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올해 11회째를 맞는 세계 최대 규모의 여성영화제다. 출품작들의 평균적인 퀄리티는 말 할 것도 없이 훌륭하고 세계 각국에서 날라온 게스트들도 모두 저명한 인간들 뿐이다. 어찌나 저명한 사람들이 들끓는지 임권택을 구경하러 가는 길에 안성기 발에 걸려서 비틀거리다 공효진이랑 어깨를 부딪힐 지경이다. 심지어 토쿄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 오타케 요코와 한국의 월드스타 강수진은 우글거리는 유명 인사들 무리에 섞여 부초처럼 떠밀려 다니고 있었다.   

이 발광어류들 사이에 끼어 있자니 존재론적 회의가 파도처럼 밀려든다. 

나도 나름 훌륭한 사람인데..    

#. 2

개막작은 제니퍼 팽(Jennifer Phang)의 하프라이프(Half-life). 사회를 본 배유정씨 표현대로 퐌타스틱한 영화였다. 기교와 편집이 능란하고 스토리가 탄탄했다. 선댄스 영화제 Best Feature가 무색하지 않게 불안한 현대 사회에서 여성의 심리를 깊이 있게 표현한 영화였다.  

하지만 그 영화가 일반화 하고 있는 남성들의 꼬라지엔 동의하기 어렵다. 영화에 나온 모든 남자들은 심각한 결함이 있는 자들 뿐이니까. 가족을 팽개친 후 비행기를 몰고 세상 저편으로 날라가버린 남편, 세례연습이 취미인 꼴보수 목사, 그의 아들 동양인 게이, 그 남자친구 초등학교 선생님, 그나마 제대로 된 건 아직 남성성을 획득하지 못한 주인공 꼬맹이.  

내가 리셉션에서 "이건 구시대적이고 멍청한 페미니즘 영화잖아!" 라고 주장할 수 없었던 건 그 영화를 만든 제니퍼 '거세시술자' 팽이 내 옆에서 날카로운 이빨로 소시지를 씹어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3 

진보누리라는 사이트가 있었다. (아직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진중권이 활동했고 청년 논객으로 유명한 한윤형이나 노정태도 거기에서 잔뼈가 굵었다. 한 때는 한국어로 운영되는 정치토론 사이트 중에서 최고의 퀄리티를 가진 사이트였다고 생각한다. 

이 사이트의 우 상단에는 밀집모자를 쓴 농부아저씨, 헬멧을 쓴 노동자 아저씨, 안경 쓴 전문직 아저씨가 가슴크고 머리가 긴 여자랑 어깨동무를 하고 나란히 서 있는 조그만 그림이 있었는데 사이트가 생긴 이래 그 그림에 주목했던 사람은 어느 이름없는 과객 하나 뿐이었다. 그는 뜬금없이 물었다. '도대체 저 그림에서 여성은 뭐냐'. 몇 안 되는 조회수를 자랑했던 과객의 글은 의미없는 댓글 몇개와 함께 영원히 '묻혔'고 그 작고 이상한 그림은 진보누리의 역사와 운명을 함께했다.   

여자는 농부도, 노동자도, 전문직도 아니었다. 그냥 '여자'였다.  

사람을 대표하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여성'이라는 것은 과연 유효한 것일까?   

#. 4 

그날 영화제의 성 비는 흐뭇할 정도로 여성이 많았다. 그녀들은 제니퍼 팽의 영화를 보며 소외당하는 여성들에 대해 분노했(겠)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들의 명품 백과 반짝거리는 악세사리가 난무하는 현장에는 소외받는 여성은 없었다. 물론 소외당하는 여성만 여성인 건 아니지만 수 많은 페미니즘 영화가 우려먹는 여성들의 면면이 워낙에 소외에 가까운 것이라 그런지 그날 영화제는 뭔가 중요한 것 하나가 쑥 빠진 기분이었다. 맹물에 국수 말아먹는 심심함이랄까.

늘 궁금한 것이지만 이 사회에서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상류 계층이나,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하층 계급 노동자가 우글거리는 이유가 뭘까?  이상한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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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4-12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녀왔습니다. 물과비누와 반쪽의삶을 봤답니다. 둘다 참 좋았어요..
제가 새내기때 첫회였거든요. 그때부터 참가해와서 11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이렇게 영화제가 성장해 왔다는게 참 신기했습니다.

뷰리풀말미잘 2009-04-12 14:40   좋아요 0 | URL
헉.. 세상 정말 좁군요. 그럼 리셉션할때도 계셨어요? ^^; 저도 3회째 출석중인데 한번 쯤은 옆자리에 앉았을수도 있었겠네요.

하이드 2009-04-12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1회때부터 기회될때마다 갔는데, 제가 본 유명인은 변영주 감독 ,,, 정도;

뷰리풀말미잘 2009-04-13 00:02   좋아요 0 | URL
약간의 팁을 드리자면 유명인들은 개막식과 폐막식에 몰려온답니다. ^^ 참 놀라운게 거기 모인 사람들은 다 유명인이라 그런지 대체로 유명인에 초연하더군요. 저도 초연하려고 애는 썼는데 김혜나씨 지나갈 때 눈 돌아가는 건 어쩔 수가 없더라구요. 너무 예쁘잖아요!

마법천자문 2009-04-12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상류계층이 '우글거린다'고 할 정도로 많은 것 같지는 않은데요.

뷰리풀말미잘 2009-04-13 00:05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건 좀 오바였죠. 그런데 제 주변에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아쉬운 게 없는 사람들이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알라딘에서도 그렇구요. 하지만 뒤집어 털어도 개뿔 없는 것들이 한나라당 지지하는 경우는 쌔고 쌨잖아요. 이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