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폐된 전쟁 -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허상이 가린 두 개의 내전
박홍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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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학대학 특임 강의 교수로 ‘중국의 대한반도 군사 개입’을 주제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상의 일반적이지 않은 관점을 평이한 언어로 소개하는 데 관심이 있다는 저자는 이 책에서 “미중 관계를 ‘무정부 상태 속 두 나라의 첨예한 경쟁’이라고 설명하는 기존의 국가 중심적 관점을 비판”(p.5)하며 이 두 국가가 “자본주의 국제 질서라는 리바이어던에 순응하는 존재”(p.5)라는, ‘일반적이지 않은 관점’을 독자들에게 ‘평이한 언어’로 소개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단어가 생긴 이후 국가가 된 미국과 현재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나라인 중국이 ‘자본주의 국제 질서’에 순응하고 있다니 흥미를 느끼며 책을 넘겼다.

<은폐된 전쟁>의 표지에는 얇은 천에 덮인 총 한자루가 그려져 있다. 트리거는 가려져 있지만 총구는 튀어나와 있는데 옆을 겨냥하고 있다. 얇은 천이 가린 총은 제목의 '은폐'를 떠올리게 하면서 그들이 각자 숨기려는 내부의 적을 향한 적개심이 엿보인다. 우리는 보통 미중관계, 이 강대국들간의 태평양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과 기술 패권 전쟁을 떠올리지만, 정작, 트럼프와 시진핑의 총구는 그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바로 옆자리의 경쟁자를 향해 있는 것만 같은 인상이다.

이 책은 총 5장으로 1장, ‘관점에 저항하기’에서 출발하며 2장 ‘분쟁과 응집’에서는 국가 간의 충돌과 안보 위기가 사실은 통치 권력이 내부의 갈등을 줄이고 대중을 결집하여 통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유용한 정치 자원임을 밝힌다. “어떠한 통치 권력도 대외 분쟁이 대내 권력 강화에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오로지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맞선 수호자로서 자신의 위상을 절대화하기 위해 담론의 폭력을 휘두른다.”(p.63) 한국전쟁 당시 트루먼 정권의 미 7함대 파견, 마오쩌둥의 항미원조 운동, 바이든 정권기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타이완 방문을 그 예시로 든다. 이 사건들은 모두 대외적 안보 명분 뒤에 숨은 내부 정치적 계산과 긴장 유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어 3장 ‘분쟁과 빵’에서 다루는 ‘국방’이라는 경제에 대해 다룬다. 국방비 지출은 단순하게 안보만을 위한 목적이 아닌, 군수 산업을 통해 일자리를 만들고 정치적 표심을 결집하는 ‘군사 케인스주의’ 경제 정책이다. K-방산을 앞으로의 먹거리로 만들겠다는 내용이 담긴 책, <자주 국방의 가성비>가 떠올랐다. 과거 루스벨트 시기의 군사 케인스주의와 달리,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군사 케인스주의는 감세와 노동 유연화로 쌓은 사회적 부를 다수인 대중에게서 소수인 군수 자본으로 이전시킨다. “일대일로에는 그렇게 돈을 쓰면서 코로나-19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데도 왜 재난 지원금을 한 푼도 안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중국의 돈을 받아 간 나라들은 다시 중국 관료들에게 막대한 리베이트를 건네는지도 모르죠. 그 많은 돈은 도대체 어디로 흘러 들어가는 걸까요?”(p.177) 저자의 중국지인의 이야기는 대외 안보와 ‘중국 위협론’이 이러한 자본의 이해관계를 은폐하는 명분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4장 ‘디커플링의 정치학’에서는 정치권이 강력한 관세와 수출 통제를 통해 ‘미중 디커플링’을 외치지만, 자본은 이윤을 따라가며 우회로를 찾고 국가 통제를 벗어나는 ‘탈주 본능’을 보인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미국의 반도체 생산 인프라 약화 역시 외부 위협 때문이 아니라 자본의 아웃소싱에 따른 글로벌 분업의 결과이며, 트럼프 행정부가 엔비디아 AI 반도체(H20)의 대중 수출을 다시 허가한 사례처럼 실제 디커플링의 균열은 미중 국가 간보다 ‘자본과 정부 사이’에서 먼저 발생했음을 밝힌다. 마지막 장, ‘트럼프라는 변수’에서는 트럼프식 외부의 적을 만들어 대중을 기만하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의 한계를 드러내고 이를 통해 미중이라는 흑백 논리에서 벗어나 양국의 권력, 자본, 시민사회 등 다양한 주체들과 연결될 수 있는 ‘리좀(Rhizome) 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중 관계의 ‘은폐된 전쟁’을 통해 나 역시 관성적인 진영 논리와 안보 공포 마케팅에 휩싸여있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외부적 위협 담론에 휘둘려 우리 내부의 수많은 문제들 - 불평등과 복지, 민주주의 후퇴-를 방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국제정치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이 책의 관점이 꼭 필요한 시점이다. 중국이 미국을 넘어 세계 패권국가가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미국의 연구자들 또한 인정하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는 트럼프에게 시달리고 있지만 그날이 되면 트럼프와 닮아있는 시진핑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잠깐의 시간이 우리가 리좀 외교를 펼칠 유일한 시간임을 알리는 책이다.

#은폐된전쟁#하니포터#하니포터13기#박홍서#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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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노래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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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 작가는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으로 2010년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후, 그 이듬 해 겨울, 두 번째 장편 소설 <끝나지 않는 노래>를 써냈다. 민들레 홀씨를 붙잡고 날아가는 세 명의 여성이 인상적이었던 첫 책의 표지는 15년이 지난 올해, 검은 바탕에 커다란 흰 꽃잎 몇 장이 포개어져 있는, 난초로 보이는 꽃의 정면이 담긴 사진으로 바뀌어 재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일제 강점기부터 2000년대까지 약 100년에 걸쳐 두자와 그녀의 딸, 봉선과 수선, 그들의 아이, 은하가 살아 낸 시간을 그린다. 이 시기에 한국에서 태어난 여성이 감내해야 했을 무던한 고통이 응축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라고만 서술되기에는 뭔가 너무 많이 모자라다. 이 소설은 구성부터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에필로그에서는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친구의 아버지와 친구를 잃은 ‘나’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대비해 유서를 썼고 항상 지니고 다녔다고 쓰여있다. 총 3부 중 1부, ‘아주 오래전 시작된’에서는 두자(‘나’에게 외할머니)의 이야기와 2000년대의 어느 날로 보이는 12월 19일 a.m. 2:17, ‘나’에게 지금 벌어지는 이야기가 교차되며 진행된다. 2분 후, ‘나’가 살고 있는, 창문도 없는 고시원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유일하게 나갈 수 있는 복도 끝 문 앞에는 칼부림을 하고 있는 남자 때문에 탈출하지 못하는 ‘나’의 이야기가 2:29분까지 전개된다. 2부 ‘너와 내가 한 소절씩 나눠 부르던’에서는 수선과 봉선, 쌍둥이 자매의 서사가 이어지면서 동시에 오늘날의 ‘나’는 2:32분부터 2:47까지 같은 고시원에서 살고 있는 한 여자, 지혜의 이름을 알게 되고, 그녀와 함께 이 불속에서 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3부 ‘끝나지 않을 이 노래’는 은하와 동하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2:48분부터 2:55분까지의 ‘나’의 의식을 서술하고 있다. 에필로그에서는 수선과 두자의 못다한이야기를 담았다. 과거의 이야기에는 100년이라는 시간이 응축되어 있었으나 ‘나’에게 일어난 사건은 고작 37분에 불과한 이 구성을 어떻게 봐야 하나, 고민이 되는 소설이었다.

3대에 걸친 이 여성 인물들은 개개인으로는 다른 사람이지만 비극적인 운명은 닮아있다. 이 인물들의 기나긴 과거가 한많은 운명 공동체를 설명하는 부분이라면 이 짧은 37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비극이 쉽다고 느껴졌다. 철쭉, 수수꽃다리, 봉선, 수선이라는 이 소설에 묘사된 꽃들처럼 이 인물들의 운명은 쉽게 밟히고 쉽게 졌다. 이 꽃들의 노래는 슬픈 얼굴을 하고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두자에게 이름이 두 자였다는 것만 기억난다는 새엄마와 분녀언니처럼, 봉선에게 수선처럼, 수선에게 혜순처럼, 은하에게 지혜처럼 서로가 서로를 포갠 꽃잎을 가진 표지의 흰색 난초처럼 계속해서 봄이 되면 꽃이 필 것이다.

‘초판 작가의 말’과 15년이 흐른 뒤, ‘새로 쓴 작가의 말’을 읽다가 ‘행복’에 대한 키워드에 꽂힌다. 엄마가 사랑한다는 말대신 행복하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했던 ‘초판 작가의 말’속 저자는 “사는 데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야”라는 엄마의 말을 씨앗처럼 간직한다. 이 씨앗이 피어낼 꽃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것이 ‘나약한 희망’(p.351)의 얼굴을 하고 흐드러지게 피어나길.

#끝나지않는노래#최진영#한겨레출판#하니포터#하니포터1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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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배당 투자지도 - 4개의 계좌로 완성하는
재테크메이트(이우봉) 지음 / 원앤원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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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 '재테크메이트TV' 운영자인 이우봉저자는 16년째 평범한 직장인이면서 꾸준한 ETF적립식 투자로 안정적인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경험을 기록하고 있다. <4개의 계좌로 완성하는 월배당 투자지도>도 그 연장선에 있는 책이다.

저자는 투자에서 중요한 것은 "제2의 월급을 만드는 일"(p.6)이며, 은퇴이후 또는 어떤 일에 도전했다가 실패하더라도 매달 꾸준히 현금흐름을 만들어줄 수 있다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릴 일은 없으며 "월급은 회사가 주지만, 배당은 내가 쌓아온 자산이 주는 월급"(p.7)이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한 달에 몇 천 원, 몇 만 원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꾸준히 적립식 투자와 재투자를 반복하면 "언젠가는 통신비를 내주고, 관리비를 대신 내주고, 더 나아가 생활비의 일부를 책임지는 수준까지 성장할 수 있"(p.7)다는 경험을 담은 책이다.

총 5장으로 1장은 투자를 시작하는 이유에 대해 전한다. 안전한 부동산이 낫지 않겠냐고 말할 사람들에게 저자는 37년간 서울 아파트 가격은 연 평균 6.7%올랐으나 미국주식 시장을 대표하는 S&P 500은 연환산 약 11%의 수익률을 기록했음을 짚는다. 물론 부동산과 주식은 성격이 다른 자산이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미국주식 시장은 높은 복리 효과를 바탕으로 부동산 못지않은 자산 증식 수단"(p.26)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복리의 마법으로 최고 자산가가 된 워렌 버핏이 자신이 죽으면 90%는 S&P500 인덱스펀드에 넣으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에피소드가 떠오르는 내용이다.

하지만 주식투자가 위험하고 도박과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은 저자는, "주식을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저축'이라는 마음가짐"(p.31)으로 모으기 시작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책은 기본적으로 개인연금투자를 목적으로 하며 독자들이 따라할 수 있는 지도, 맵핑이 될 수 있는 책이다.

2장은 ETF 투자 기본기에 대한 부분이다. 왜 ETF투자를 권유하는지, 성장주와 배당성장주 또는 배당률과 배당성장률의 차이 등을 통해 월배당 ETF의 구조적 메커니즘에 대한 기본지식을 알 수 있다. 3장은 '평생 돈이 마르지 않는 4개의계좌'라는 제목으로 연금저축, IRP, ISA, 일반 위탁계좌라는 '4개의 핵심 계좌'를 연계해 세금을 극소화하는 포트폴리오 조립법을 체계적으로 다룬다. 개인적으로는 ISA와 절세 계좌의 시너지 부분에서 "4% 규칙"(p.147)이 눈에 띄었다. 후반의 4-5장에서는 시장 변동성의 흔들림 없이 월배당을 받을 수 있는 연령별 성향별 포트폴리오를 제시한다.

이 책은 "ETF 적립식 투자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끝까지 해낼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저자가 "그저 좋은 자산을 선택하고, 꾸준히 투자하며, 오랜 시간을 견디는 것이 전부"(p.297)지만 누군가에게는 첫걸음을 내딛기 어려운 큰 도전이란 것을 알기에 이 책을 썼다고 전한다. 시작은 쉽지만 꾸준히 하는 것은 어렵다.
​
개인적으로는 주린이 뿐 아니라 투자의 필요성은 느끼지만 구체적 실행 방안에 대해 머뭇거렸던 MBTI의 P성향의 예비투자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연금투자#월배당#ETF#재테크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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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스
이승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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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에서는 빅브라더가 신어를 만들어 어휘량을 점점 줄여나가며 추상적인 개념을 말살시키며 인간을 조종해나간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포드(Ford)를 숭배하며 사회를 통제하는 세계통제소가 존재한다. 그들은 소마를 대중에게 뿌려 사고를 해야하는 시점을 멈추며 쾌락만을 추구하도록 설계한다. 이 유명한 디스토피아 소설이 쓰여진지 약 70년정도가 되었다. 빅브라더와 포드의 역할을 오늘날의 AI가 할 것이라고 생각한 책이 여기있다. 제31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아르고스>다.
이 책에서는 잠을 거부하고 야근을 더 해서 돈을 벌려는 노동자들의 언어가 줄어든다. 남이 고통스러운 것을 보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감정의 퇴화가 지속되고 있다. 같은 노동자이면서도, 가장 밑바닥에서 기계처럼 일하길 강요하는 시스템 속에서 희생되어가는,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는 노동자들을 못본척 하는 우리를 비춘다.

전직 강남구 에스테틱 의사였으나 3개월안에 3억의 빚을 갚아야하는 채무자이자 현재 물류센터 구급대원 정재일이 주인공이다. 그는 1500년 전, 가야의 고분이 묻혀있는 장소와 나란히 존재하는 김해의 한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중이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D구역 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눈가에 검은 거미줄같은 핏대를 보고는 그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잠을 반납하고 야근을 밥먹듯이 하는 감정과 말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이 물류센터의 로봇을 고치는 한 하청업체의 수아가 있다. 그녀는 유일하게 이 공간에서 잠을 자는 인물이다. 그녀는 밤마다 지난 밤 꾼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잠을 잘 수 없는 노동자들은 그녀의 꿈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인다. 그녀는 이들의 불면이 AI 관제 시스템 '아르고스'와 관계 된 것을 눈치채며 소설이 진행된다.

1500년전의 가야문명과 AI 특화 물류센터, 강남구 에스테틱과 비닐하우스라는 시공간의 대비와 계속해서 교차되는 어떤 지점들이 인상적이다.

주인공이 김해에 처음 도착했을 때,
"고분군 보존 시위대의 확성기 소리, 테크노밸리 확장 공사의 중장비 소리, 배송 드론의 프로펠러 소리. 이 세 가지가 삼중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 교차점에 나의 비닐하우스가 있었다."(p.23)

그 세력들 중 수기안토, 윈과 같은 다문화노동자들은 물론 비닐하우스촌 거주자들의 자리는 없다. 그들의 이름 역시 중요하지 않다. 수아의 아버지는 굴착기와 함께 흙벽에 묻힌 사고로 죽었으나 하청의 하청 직원이었기에 산재 조차 받을 수 없었다. 서류 어디에도 수아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수아가 재일에게 거래를 제시하는 부분이긴하지만 마지막에 수아가 주인공의 이름을 묻고 '정재일'이라고 대답하며 주인공의 이름이 처음으로 노출되는 장면은 같은 노동자로서, 갑과 을이 아니라 동료가 되는 과정으로 읽헜다.

이후 수아가 고치던 로봇의 모터를 쳐다보다가 손을 갖다대 화상을 입은 수기안토에게 재일이 응급처치를 해주는 장면이 있다. 바로 이전 대목에서, 재일은
"로봇을 만지는 수아의 손은, 내가 채혈할 때의 손과 비슷했다. 숙련된 전문가의 손. 나는 피부 밑 3밀리미터의 세계를 다루고, 수아는 패널 안쪽의 회로를 다루었다."(p.118)
라고 관찰한다. 서로 다른 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손들이 서로 교차되어 협업을 하는 이 장면이 나의 최애다.

서울로 다시 돌아갈 재일이 김해에서 얻어간 가벼우면서도 무거운 노트가 증거의 기록으로 쓰일지, 상품으로 쓰일지 궁금하지 않다.

"재일 씨, 나는 체제를 무너뜨린 게 아니에요. 기계.하나를 끈거예요. 기계를 끄면 다른 기계가 켜져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음 기계 옆에서 다시 렌치를 드는 거예요."(p.222)

이 말을 들은 재일의 주사기는 이전과 다를 것이기에.


p.s 그리고 라면은 항상 옳다. 노동자들의 영원한 동료여!
#아르고스 #한겨레출판#이승형#하니포터#하니포터1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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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안정 - '결혼'이 만드는 꿈과 불안, 그 너머 관계의 기하학
안희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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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안정>

저자는 문화인류학 연구자이자 작가로 '감정이 개인과 사회에 무슨 일을 하는지에 관심 있다'. 전작 <증명과 변명>에서는 성과주의와 획일화된 생애 주기 강박 속에서 죽음을 계획했던 20대 남성 친구와의 인터뷰를 담았다. 능력을 증명해야만 생존을 허락하는 사회적 폭력과 그 이면의 좌절에 대해 입체적으로 써냈기에 제 66회 한국출판문화상 올해의 교양서 10종에 선정되었다. 이 책에서도 저자 특유의 대화의 해석, 구조적 통찰은 여전하다.


'결혼'에 대해 90년대생 아홉 명의 인터뷰를 "분해하여 이해해봄"(p.203)에 대한 이 책은 총 3장으로 구성되어있다. "하나, 만을 향하는 문", "둘, 만의 타원"이라는 1,2장을 읽을 때는 <사랑과 안정>이라는 평온한 단어들이 병치된 제목이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이 90년대생들이 경제적 불확실성 속에서 결혼이라는 제도적 정착지로 수렴하기 위해 필수조건인 '안정'의 실체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한다. 마지막 3장 "셋, 세면 고개를 돌려"에서는 기존 정상가족 중심의 결혼 제도를 넘어, 제도 바깥에서도 서로를 지탱할 수 있는 책임과 돌봄의 새로운 '관계의 기하학'- 원뿔을 수직으로 잘랐을 때 생겨나는 열린 쌍곡선은 " 제도적, 사회적 감시로 고립된 둘 만의 세계가 아닌, 어떤 제도를 택하든 사회적 규범에 갇히지 않고 서로에게 기대어 세계를 향해 자신의 독특함을 내어놓을 수 있을 때 가능하다."(p.221) -을 모색하며 대안적 공동체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40대의 기혼 여성 독자로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90년대생이 온다>를 떠올렸다. 나에게 90년대생이란 탈권위와 '워라밸'을 따지며 조직의 구성원으로서든 소비자로서든 호구가 되기를 거부하는 특성을 가진 현실주의적 태도를 지향하는 세대에 속한 이들이다. 이 책은 그 90년대생들의 결혼관으로 다가왔다. 이들은 국가에의해 의무화된 "어른의 1인분"(p.170)에 대해 강박을 느끼고, 나에게는 생애 주기의 당연한 통과의례로 여겼던 결혼에 대해, "가부장제에 대한 부역(p.176)으로 이해된다는 것을 읽으며 "그들(90년대생)은 그럴수도 있겠다"라는 공감이 간다. 동시에 결혼이라는 "평범한 삶에의 지향은 규범을 어겼을 때 돌아올 처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근간으로 하고, 이 공포는 고유성과 평범함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만든 뒤 고유성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 결국 본래의 목표를 좌절시키기까지 한다."(p.185) 라는 영화 <어쩔수가 없다>의 만수를 통해 저자가 얻은 교훈은, 부모의 잘못을 여과없이 보며 성장해온 자식의 속마음을 읽는 느낌으로 읽혔다.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는 그들의 눈에 얼마나 불행해보였던 것일까.

하지만 3부에서 등을 기대고 측면을 바라보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옆을, 주변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안정적인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힘"(p.325)을 이야기하는 저자를 보며 결혼의 전제들 중 대부분이 우리 사회가 제공하지 못하는 것들이라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타인과 맺는 관계의 본질을 되묻고, 사적 결합을 넘어선 연대의 가능성을 사유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보다 더 나은 사랑과 안정을 추구할 90년대생들의 행보를 기대하게 한다.

한편 이 책은 다른 지점에서 나를 울컥하게 했다. 나의 아이는 2010년 이후에 태어난 잘파세대고 이 90년대생들과 또 다를 것이다. 나도 저자의 부모님처럼 "네가 무엇이어도 괜찮다"는 멋진 말을 남길 줄 아는 부모가 되고싶다. 저자에게 <러시아 인형처럼>을 추천해주면서 외롭게 두지 않을 친구가 있길. 저자처럼 열린 쌍곡선의 사랑과 안정을 찾아가는 삶을 살길. 이 책이 우리 세대와 우리 아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

#사랑과안정#한겨레출판#하니포터#하니포터13기#안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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