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내 지난 2년이 남긴 부산물은 골판지 박스로 두 박스였다. 몇 개의 문서를 파쇄하고, 또 약간의 쓰레기를 정리하자 약간의 의류, 한 뭉텅이의 책, 이런저런 도구 같은 것들이 남았다. 생각보다 많은 양이다. 차 조수석에 몽땅 싵고 지하주차장을 빠져 나왔다.
표 받는 말 잘하고 인상 좋은 언니가 그런다.
“오랫만이에요. 환경 때문이었어요 기름 값 때문이었어요?”
그녀와는 가끔 뒷 차가 없으면 차 세워놓고 짧은 한담을 나누기도 했는데 그게 오래 되니까 왠지 친근하게 느껴진다. 늘 그렇듯이 그녀는 안부를 물어준다.
“둘 다요. 그런데 한 2:8쯤.”
그녀가 깔깔 웃는다.
“오늘은 옆에 뭘 잔뜩 실었네요?”
“짐 정리했어요. 오늘이 마지막이거든요.”
뭐 하러 그런 걸 얘기했을까.
“어머 섭섭해서 어떡해요.”
섭섭해 하지 않아도 될 걸 괜히 섭섭하게 만든 것 같아서 미안했다. 별 말 없이 그냥 지나 갔으면 자연스럽게 잊혀졌을 것을. 그 동안 음료수 하나 챙겨주지도 못한 것도 괜히 미안하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더듬거리는데 마침 뒷 차가 빵빵거린다. 반사적으로 엑셀을 밟았는데 허파에 들었던 숨이 확 쏠리면서 말이 아무렇게나 튀어나온다. “먼저 갈게요.” 다급해서 뱉어놓은 말이지만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그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닌데 먼저 가긴 뭘 먼저 가냐.
하던 일이 끝났다. 아마 거기에 남은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두세 번 더 들르면 평생 다시 갈 일은 없을 거다. 돌아보면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후회도 없다. 할 만큼 했고, 그만하면 됐다.
그래서 1월 까지는 아무 일도 없다. 2월초까지도 거의 한가하지 않을까 싶다. 책 읽고, 가끔 운동하고,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과 술 마시고, 기회가 되면 여행도 가 볼란다. 아마 향후 5년간은 내 인생에서 다시 누리기 힘든 호사일테니까.
그런데 잘못 먹은 생선가시처럼 영 걸리는 건 내 어설펐던 그 마지막 인사. 아, 그것만은 뭔가 개운치가 않다.
#. 2
내 낡은 노트북 모니터가 자주 나간다. 그러면 재부팅을 해야 하는데 덕분에 하던 작업을 두어 번 날려먹었다. 빈도가 더 잦아진다면 조만간 새 놈을 들여야 할 것 같다.
이 노트북을 버리고 새 놈 들이는 것을 생각해본다. 새것은 헌 것을 대체하고도 남음이 있겠지만 왠지 약간은 쓸쓸한 마음이 들 것 같다. 그게 정일까? 하지만 무생물에 정을 줄 수 있나? 있다면 그건 생물에 주는 정이랑 뭐가 다른 걸까? 또 이건 갑자기 궁금해 진 것인데 소중한 생물을 잃어서 나는 눈물과 소중한 무생물을 잃어서 나는 눈물은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문득 내가 잃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영원히 사랑할 것 같았던 그녀, 아직도 시골에 가면 주머니에 용돈을 쿡 찔러 줄 것 같은 죽은 할아버지, 내 손으로 묻었던 죽어서 딱딱해져 버린 토끼와, 아직도 체취를 기억하는 내 강아지 비비.
비비를 잃었을 때 나는 꼬박 열 두 시간을 울었다. 누구 말처럼 방 문짝을 청테이프로 발라놨다면 나는 내 슬픔에 익사했을지도 모른다. 어린 나는 그날 뭘 잃는다는 감정에 대해 배웠다. 내 배 위에 올라앉기를 좋아했던 토끼가 죽었을 때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모종삽을 잡았다. 토끼를 묻고 이틀은 말도 못하게 우울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이상하게 슬펐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고, 그녀를 보낼 때 나는 단지 차갑게 돌아섰다. 어쩌면 이별이란 숱하게 많은 것이고 눈물은 한정적인 것이라 사람에게 슬픔은 학습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로 유명한 가수 예민은 시골 분교를 돌며 아이들과 노래부르는 봉사활동을 하는데 TV에서 보니까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그가 학교를 떠날때가 되면 아이들은 '또 올거죠? 또 올거죠?' 하고 매달리는데 그는 꼭 그렇게 답한다. '아니 우리는 다시 만나기 힘들거야.' 왜 그러냐고 묻는 애들에게 그는 그랬다. '그게 인생이니까.' 그때는 피식 웃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말은 애들에게 노래보다 더 많은 걸 가르친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나는 만난 모두와 헤어졌고, 또 헤어질 예정이다. 이 곳에서도 숱한 서재가 문을 닿았고 또 다시 열지 않는다. 아마 나도 언젠가 어떤 이유에서건 더 글을 올리지 못하는 순간이 올 것이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알라딘도 예전 PC통신 업체들이 그랬듯 있었는지도 모르게 사라질 거다. 열반경의 그 유명한 구절대로 '모인 것은 흩어지기 마련'이니까.
#. 1
얼마전에 루리가 키우던 사루비아 한 송이가 말라버렸다. 아무리 물을 부어도 다시 살아나지 않으니까 표정이 영 어둡다. 쉽게 정 주지 못하던 애가 그러는 걸 보니까 어쩐지 나도 좀 마음이 안 좋았다.
“어차피 모이면 흩어지게 마련이야. 회자정리라고 들어는 봤냐 이 어리석은 놈아.”
내 말을 듣고 있던 루리가 한숨을 폭 쉬더니 별안간 내 복부를 가격한다. 기습에 배를 부여잡고 무너지는 나를 휙 지나치며 중얼거리는 루리.
“이런거?”
숨을 몰아쉬며 비척비척 일어나는데 어느새 사루비아를 쓰레기통에 던지고 온 루리가 씩 웃는다.
“어라? ‘거자필반’이네?”
다시 내 복부로 날아드는 치명적이고 담백한 호선.
맞다. 회자정리의 다음 구절은 '거자필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