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 시대 -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
주경철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 1

 

고대인들은 바다를 동경했다. 푸른빛으로 넘실거리는 미지의 평원.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그들은 밤낮으로 노를 저어도 끊임없는 그 망망한 대해를 이야기로 채워서 딛고 건넜다. 빛도 닿지 않는 심해 깊숙한 곳에 플라톤은 아틀란티스라는 이데아를 지었고, 조선인들은 용궁이라는 무릉도원을 상상했다. 어느 갑판장은 꾸벅꾸벅 조는 부하들을 깨우기 위해 선원을 유혹하는 세이렌의 이야기를 지었고, 안데르센은 인어공주가 거품처럼 사라지는 로맨스를 꿈꿨다.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온갖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 자들에게 마침내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던가. 바다로 툭 튀어나온 호기심의 부두에서 세계로 닻을 올린 사람들이 있었으니, 15세기, 근대가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시절이었다.

 

1405년 명나라의 정화가 황제의 명을 받아 3500척 대 선단에 금은보화를 가득 싣고 아프리카에 이르는 여정을 시작한 이래, 유럽의 항해자들은 지중해를 거미줄 같은 상업 네트워크로 엮었고,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마다가스카르와 홍해, 인도까지 항로를 개척했다. 영국의 은괴는 인도의 목면과 교환되었고, 일본의 비단이 네덜란드의 면직물과 거래되었다. 프랑스의 미식가들은 매콤한 아랍산 후추에 열광했고, 중국의 가난한 마을은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고구마와 옥수수로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생태계가 뒤섞이고, 문화가 교류되자 잠들었던 세계가 꿈틀거렸다. 바야흐로 대항해시대의 시작이다. 
 
물론 바다가 늘 낭만적인 것은 아니라, 항해마다 10~20%에 이르는 항해자들이 질병과 사고로 물고기 밥이 되었다. 노예무역선의 끔찍함은 아우슈비츠 이전까지 가장 어두운 역사의 그늘이었다. 노예들은 햇빛 한 점 얻을 수 없는 퀴퀴한 선창, 관처럼 답답한 공간에 묶여 절망적일만큼 처절한 뱃멀미와 충격적으로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몇 달이 넘는 항해를 견뎠다. 항로가 뒤엉켜가는 동안 로망의 바다는 어느새 욕망으로 물들었고, 지구 반대편의 대자연과, 막대한 천연자원과, 원주민들의 생활은 서구인들이 지니고 온 총과 질병으로 파괴되었다. 어느 시대에나 야만은 있었을 것이나, 이제 그 야만은 지구적인 규모로 확장된 것이다.

 


#. 2

 

저자는 그간 역사학의 주류였던 대륙-농경 문화적 관점과 유럽 중심주의적 사관에서 벗어나 소외되었던 근대 해양세계의 발전에 주목한다. 바다를 통해 광대한 네트워크를 개척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바다에서 쓰여 바다로 돌아간 줄 알았던 해양의 역사를 451건의 참고문헌을 들춰 재구성한다. 오랜 시간 침묵하던 역사학 좌현의 노를 추슬러 ‘지구사’로 저어간다.

 

그 시대 유럽의 배들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돛을 꼿꼿이 세우고 끝없이 국경을 넓혀나갔다. 그 최전선에서 문명과 문명, 선단과 선단, 국가와 국가가 격돌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유럽세력은 세계를 근대라는 이름의 새로운 질서로 편입시켰다. 세계인들은 서구의 과학기술이 가져다 준 다소의 편의를 얻었으나, 영영 소박한 삶을 잃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결과로 우리는 에티오피아산 커피를 마시며,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음악을 듣고, 유럽의 미술을 감상할 수 있게 됐다.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라는 가치판단을 떠나 인류의 태동 이래 이제까지 없었던 차원의 삶을 우리는 직면하게 된 것이다.

 

여기는 어딘가. 또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저자는 이 책의 목표를 ‘지구사’의 서술이라고 적었지만, 궁극적인 관심은 ‘지금, 여기’에 잇닿아 있을 것이다. E.A 카가 말 하듯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아니던가.

 

나침반 이전의 항해자들은 배 뒤로 부표를 던지고 배가 멀어지는 속도와 방향을 가늠해 지도상에서 현재 위치를 짐작했다고 한다. ‘대항해시대’는 저자가 근대로 던져 놓은 부표.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으리라. 

 

 

#. 3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구름 낀 하늘을 태양석으로 관측하며 목적지를 가늠하는 바이킹이었다. 가업으로 포르투칼어 사전을 편찬하는 17세기 일본의 청년이었다. 악명을 떨치는 카리브해의 해적이었다가, 리버풀의 노예상인과 사랑에 빠진 이국의 노예였다. 동인도 회사의 폭정에 맞서 칼을 쥔 필리핀의 농부였고 이를 앙다물어 이끼가 가득한 오크통의 물을 걸러먹는 포르투갈의 뱃사람이었다. 매일 밤, 책을 펼 때마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읽는 내내 행복했다.

 

이제, 돛 내리듯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4-08-21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업으로 포르투갈어 사전을 편찬하는 17세기 일본 청년이라니... 멋지다..노예상인과 사랑에 빠지는 이국의 노예라니...아 낭만적이야..♡

뷰리풀말미잘 2014-08-21 10:58   좋아요 0 | URL
이 글의 포인트는 제가 참고문헌을 일일이 세 봤다는 겁니다. ㅋㅋ 451개를.

다락방 2014-08-21 11:26   좋아요 0 | URL
저는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로 글을 읽었네요? 엉뚱한 데에 꽂히고 ㅎㅎ

뷰리풀말미잘 2014-08-21 11:33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런것도 몰라요?

2014-08-31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9-01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봄밤 2014-09-01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어...
봄밤이 어제부터 12번째 쓰고 베끼고 있는 글입니다.

"헤테로토피아"의 한구절을 적어요.

...당신은 배가 왜 우리 문명에서, 16세기 이래 지금까지 가장 거대한 경제적 수단(이는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아니다)인 동시에 가장 거대한 상상력의 보고였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배, 그것은 전형적인 헤테로토피아이다. 배 없는 문명에서는 꿈이 고갈되고, 정탐질이 모험을 대신하며, 경찰이 해적을 대체하고 마는 것이다. p. 58

"헤테로토피아"를 보고 "원피스"가 생각났고, 이 구절로 "대항해 시대"를 만납니다.

더불어 망망대해에서 뷰말님을 만나고요! 얍


뷰리풀말미잘 2014-09-02 08:18   좋아요 0 | URL
헤테로토피아를 열 두번...? 헐.

제가 무식해서 배를 헤테로토피아라고 생각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전 솔직히 아무리 번역을 잘 해놔도 프랑스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못 알아듣겠어요.) 최근의 크루즈선이 바로 물질문명이 가진 유토피아적 이상을 구현한 배라는 생각은 드는군요. 그 자리를 떠나고 나면 물결밖에는 남는 것이 없으니 정말, 원어의 의미처럼 ou아무것도 없는+toppos장소.

전 원피스는 읽다 말았지만, 대항해시대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봄밤 2014-09-02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단순히 배를 떠올린것에 지나지 않았어요. 뷰말님 글로 이해를 쌓아요. 이 책은 무척 얇고, 저는 글이 시 같아서 더듬거렸습니다. 리뷰만으로도 읽고 싶은 책이에요. 기억하고, 찾아볼게요.

뷰리풀말미잘 2014-09-02 14:58   좋아요 0 | URL
즐거운 시간이 되실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