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집
기시 유스케 지음 / 창해 / 200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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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람들은 종종 '수상작'의 아우라에 낚인다. 책계界에 막 입문한 뉴비들은 물론이거니와 제법 읽는다 하는 대인배들도 수상작에는 쉽게 지갑을 열곤 한다. 한심한 일이다. 수상작 목록의 폐해는 사람낚는 베스트셀러 만큼이나 만만치가 않다. 굳이 열거하지는 않겠으나 특히 각종 신문사들의 문학상 또, 중, 소 규모의 문학상들은 좋은 작품을 선정하기보다는 상업적 폭탄들을 양산하는데 더 많이 기여했다. 상은 단지 참고적인 지표일 뿐, 책을 심판하는 잣대가 있다면 그것은 다만 세월일 것이다. 호머는 상을 받은 적 없지만 일리야드는 문학사적으로 독보적 위치를 획득했고, 검은 집은 제 4회 호러 대상을 수상했으나, 그 명성만큼 가치있는 책은 아니다.  

책 표지에서 인용하는 심사평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마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는 사실을 검은 집 만큼 확실히 보여준 소설은 일찍이 없었다. 시종 분위기를 압도하는 섬뜩한 캐릭터 설정, 절묘한 구성력과 복선의 묘미... 심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숨가쁘게 페이지를 넘겨가는 가운데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미저리보다 몇 배 더 강력한 공포, 일본 호러소설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점.  

부담스러울 정도로 미끄러운 평은 그 업계의 상도의니까 그러려니 하자. 하지만 안타깝게도 틀린 부분이 눈에 띤다. 검은집은 '마음이 없는' 사이코 패스에 대한 이야기이며, 아래에 언급하겠지만, 가장 중대한 결점을 꼽으라면 호러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시종 여유있는 분위기에 있다. 이 기세라면 심사위윈이 스티븐 킹의 '미저리'를 읽어봤는지도 조금은 의심해봐야 할 것 같다.  

#. 2  

어린시절의 트라우마, 연쇄살인, 트라우마와 사건의 극복. 말 할 것도 없는 클리셰, 진부한 플롯이다. 굳이 그 대표격인'양들의 침묵'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그런 류의 이야기 보다 그렇지 않은 류의 이야기를 찾는게 더 빠를 지경이니까. 작가 기시 유스케가 내 세운 주인공, 몇 살 터울의 형의 자살을 상처로 품고 사는 보험설계사. 요것도 그리 독창적인 설정은 아니다.    

전체적인 소설의 완성도에는 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작가가 3인칭 관찰자 시점을 다루는 데 어설프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생각이 전환되거나 상황이 변환되는 부분을 무리하게 하나의 문단에 우겨 넣으려는 부분이 여러차례 나타나는 것. 또 하나는 사설이 길어 몰입도를 해친다는 점이다. 소설은 총 4개의 장과 에필로그로 구분되는데 소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1, 2 장은 클라이막스로 들어가기 위한 포석일 뿐이어서 전체적인 속도감을 저하시킨다. 또 에필로그에서 사회 아노미에 대한 작가의 일장 연설은 도대체가 김이 빠진다. 전기밥솥 샀는데 압력밥솥을 사은품으로 받은 기분이랄까.

소설의 잘 된 부분은 거시적 구도에서 보다 미시적인 부분들에 있다. 다소 밋밋할 수 있는 소설의 전개를 그럴 듯 하게 포장하고 말쑥하게 이끌어내는 건 곤충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바탕으로 등장인물의 행동과 유형을 대입시키는 장치다. 이러한 장치는 곤충학도 출신이라는 주인공의 배경과, 소설의 전개가 꽉 맞물린 은유로 기둥처럼 소설의 얼개를 구축한다. 곤충의 은유가 소설의 외부적 틀을 떠받친다면 소설의 내면적 축을 형성하는 건 정신분석학적 틀이다. 비록 프로이트와 칼 융의 고전에서 머물기는 하나 소설의 흥미를 위해서는 충분히 매끄러운 수준이다.   

#. 3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소설의 히로인이자 심리학도인 메구미와 또 다른 심리학도인 가나이시의 대립이다. 이 둘은 사이코패스의 구원 가능성을 놓고 충돌한다. 소설에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지만 아마 메구미의 심리학적 베이스는 칼 로저스(Carl Rogers)의 상담심리학일거다. 로저스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학문의 준거점으로 삼았다. 그는 자기실현의 욕구를 가진 인간과 그 가능성을 믿으며, 정신적 위험상황의 모든 사람은 적절한 치유에 의해 ‘충분히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기나이시는 샤와 로스(shah and roth)의 유전학적 범죄학의 적자다. 1974년, 샤와 로스는 유전자 염색체에 대한 표본 조사를 통해 특정 염색체(XYY)를 가진 사람이 키가 크고 공격적이며 전과를 가지는 경력이 있다는 결론을 냈다. 물론 이 이론은 불과 3년만에 덴마크 연구자들에게 반박된다. 요지는 XYY염색체가 불러오는 문제는 단지 지능장애이고, 낮은 지능으로 사기를 치다 보니까 단지 정상 염색체를 가진 사람보다 체포율이 높은 뿐이라는 거다. 하지만 이들의 반박도 범죄를 일으키는 특정 염색체가 없다는 확신에는 이르지 못했다. 

어쨌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형질'이 존재하는가. 또 그러한 형질이 범죄를 유발하는가라는 의문은 18~19세기에 유행했던 골상학(骨相學) 이후, 오늘날 유전학까지 이어지는 범죄학의 오랜 테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직한 통계조사로 그러한 이론을 뒷받침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우생학의 끔찍한 전례를 들어 그러한 사고를 비판한다. (소설계에서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필립딕이 가장 강력한 비판자일거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은 아직 종지부를 찍은 것이 아니고 과학적 발견과 생물사회학(Biosocial)적 진보에 의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중이다.   

기나이시와 메구미, 이 둘의 대립으로 소설의 두가지 이론적 배경은 부딪히지만 기시 유스케는 이 두 등장인물을 한 무대에 올려놓는 모험을 택하지 않는다. 다만 기나이시는 죽음으로 자신의 이론에 무게를 싩고, 메구미는 가까스로 살아 자신의 이론을 증명할 기회만을 얻을 뿐이다. 작가의 메타포는 힘 없이 희미하다. 나쁘지는 않지만 용기있는 선택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한 치열한 학문적 탐구를 녹여내지 못한 건 못내 아쉬운 부분이며, 결정적으로 이 지점에서 검은 집은 A급 소설에서 멀어졌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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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03-12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생각하는 기시 유스케의 소설과는 거리가 먼 리뷰네요. ^^;
기시 유스케의 책들의 플롯은 뻔하고, 소재 역시 흔해빠졌는데, 정말 무서워요.
사람따라 호러를 느끼는 부분이 틀린걸까요? 세상에서는 기시 유스케를 호러작가라고 하긴 합니다만. 간혹 뒤끝이 약하다는 느낌을 받긴 하지만, 그게 그렇게 큰 약점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제가 읽은 가장 무서운 이야기는 기시 유스케의 <천사의 속삭임>이에요.

호러 대상으로 우리나라에 소개 된 것은 이 작품과 <야시>지요. 일본에는 워낙 다양한 상으로 다양한 장르의 마켓을 장려하다보니 정말 눈에 안 차는 수상작들도 많지만, 나름대로의 장점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나저나 이 작품은 수상작이어서기 보다는 영화로 명성(?)을 얻은게 아닌가요.

뷰리풀말미잘 2009-03-12 15:40   좋아요 0 | URL
어휴 하이드님 무섭죠. 무서운건 너무 당연하니까 안 썼을 뿐이에요. 한 반쯤은 눈 가리고 봤다니까요! 생각해보면 그렇게 아주 흔한 소재도 아닐지 몰라요. 요즘 사이코패스라는 단어는 국민상식이지만 요 소설이 출간된 97년 즈음에는 전문가나 알 법한 단어였을걸요.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범죄학의 저변이 좁아서 학회가 생긴지도 대략 2년 정도 밖에 안 됐다니까 더 그랬겠죠. 말씀하신 '천사의 속삭임'은 도서정보를 보니까 정말 재미있겠더라구요. 하이드님도 추천하시니까 조만간 꼭 볼 생각이에요. 하이드님의 선구안은 이치로 수준이니까요.

영화는 안 봤어요. 듀나가 재미 없대서. ㅎㅎ 듀나도 그 분야에서는 거의 이치로 수준이거든요.

Arch 2009-03-12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히 댓글을 못달겠어요.(그럼 달지 말지?) 전 영화로 검은집을 본게 다인데다 호러 소설은 잘 읽지 않아서.
영화로 검은집을 볼 때는 미잘님이 말하신 부분들이 전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반전, 반전, 깜짝 놀래키기, 황정민의 연기변신인데 굳이 안 해도 될 연기변신만 보이더라구요.
미잘님은 미모로울 뿐만 아니라 어쩜 범죄학에서 우생학까지 두루두루 아신답니까.

뷰리풀말미잘 2009-03-12 15:43   좋아요 0 | URL
저도 호러소설은 잘 안 읽었는데 간만에 읽어보니까 또 재미있더라구요! 싼 값에 오래,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보다 메리트 있는거 같아요. ㅎㅎ 제 모든 지식은 미모에서 나오는 거 같아요. 단점이라면, 별 깊은 구석이 없다는 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