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꿨다.
#. 1
수용소였다. 섬인 듯 했다. 그 곳에서 자의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오래된 학교처럼 아무 인상도 없는 무뚝뚝한 시멘트 건물 여러 동이 듬성듬성 있었다. 수용된 자들은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았다. 그들 중 어린아이나 노인이 아닌 자들은 모두 노역에 동원되었다. 대여섯 명에 한명 씩 감시자가 붙었다. 나는 순응적인 인간이었다. 소처럼 일했다. 구령을 넣어가며 삽을 떴다.
노역이 끝나고, K가(잘 아는 사람이다) 수용소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나는 먼발치에서 K를 발견하고 뒤따라갔다. 반갑게 인사를 할 요량이었던가. 하지만 나보다 먼저 그를 맞이한 건 불량한 패거리였다. K는 후미진 곳으로 끌려가 잔혹하게 폭행당했다. 나는 숨어 그 모습을 봤지만, 나서지 못했다. 녀석들이 자리를 뜨고, 비척이며 일어선 K는 의무실로 갔다. 나는 시간이 한참 지날 때 까지 그 앞에 나타날 수 없었다.
며칠 지났던 것 같다. 내가 의무실로 찾아갔을 때, K는 병상에 앉아있었다. 내 얼굴을 본 K는 울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누나가, 누나가 나쁜 짓을 당하고 있어.”
K의 친누나, R(역시 잘 아는 사람이다)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를 추슬러 앞세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인가. K는 나를 멀리 떨어진 구석의 창고로 데리고 갔다. 창고는 오래된 학교의 목공실처럼 생겼다. 쇠사슬로 대충 양쪽 문고리를 감아 놓은 철문 앞에서 전의 그 패거리가 비쭉 열린 틈으로 걸레자루 같은 것을 쑤석거리고 있었다.
뭐지. 나는 최대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내가 본 것은.
나체로 개처럼 엎드린 R의 나신이었다. 그녀는 정신이 붕괴된 듯 했다. 온 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고, 혈관이 좁아져 손발이 차가워졌다, 아드레날린이 폭발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한 녀석이 철문을 기어올라가 위에서 R을 내려다 봤다. 어느새 나는 녀석의 바지춤을 잡고 맨 땅에 내리꽂고 있었다. 시멘트 바닥에 처박혀 으깨진 녀석을 걷어차고 짓밟았다. 아무런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을 때 까지.
걷어차는 발에 생기가 걸리지 않자, 잊고 있던 공포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사람을 죽였다.
어느새 다른 녀석들은 도망가고 없었고, K는 멀찍이서 질려 떨고 있었다. “잘 들어, 너는 이 자리에 없었어. 이쪽으로 걸어가. 넌 그냥 걷고 있었던 거야. 알겠니?” 나는 K의 등을 떠밀어 창고의 반대편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가 걸어 간 반대 방향을 따라갔다. 다리가 풀려 걷기가 어려웠다.
#. 2
곧, 지나가던 소녀를 만났다. “얘, 저기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는 것 같아. 누군가에게 알려야 할 것 같은데. 내가 다리가 불편하구나.”
소녀는 그 쪽으로 다다다 뛰어가더니 널브러진 녀석을 먼발치에서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다시 나를 앞질러 뛰어갔다. 소녀는 말 할 사람을 찾으러 두리번거렸지만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하고 오래된 분교처럼 생긴 수용동으로 들어갔다. 그 복도를 뛰어가 직원인듯한 여자에게 사람이 죽어있다고 말 했다.
그 순간 아이의 엄마인 듯한 여인이 아이를 낚아챘다. 여인은 표독스러웠다. 그것은 곤궁한 삶에서 맨 손으로 활로를 헤집어가며 단련된 날카로움이었다. “너 그 얘기 누구한테 들었어.” 아이는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손가락을 펴 나를 지목할 새도 없이 아이의 엄마는 화를 발칵 냈다. “이 미친년아, 니가 왜 그걸 말하고 다녀!”
그녀는 정확하게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 나는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내 입으로 말 할 수 없어 소녀를 이용했다. 그게 사실이다. 이제 마음이 급해졌다. 지목당하기 전에 이 복도를 빠져나가야 했다. 복도는 길었고, 소녀는 재빨랐다. 날 찾아 이쪽으로 곧장 달려온 소녀는 놀라운 탄력으로 뛰어올라 멱살을 그러잡고 빽 소리를 질렀다. “이 씹팔새끼가 나를 속여!” 악을 쓰는 소녀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모로 돌리고 소녀를 떼어내려고 했지만, 완력이 여간한 것이 아니었다.
그 작은 손아귀에서도, 허름한 수용동에서도, 알 수 없는 섬과 그 기묘한 세계에서도 나는 도망칠 수 없어 전전긍긍했다.
새벽 다섯 시 십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