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내가 이 집을 일년을 지낼 보금자리로 채택 한 것은 집이 예쁘거나 대단한 사용자 편의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일단 집세가 좀 싼 편이었고, 내 방 스크린만 걷으면 스무 발자국 거리에서 브리즈번 강이 도도한 자태를 뽑내며 유유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에게 강변에서의 삶은 로망이다. 이건희와 신춘호가 이태원에 수백억짜리 고래등 같은 집을 지어놓고 한강이 보이네 마네 송사질 하는 꼬라지만 봐도 알 법 하지 않은가. 심지어 김소월은 이렇게 노래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이역만리 타국의 낮선 도시에 떨어져 눈물젖은 빵으로 곯은 배를 채우며 뒷골목을 전전하던 시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던거다. 그래, 그 좋다는 강변나도 한번 살아보자

 

왜 그랬을까?

 

씨발.


 

#. 2

 

하상계수河狀系數란 강의 특정 지점에서 최대 유량과 최소유량의 비율을 말한다


1에 가까우면 하황이 양호해 강의 범람이 적고. 1에서 벗어날수록 하황이 거지같아서 범람은 잦다. 세계 주요 강의 하상계수는 다음과 같다. 한강 1 : 393, 낙동강 1 : 372, 금강 1 : 299, 나일 강 1 : 30, 앙쯔 강 1 : 22, 라인 강 1 : 8, 콩고 강 1 : 4. 한강에 왜 잠수교가 있는지, 왜 라일강 유역에서 문명이 발생했는지 대충 알 법 하지 않은가. 브리즈번강의 하상계수야 내 알바 아니나, 사철 건조하고 기후변동이 심하지 않은 이 나라의 특성상 한강 보다는 콩고강과 비슷한 입장에 있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

 

대한민국은 대표적으로 하상계수가 높은 나라에 속한다그런 전차로 대한민국의 거주양태는 대체로 강 기슭에 집을 짓지 않는 형태로 발달했지만, 이 곳 퀸즐랜드는 아주 그냥 강가엔 빈 곳이 없이 빼곡하게 집을 짓고 요트를 끌어다 놓고 매일같이 낚시질에 카약질을 즐기는 자들로 가득한 것이다. 혹시 이런 나라도, 카약정도는 한번 쯤 타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내가 이 동네에 방을 구한 배경철학이다.

 

일 주일 전이었던가. 옆집 폴네가 이사한다고 일손 보태러 간 자리에서 그래도 혹시나, 살풋 홍수에 대해 염려했을 때, 강 건너 사는 로드니가 그랬다. “푸핫, , 너 걱정도 팔자다. 내가 여기 20년 살았는데 홍수나는 거 딱 한번 봤다. 재 작년에. 뭐 그땐 난리도 아니었지만, 이제 그런 홍수 보려면 또 20년 쯤은 걸릴껄?.”

 

그리고, 딱 세 시간 전, 로드니는 갈리아 원정에 출정하는 로마 병사같은 얼굴로 내 방문을 두드렸고 결연한 태도로 방수포를 빌려갔다.

 

지금 우리 집 앞 브리즈번 강은 전례없는 하상계수를 기록하고 있다. 

 

한 마디로, 턱밑까지 물 지옥이라는 말이다.


 

 


 

 


 

 

물과 땅이 거의 같은 높이다. 



#. 3

 

노아의 방주, 길가메쉬 서사시, 북미 인디언의 전승 등 세계 각국의 홍수설화는 실제로 세계를 휩쓴 대홍수에 대한 인류사적 트라우마가 아니다. 그런 상상은 평생 콘크리트 건물에 살아 물 무서운 줄 모르는 퇴마록 작가의 것. 아마, 홍수 설화의 진정한 의미는 각 민족-부족 집단의 집단 무의식 원형(archetypes)으로, 간단하게 말하면, 사람은 어디에 살든 물을 두려워하게 되어있다는 반증에 가까울거다.  


노자의 말대로 천지天地는 불인不仁하다또한 과학과 기술의 발달과는 아무상관 없이 인간은 자연 앞에 무력하다.

 

몇 년 전, 어느 산기슭,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던 날 새벽 세시 반, 등이 축축해서 일어나 보니 텐트의 절반 이상이 침수되어 있었고, 아직 가까스로 침수되지 않은 코딱지 반만 한 그 공간에서 나와 이름이 같은 그 녀석이 퀘퀘한 체취를 풍기며 자고 있었다.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었다. 그칠 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잠을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결국, 나는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고 젖은 몸으로 냄새나는 그 녀석과 포개져 다시 잠이 들었던 것이다. 아, 나의 암울한 흑역사여.

 

2009년,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물바다로 만들었을때, 살아남은 자들은 당혹감에 휩싸였다. 물에 휩쓸려 죽고, 집이 떠내려간 것도 억울한데, 평생 문제없이 써 온 와이파이며, 전기며, 심지어 수도까지 끊길지 누가 알았겠는가. 물 지옥에서 물을 구하지 못해 목이 마르는 아이러니. 어느 학교에 마련된 임시 구호소에서 상하수도가 끊기자 차마, 누군가의 응가 위에 본인의 응가를 쌀 수 없어 곡기를 끊고 일주일간 구조대를 기다린 어느 아가씨의 주옥같은 일화가 옷고름을 적신다.   


조금 전, 캐리어에 짐을 담아 2층으로 올렸다. 브리즈번 시에서 제공한 기상 레포트에 따르면, 나는 아마 오늘 밤, 침대도 없는 쪽방에서 냄새나는 세바스찬과 뒹굴고, 새뮤얼 녀석의 똥 위에 내 똥을 갈무리해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공산이 클거다. 아, 착하게 살았건만..


천지는 불인하다.

 

 

#. 4

 

이것이 바로 호주 기상청에서 제공하고 브리즈번 시청에서 정리한 홍수 예상 보고서다. 우리집이 바로 노르만 파크 Gillan ST 57번지. 보고서에 따르면 내일 오전 11시에는 모든것이 결딴이 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구해줘!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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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3-01-28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행을 유머로 승화시키셨으니, 웃어도 되나요?... 하기엔 상황이 심각하네요. 위로도 구호도 못해드리니, 같이 브리즈번 하늘에 욕이나 해드리겠습니다. #!$#$ㅒ%ㅆ$ㅒㅛ^&%*ㅕ*(

뷰리풀말미잘 2013-01-28 20:09   좋아요 0 | URL
나중에 ARS 수재민 성금 나오면 한 통화 부탁드려요.. ㅠ_ㅠ

Mephistopheles 2013-01-28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장동물은 물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뷰리풀말미잘 2013-01-28 23:05   좋아요 0 | URL
뭡니까 이 조교느낌은? 사랑하는 애인 이름이라도 외치며 저 강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 같은 이 퓔링은? 네?

Mephistopheles 2013-01-29 00:0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제대로 각잡고 읽으면 충분히 그리 느끼기도 하겠군요. (3번 올빼미 애인있습니까?)

뷰리풀말미잘 2013-01-29 00:18   좋아요 0 | URL
다행히 아직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 영화 생각나네요. 이승희의 '물위의 하룻밤'이라고. 마침 요즘 잘 때 누드로 자는데. 오늘 그 영화 클라이맥스 씬 찍을일 생기지 않을까 싶어요.


Mephistopheles 2013-01-29 01:52   좋아요 0 | URL
아..미치겠습니다. 왜 에로티즘적인 생각보단 수달혹은 해달이 물 위에 누워 조개 탁탁 두들겨 깨먹는 상상이 되는건지..

뷰리풀말미잘 2013-01-29 10:40   좋아요 0 | URL
민물에 조개는 없더군요.

blanca 2013-01-29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집 사진이 어디 인터넷에서 퍼 온 사진인 줄 알았습니다. 저런 곳에 사시다니 부럽네요. 하지만 홍수 위험이 큰 일이네요. 무사히 넘어가시기를...

뷰리풀말미잘 2013-01-29 10:39   좋아요 0 | URL
비오면 물에 잠긴다는게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