현실의 바닥에 서사를 새긴다. 그의 배우들은 암막을 찢고 바로 그 시대에서 뛰어나올 태세다. 1차 세계대전 이전 이태리의 사회상을 담은 ‘‘1900’’(1976), 파리에서 시작해 파리로 녹아드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72).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일대기를 담은 마지막 황제’’(1987). 시간과 장소와 인물이 엉켜 뒤섞이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는 흙냄새가 난다.

 

그의 대표작으로 파마탱이나(영화사에서 처음으로 애널섹스 장면이 나온다. 말론 브란도가 검지손가락에 침을 발라서 마리아 슈나이더의.. 암튼, 그는 이 영화를 만들고 두 달간 구속된 바 있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BGM이 인상적인 마지막 황제를 꼽곤 한다. 하지만 나의 베스트는 순응자’(1970). 코엔형제는 새 작품을 만들기 전에 무슨 경건한 의식이라도 하는 양 스태프들과 이 영화를 나눠본다.

 

 

 

 

 

 

 

 

 

 

 

 

 

 

영화의 배경은 이탈리아 무솔리니 시기. 비밀경찰이 된 주인공은, 반독재투쟁을 하고 있는 과거의 스승 콰드리를 척살하는 임무를 받는다. 그러나 프랑스에 도착한 주인공은 콰드리의 아내를 만나고 그녀의 미모에 연심을 품게 된다. 영화가 무슨 곰탕이라고 오이디푸스 신화를 또 우려먹냐. 하지만 이 케케묵은 전략이 설득력을 얻은 것은 콰드리가 정말로 그의 영화적 아버지인 고다르의 페르소나라는 점 때문이다.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실제 고다르의 것을 쓰는 치밀함. 콰드리의 아내 안느가 고다르의 아내인 안나와 어감이 유사한 것도 물론 우연이 아니다.

 

그렇게 아버지에게 빅엿을 먹인 베르톨루치는 이 영화를 헐리우드에 팔아 좌파 영화쟁이들로부터 변절자의 월계관까지 득템한다. 이 영화 이후 그의 영상에서 두 축을 이루던 사회적 메시지와 정치적 메시지 중 후자는 허물어지는데 이를 두고 평론가 김영진은 자본주의에 몸을 팔았다며 욕을 욕을 했지만, 나는 이 영화가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누벨바그를 극복하는 분기점이라고 본다. (Nouvelle) 물결(vague)이 언제까지 새로울 것인가. 장강의 뒷 물결은 앞 물결을 밀어내고(長江後浪推前浪), 애비의 등짝은 찔러야 제 맛(一代新人換舊人)이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됐냐고?

 

“1970년 순응자가 파리에서 처음으로 상영되는 날 고다르는 베르톨루치에게 만나자는 전갈을 보냈다. 그날 밤 생제르맹에 있는 약국 앞에서 베르톨루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고다르를 기다렸다. 야바위꾼과 수상한 사람들로 가득 찬 생제르맹 주위의 인파들 사이에서 이윽고 고다르가 나타났다. 고다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종이 한 장을 손에 건네주고는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 종이에는 모택동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고 그 위에 다음과 같은 글씨가 붉은 잉크로 씌어 있었다. ‘이기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라.’ 베르톨루치는 종이를 찢어버렸다.”

 

김영진- 평론가 매혈기

 

그러나 정치성을 스스로 거세하고 자본주의와 결탁한 것이 사실이라손 치더라도 그는 부정할 수 없는 68혁명의 아이였고, 역사와 시간이라는 누벨바그의 테마에서만큼은 유리될 수 없었다. 역사상 최초로 촬영을 위해 중국 정부로부터 자금성을 빌려낸 그다. 그에게는 역사의 현장에서 고고히 흐르는 그 공기, 그 시간을 포착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 그에게 시간이란 크로노스의 진자처럼 벗어날 수 없는 절대성이다. 마르지 않는 샘은 가뭄에 진가를 드러낸다. 그것은 소나기처럼 몰아닥쳤다 사그라지는 선동적 정치보다 숭고하다. 듣고 있나, 지젝! 껍질을 다 벗은 혁명革命을 추종함은, 이미 혁명의 정신을 잃은 구태다.

 

 

#. 3

 

순간이란 정말 짧은 시간일 줄 알았는데

때로는 아주 긴 것이더군요.

그 이는 전에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죠.

이 순간부터 영원히 나를 기억하겠노라고,

그때 전 정말 기뻤어요.

하지만 이젠 난 시계를 볼 때마다

스스로에게 얘기를 하죠

그를 잊어야 한다고.

 

왕가위 - 아비정전

 

 

 

 

 

 

 

 

 

 

 

 

 

 

반면 왕가위의 시간은 순간을 탐닉한다. 그것은 스쳐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카이로스의 숨결이다. 그래서 왕가위의 배우들은 애잔하다. 금방이라도 은막 저 편으로 잔잔히 사라져 버릴 것 같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아름답다고 느끼면, 아비정전(1990)에서 아비와 수리진이 처음 만나는 장면을 떠오른다. 포마드 바른 머리로 건들거리며 나타난 아비, 처음 본 미녀에게 작업을 시도한다. “내 시계를 1분만 바라봐줄래? 1960416일 오후 3. 우린 1분간 같이 있었어. 난 잊지 않을 거야. 우리 둘만의 소중했던 1분을. 1분은 지울 수 없어. 이미 과거가 되었으니.” 이 중 2병 대사가, 무슨 주문처럼 기억 속에 들러붙어버렸다. 나도 그 대사로 죽은 장국영을 떠올린다.

 

아비정전, 한 편의 영화를 거대한 사진전으로 본다면, 그 장면은 롤랑 바르트가 언급한 푼크툼’(punctum)의 개념으로 수렴하리라. ‘기이한 세부’, ‘찌르는, 상처를 입히는, 자극을 주는, 주사위의 우연성’, 가슴을 후벼 파는 디테일.

 

 

#. 4

 

얼마 전에 어떤 여자가

술을 한 병 주었는데

술 이름이 취생몽사醉生夢死.

마시면 지난 일을

모두 잊는다고 하더군.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력 때문이라고 하지.

잊을 수만 있다면

매일이 새로울 거라고 했어.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어?

자네 주려고 가져온 술인데

함께 마시고 싶어.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마시지 않았다.

 

왕가위, 동사서독

 

치이익- 치익- 무전은 진작 끊어졌다. 여기는 집채 만 한 파도가 휘몰아쳐 오는 바다 한 가운데. 물속에는 거대한(moby) 고추(dick)처럼 생긴 고래가 도사리고 있다. 지나치리만큼 좆같은 여기는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 당신은 선장. 폭우는 며칠째 퍼붓고, 가라앉을까봐 식량도 장비도 다 바다에 내 던진 상황이다. 이제 한 70kg만 더 줄면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거 같은데, 더 이상 던질 거라고는 베르톨루치와 왕가위 뿐. 하긴, 평생 필름만 주물럭거린 영화쟁이들이 노라면 저을 줄 알겠는가. 갑판에 굴비처럼 묶여 무릎 꿇려진 채 오들오들 떠는 두 노인네를 두고 고민은 깊어진다. 문제입니다. 다음 중 누구를 바다에 던져야 할까요?

 

1. 베르톨루치

2. 왕가위

 

토실토실한게 무게는 비슷해 보인다. 미모를 보자니, 뭐 우열이랄 것도 없다. 작품을 볼까? 2046을 떠올리면 왕가위를 집어 던지고 싶지만, 그에게는 동사서독이 있다. 그렇다면 베르톨루치? 노인네, 찔끔 하는 게 귀엽다. 그래, 순응자야 말로 불후의 역작이 아닌가. , 어쩔 수 없다. 반반으로 하자. 얘들아 반반이다!

 

그렇게 배의 침몰은 막는다고 하더라도, 베르톨루치의 서사적 빼곡함을 답답해하는 자들과. 왕가위의 빈곤한 스토리를 한심해 하는 자들은 서로 화해할 수 있을까. 만약, 베르톨루치와 왕가위를 동시에 좋아하는 자가 있다면 필시, 분열적인 자아를 가졌으리라.

 

나처럼.

 

나는, 그러니까 나의 삶은, 베르톨루치와 왕가위라는 두 평행선의 내측에서, 끝내 수렴하지 않는 파장 같았다. 시처럼 살기 바라면서도 현실은 구구절절한 산문이었다. 그렇다고 현실을 떠나 오롯이 성립될 용기도 없었다.

 

Drug, Mass, Palace. 밤새 춤추고 비틀거리며 맞던 아침. 낮엔 몸 팔고, 밤에 술 팔던 날들. 공부나 해 볼까, 책상머리에 앉았다가 불법 다운로드 영화만 끝없이 보다 쓰러져 잠들던 새벽. 그래도 꿈에서는 장만옥과 연애하고 구양봉처럼 하늘을 날아다녔다. 대필로 유흥비를 충당했다. 복싱에 미쳐 살았다. 주먹이 까지고, 팔꿈치가 뭉개지고, 정강이가 작살 날 때까지 휘두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날들이었다. 어느 날인가는 내 삶 내려놓고, 변경을 지키다 조용히 잊히기를 서원했고. 또 어느 날은 다짐을 저버렸다. 외국을 떠돌 때도 잠들지 못하는 밤은 그림자처럼 질척거렸다. 아나키스트로 살기를 소원했던 소년은 재벌의 개가 되었고, 우울과 불면을 벗삼아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취해서 살고, 꿈꾸듯 죽고 싶다. 아니, 그 반대인가.

 

아니, 그 반대인가.

 

 

#. 5

    

꿈꾸는 것도 좋지만 언젠가는 깨어나야 해.

 

베르톨루치, 몽상가들

 

영화란 무엇인가. 장 뤽 고다르가 ‘1초의 24번의 진실이라고 갈파하자, 로라 멀비는 ‘1초에 24번의 죽음이라고 맞불을 놨다. 아날로그 시대의 필름영화는 지각할 수도 없는 찰나에 스물네 번 암전과 이미지를 반복하며 연결된 사진을 영상화한다. 이 양반들은 하나의 동일한 현상에 상반되는 해석을 제시했다. 그러니까 영사기는 암막에 진실(image)을 투영하는가 혹은 죽음(darkness)을 드리우는가.

 

디지털 시대로 들어오며 논쟁은 자연스럽게 종식되었다. 초당 24번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는 영화사마다 레드원 카메라를 들여오며 끝장나버린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이미지는 암전되지 않으니까. 소비에트 연방이 뜬금없이 무너진 것처럼 디지털의 시대에 고다르와 멀비의 이항대립도 맥없이 해소되었다.

 

  

나도 베르톨루치와 왕가위라는 두 평행선 바깥으로 삶을 자유롭게 놔두고 싶다. 날개를 접은 내 삶은 베르톨루치보다 낮은 곳으로 가라앉는다. 하지만 왕가위보다 높은 곳을 바라보리라. 그리고 그 곳에서 나는 혼자가 아닐 것이다. 이영도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단수單數가 아니다.” 그것이 영원히 미제로 남을 것 같던 내 함수의 해였다

 

이제, 인형놀이를 마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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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딱 두드리고 말려고 했는데, 이런저런 책과 논문들을 참고하게 됐다. 기억에만 의지해서 쓰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우선 책으로는 

 

 

 

 

 

 

호모 시네마쿠스- 68혁명과 누벨바그에 대한 부분을 참고했다. 다소 난해하나 영화의 이론과 비평, 영화의 근대사에 대한 충실한 연구서다.

 

 

 

 

 

 

 

평론가 매혈기- 다른 평론집과 차별되는 점이라면 책상물림이 아니라는 것. 진짜 김기영을 만나고, 이창동을 만나고, 베르톨루치를 만난 얘기가 쓰여있다. 베르톨루치에 대해 쓴 부분을 참고했다.

 

 

 

 

 

 

 

 

 

 

 

 

영화 사전- 공부를 할 때 그 분야의 사전 하나씩은 있어야 한다. 영화학 분야에는 이 책이 있다.

 

 

 

 

 

 

 

 

 

 

박찬욱의 오마주- 그는 감독이기 전에 평론가였다. 그의 영화에서는 서권기가 막 뿜어져 나오는데, 아크 원자로가 바로 이 책. 왕가위에 대해 쓸 때 참고했다. (그는 중경삼림에서 양조위가 비누와 대화하는 장면을 막 비웃는다. 멍청이가.) 하지만 베르톨루치에 대한 빠심만은 인정한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송강호 칼 맞는 장면은 '순응자'에서 코트리 칼 맞는 장면의 오마주다.  

 

 

 

 

 

 

 

 

 

 

영화야 미안해- 왕가위 영화평을 참고했다. 그냥 그런 영화 에세이.  

 

 

 

 

 

 

 

 

 

 

1초에 24번의 죽음-  '영화의 본질적 측면을 탐구한 영화이론서이자, 대중을 위해 쉽게 쓴 영화에세이다.' 라고 상품 설명에 써 있는데, 현실문화의 책 답게 전자만 맞고 후자는 구라다. 장담한다.

 

 

 

 

 

 

 

카메라 루시다- 롤랑 바르트의 역작. 진중권이 '교수대 위의 까치'에서 스투디움과 푼크툼을 언급해 유명해 진 듯. 하지만 절판된지 오래. 영문판 PDF는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다. 어쩔거냐. 나를 고소해라.    

https://monoskop.org/images/c/c5/Barthes_Roland_Camera_Lucida_Reflections_on_Photography.pdf 

 

 

또 뭐가 있었는데, 까먹었고..

 

 

논문으로는

 

1. 베르톨루치 영화 속의 역사와 혁명

2. 1997년 회귀를 전후한 홍콩 중국인의 문화적 정체성

3. 왕가위 초기 영화 연구- 아비정전과 중경삼림을 중심으로

4. 왕가위의 화양연화 :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

5. 홍콩 반환과 왕자웨이의 중경삼림

 

이렇게 다섯편을 참고 했다. 특히 2번 논문은 짧지만 충실하다. 97년 당시의 홍콩의 분위기와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서술해놨다.

 

 

인터넷은

 

몇몇 뉴스와 잡지 글 - 뭐 그냥 펙트 체크 용이라 링크는 하지 않기로

위키백과- 위키피디아의 왕가위와 베르톨루치. 68혁명과 누벨바그 관련.

고신의대 정신과 박시성 선생의 베르톨루치론.

그리고 이름모를 블로거들의 충실한 정리들.

 

 

영화는

 

 

 

 

 

 

 

 

 

 

 아비정전

 

 

 

 

 

 

 

 

 

 

 

 

 동사서독- 어째 오리지널이 나은 듯.

 

 

 

 

 

 

 

 

 

 

 

중경삼림

 

 

 

 

 

 

 

 

 

순응자

 

 

 

 

 

 

 

 

 

몽상가들-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한다. 몇 번을 다시 봤는지 모르겠다.

 

 

 

 

 

 

다시 본 것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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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철 2016-11-15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외우고 다녀도 좋을 문장이 몇 개 있네요?

문득 언젠가 말미잘 님이 쓴, 어떤 심경의 변화로 말미암아 페이퍼를 가급적 단출하게 적는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나는데요. 물론 그 기억을 자신할 수는 없어요. 알코올 중독에 따른 기억능력의 현저한 저하 탓이겠지요. ...길게 쓰시니 더 좋네요.ㅎ

아무튼 얼마 전에 동사서독을 다시 본 적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아닌지 어쨌든, 이 페이퍼 유용하게 읽히네요. ^^

제가 선장이라면 왕가위는 못 던질 듯.... 왜냐하면 꼭 던져야 한다면 잘 모르는 사람을 던질 듯...

농담.

뷰리풀말미잘 2016-11-15 14:57   좋아요 0 | URL
잘 쓴 글이랑 좋은 글은 달라요. 제 글은 잘 썼지만, 좋은 글은 아닙니다. 문장이 어설프고 어휘가 모자라도 좋은 글은 빛이 납니다. 제 글은 아니에요. 왜죠?

이 질문은 지금 생각한 게 아니라 언젠가 질문하기 위해 생각하고 있던 것이에요.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죠? 네?

2016-11-15 15: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15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6-11-16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 그러더군요. 장국영은 존재 자체가 낭만이었다고.
왕가위도 몽유병 환자이기에는 현실을 얼마나 많이 담고 있는지. 너무 아름다워 비현실적으로 보였을 뿐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군요.

뷰리풀말미잘 2016-11-16 10:4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아갈마님. 흥.

하얀빤쓰에 하얀난닝구 깔맞춤을 하고 맘보를 춰도 매력이 터지는 사람이었죠. 장국영에게는 뭔가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의 어떤 정서가 집약되어 있는 것 같아요. 끈적한 쿨함, 마쵸적인 낭만 뭐 그런 거. 하지만 어떤 영화를 떠올려도 연애상대로는 좀 이렇다 싶지 않은게 그를 향한 감정은 애정보다는 동경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던가 싶군요.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죠? 뭐 아갈마님이 대단히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해서 물어보는 건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마세요.. 그렇게 엄청나게 궁금한 것도 아니긴 하지만 소상히 얘기해 보세요. 흥.

2016-11-16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17 1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17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18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18 1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18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21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뇨리따 2016-11-24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미학과 신념을 전부 쏟아부어 애정하는 작가가 언젠가 한말을 인용하면 ˝예쁜건 예쁜거죠˝

파퀴아오는 영웅이었고 소위 말하는 좋은 쪽이었죠. 메이웨더는 괴물이었고 뷴명히 나쁜쪽이었어요. 둘의 자웅은 세기의 관심이었고 팬들은 좋은쪽을 전문가들은 나쁜쪽의 손을 들어줬죠. 승부는 났고 생각보다 허무하게 나쁜쪽이 압도했어요. 영웅은 제 기량과 스타일을 보여주지 못했고 악당은 항상 하던대로의 플레이로 영웅을 농락했죠. 이 악질적인 동화의 결말은 동심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았어요. 재미난건 세간에서는 본래의 스타일대로 플레이한 메이웨더를 창과 영웅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 파퀴아오보다 맹렬하게 비난했죠. 뭐, 비난은 악당의 숙명이지만요.

아마 이런 느낌일까요? 모두가 메이웨더의 복싱을 완벽하다고 평가하지만 좋은 복싱이라고는 인정하지 않는것 처럼요.
하지만 말미잘, 저는 메이웨더의 복싱을 어어어어어어어어어오어어어어어엄청나게 좋아해요. 말미잘의 글은 그 이상으로 좋아하죠. ˝복싱은 메이웨더, 글은 말미잘 처럼˝ 이 제 좌우명이죠.(아 근래들어서 복싱은 로마첸코로 바뀌었어요. 이 글의 기량으로 볼때 말미잘은 은퇴만 안한다면 한동안 자리를 지키겠네요 : )
네, 말미잘의 글은 굳이 따지자면 결코 좋은 쪽은 아니죠. 솔직히 말하면 악랄한 수준으로 나빠요. 그런데 술이든 담배든 마약이든 뭐 어디에 ˝좋아서˝하는건 아니잖아요. 그저 각자 ˝좋아서˝ 하는 것이지.

어딘가 아주 크게 뒤틀렸잖아요. 대부분 아주 어둡고, 가끔 밝아도 그 빛 뒤편의 음영을 더욱 상상하게 한달까.. 나는 그 일면 일면들이 너무 좋아요. 잡념을 헤집을때, 글로부터 단어의 나열, 문자의 연쇄 이상의 의미를 찾을수 없을때 오로지 말미잘 글만이 몰두하게 만들죠.

감히 평가할수는 없고 대신의 감상을 말하자면 예쁜건 예쁜거죠. 아아 그런데 미잘글은 예쁜건 아니랄까... 그러니까 예쁜건 고상한 아름다움과 귀여움의 혼용같은 느낌인데, 귀여움은 놀라울정도로 완벽하게 배제했달까.. 아름답기는 해요. 근데 그중에서도 아주 진득한 퇴폐미 같은게 묻어나온달까.. 세상 예쁘고 좋고 밝고 발랄한것들을 전부 부정하는 힘이 있달까 ㅋㅋㅋㅋㅋ 그러고 보면 확실히 좋은 글은 아니네요.

하지만 언제까지고 보고싶은 글이에요.
가장 사랑하는 글이에요. 제 미학을 확고히 하는 글이에요.
아 나는 이런글이 좋구나 느끼게 하는 글이에요.
프러포즈는 아니에요.
그치만 이런게 punctum 인거죠?

뷰리풀말미잘 2016-12-13 22:34   좋아요 0 | URL
안녕, 세뇨리따님.

복싱이란 완전무결하기 얼마나 어려운 운동입니까. 그러나 드물게 그런 자가 있죠. 천부적 재능과, 영혼까지 짜 내는 노력과, 축적된 노하우가 두루 갖춰져야 10년에 하나쯤 나타나는 그런 자들. 메이웨더처럼요. 이 자의 복싱은 아름답습니다. 대나무처럼 낭창낭창한 탄력은 타고난 것일 테고. 노력이야 두말 할 나위도 없고, 아버지와 삼촌이 축적한 테크닉도 물려받았죠.

파퀴아오는 영웅입니다. 인정해요. 그러나 메이웨더를 악마라고 부르든 뭐라고 부르든 그 앞에는 ‘영웅 이상의’라는 수식어가 생략되어 있는 겁니다. 이기는 복싱이 좋은 복싱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좋은 복싱이죠? 네, 저도 메이웨더 빠이지요! ㅎㅎ (하이파이브 타이밍인 듯.) 로마첸코의 복싱은 저도 관심 갖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뭐라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엄청난 테크니션이더군요.

제 글이 메이웨더의 복싱과 같은 선상에서 얘기되는 건 넌센스죠. 그게 세뇨리따님의 개인적인 감상이라고 해도 좀 부끄럽습니다. 그와 비견될만한 글쟁이라면 노벨문학상, 맨부커상, 퓰리쳐상 3관왕정도는 해 줘야되는 거 아닙니까?

저는 글보다는 복싱이 쪼금 나은 것 같아요. 더 하고 싶기도 하고요. 이빨이 깨지고, 코가 부러지고, 눈도 어두워졌지만 여전히 그렇습니다. 로이 존스 주니어가 은퇴하기 전에 붙어볼 수 있다면 평생 섹스 따위는 못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세뇨리따님, 그간 저는 여행을 다녀왔답니다. 세뇨리따님이 글을 남기신 그 새벽에는 아무도 없는 외국의 첩첩산중에서 몰아닥치는 비바람과, 꼭 그만한 크기의 우울과 이제는 친구같은 불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제 팔자 제가 꼰다는 말이 딱이죠. 네, 저는 꼬였어요. 그것도 아주 많이. 그걸 풀어가는게 제가 인생에서 해야 할 일인 것 같아요. 여하튼 그런 고로 댓글을 이제야 달고 있습니다. 안부도 늦었네요. 기체후일향만강하신지요?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듣고 싶습니다.

아, 제 글을 예쁘게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프로포즈라면 더 좋았을 텐데 이 점은 좀 아쉽고요. 그보다, 세뇨리따님은 늘 쓰고 계신가요? 저한테 안 보여주실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쓰기를 멈추신 건 아니겠죠?

2016-12-09 1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09 20: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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