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의 영시 번역 비교
#. 0
For the moon never beams without bringing me dream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the stars never rise but I see the bright eye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so, all the night-tide, I lie down by the side
Of my darling, my darling, my life and my bride,
In her sepulchre there by the sea--
In her tomb by the side of the sea.
-'애너벨 리' 중에서-
#.1
사이러스님이 에드거 앨런 포의 영시번역을 비교하는 포스팅을 쪘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 모든 번역은 어차피 틀렸다. 원전과 1:1로 대응할 수 있는 역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고전 번역은 늘 새로워야 한다. 그 시대의 지성과 감성으로 원전을 해석하여 감수성을 새로 드러내고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과정에서만 진리는 이따금 반짝거린다. 그것은 역자들에게 시지포스의 형벌과 같은 숙명이다.
내가 보기엔 네 수의 시 모두 각각의 문제가 있다. 특히 마지막 김정환 시인의 번역은 엉망진창이다. 생각은 갸륵하나, 그럴 거면 굳이 번역은 왜 하나? 옆에 네이버 사전 링크나 해 두지.
보기에 껄끄럽다면 그 때가 새 번역을 해야 될 때다. 영어전문가 김늘보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포스팅을 읽고 내게 뜬금없이 세 편의 시와 링크를 보냈다. (그는 요즘 들어 서재를 눈팅하는 듯하다. 나는 과문하여 사이러스님의 위명을 미처 알지 못했다.)
#. 2
다음의 세 편은 늘보의 번역이다.
1.
내가 꾸지 않으면 달은 결코 빛을 내지 않기에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내가 보지 않으면 별도 결코 떠오르지 않기에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눈을.
그리하여, 모든 밤의 조류에 실려, 나는 그 곁에 눕네,
나의 그대, 그대, 삶, 신부의 곁을,
저 바닷가 그녀의 무덤 속에서--
바다 옆 그녀의 묘지 속에서.
2.
달이 빛나는 것이란 내가 꿈을 꾸는 것이기에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별이 뜨는 것이란 내가 빛나는 눈을 보는 것이기에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눈을.
그리고 그리하여, 온 밤의 조류에 실려, 나는 그 곁에 눕네
나의 그대, 그대, 삶. 내 신부의 곁을.
저 바닷가 그녀의 무덤 속에서--
바다 옆 그녀의 묘지 속에서.
3.
달이 빛난다는 것은 꾸는 것과 다름이 없기에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별이 뜬다는 것은 보는 것과 다름이 없기에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눈을.
그리하여, 온 밤의 조류에 실려, 나는 그 곁에 눕네
나의 그대, 그대, 삶, 신부의 곁을,
저 바닷가 그녀의 무덤 속에서--
바다 옆 그녀의 묘지 속에서.
늘보에 따르면 1의 번역은 의역이다. 그러나 1, 2, 3모두 네 사람이 번역한 것보다 직역에 가깝다. 또 포가 의도한 운율을 다 맞췄다고 한다. 그것이 본늘 번역의 장점이란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영어와 모국어를 깊이 이해하고, 절제된 언어로 시의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질 수 없지. 나도 한 수 거들었다.
내가 꿈꾸지 않으면, 달은 빛을 내지 않기에,
아름다운 에너벨 리의 꿈을;
내가 빛나는 눈을 보지 않으면, 별은 결코 떠오르지 않으니,
아름다운 에너벨 리의 눈을;
그리고, 모든 밤의 밀물, 내가 곁에 누울 때
나의 달링, 나의 달링, 나의 삶 나의 신부
바다 곁 그녀의 무덤가에서--
바다 곁 그녀의 묘지에서
내 번역의 단점은 1, 2행의 쉼표를 영어식의 도치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데 있다. 한국어에서는 도치를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어색하다. ‘달링’은 ‘그대’로 굳이 번역하지 않고 원문 그대로 놔뒀다. 달링은 달링이니까. 그 달착지근한 뉘앙스를 가진 단어가 우리말에는 없지 않은가.
나의 발번역을 본 늘보는 쿠사리를 놨다. 특히, "never ~ but(without)의 의미는 그 자체로 시적이기에 잘 생각하고 번역해야 한다”고 했다. 예컨대 ‘It never rains, but it pours’라는 속담은 대개 ‘나쁜 일은 혼자 오지 않는다.’로 의역된다. 그런데 그것의 실제적 의미는 ‘비는 절대 살살 오지 않는다. 쏟아진다.’다. 뉘앙스를 살려 해석하면 ‘세상의 비란 비는 죄다 쏟아지는 것뿐이다.’ 늘보는 이 속담이야말로 세상에 rain을 동사로 쓰는 경우는 없다는 선언과 같다고 했다. 이 문장에서 모든 상황을 설명하는 단어는 pour(쏟아붓다)다.
같은 맥락에서 ‘They never meet, but they quarrel.’이라는 문장을 네이버는 ‘그들을 만나면 꼭 다툰다’로 해석한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는 ‘그들에게 meet이란 행위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마주하는 일반적인 meet의 상황이란 오로지 quarrel밖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의 3행은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나의 별은 그녀의 눈 뿐.”
모든 해석은 이 뉘앙스 위에서 노닐어야 한다는 것이다.
#. 3
그레이트 개츠비를 원서로 읽고 있다. 전에 읽었을 땐 큰 감흥이 없었는데, 최근에 문학동네에서 나온 김영하의 번역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옮긴이에 말에 기존 번역들을 디스했다. 개츠비를 원서로 읽으면 생동감이 넘치는데, 한국어 판본을 보면 빡빡하게 느껴지며, 이것은 모두 번역이 거지같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래서 자신이 그런 부분을 위해 번역을 하게 됐다는 것. 한 번 확인해보고 싶어지는 거다. 정말 그런가?
막상 원서를 읽어보니, 이건 뭐 다른 책이다. 장중해야 할 소설의 뉘앙스가 가벼운 어휘로 부서져있다. 피트제럴드가 성 베드로 성당을 그려놨다면, 김영하는 그걸 보고 여의도순복음교회처럼 옮겨놓은 격. 한마디로 김영하의 개츠비는 기품이 없다.
나는 그래서 의심하게 됐다.
원서를 읽지 않고 개츠비를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특히 개츠비처럼 감정선이 섬세하고 복잡한 소설들, 예컨대 하루키라던가. 다니엘 글라타우어 같은 작가들의 소설을 나는 정말 읽었다고 말 할 수 있을까? 그 소설들을 읽은 감동의 정체는 작가들의 의도와 사맞디 아니하는, 다만 기표의 영감을 받아 내 마음 속에 마구 지어낸, 뜨거운 의미의 덩어리들인지도 모르겠다.
#. 4
어차피 틀렸다.
영어전문가인 김늘보도 30분 만에 자신의 번역을 후회했다. But의 용법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시든 번역이든,
틀려도, 끝내 고쳐 쓰는 것이 문장이 아닌가. 어쩌면,
그게 아름다워서 문장은 예술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