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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는 어떻게 현실을 바꾸는가
브라이언 애터버리 지음, 신솔잎 옮김 / 푸른숲 / 2025년 5월
평점 :
해리 포터 보다는 반지의 제왕을 더 선호하는 나는 판타지, 특히 SF 장르를 좋아한다. ‘저는 판타지를 좋아합니다!’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진 않았다. 가뜩이나 가벼운 인상도 맘에 안드는데 굳이 철이 덜 든 취향까지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판타지는 진실을 전달하는 거짓말이다”(p.27).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거짓으로 세팅된 세상 속, 불안해보이는 주인공을 따라 읽다보면 가까스로 가닿는 충격적인 결말, 이 뻔한 구조에 나는 열광했다. 가끔 나 자신이 현실도피형 독서가인가 자조적이기도 했지만 나보다 한 천배는 심각한 판타지덕후가 쓴 이 책을 읽으며 내가 판타지를 읽는 정당한 이유를 발견할 수있었다.
서문에서 저자는 판타지라면 현실을 탈피하고, 상식적인 사고를 벗어나는 대상들의 연결성을 밝히고, 사실 같은 거짓말을 해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말한다. 이 중심에는 두 가지 질문이 자리한다. “첫째, 판타지가 어떻게 의미 있을 수 있는가? 물리 법칙을 비틀고 과거 사실을 부정하는 스토리텔링의 한 형태가 어떻게 인간의 본성과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파고드는 통찰의 원천이 될 수 있을까? 둘째, 판타지의 역할은 무엇인가? 판타지는 소설 속 캐릭터의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에, 독자들의 세계에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지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가?”(p.6) 이후 이어지는 아홉 개의 챕터는 판타지적인 세계구축과 스토리텔링의 여러측면을 설명하며 이 두 질문에 답한다.
나는 이 중에서 3, 4챕터, ‘판타지는 어떤 결말을 추구해야 하는지’, ‘갈등만이 스토리를 흥미롭게 하는지’를 읽으며 그동안 읽어왔던 판타지들의 공식을 떠올리는 거시적 안목을 선물 받았다. 또 개인적으로는 6챕터의 ‘더 나은 세계가 있다는 생각’에서 ‘유토피아’ 키워드가 주된 장이 가장 재미있었다. “유토피아 문학은 판타지가 정치와 만나는 지점이다”(p.243)로 시작하는 이 장은 이전의 사회의 모습을 버리고 새롭고 합리적인 스타일의 세계를 만나는 전제로 시작한다. “유토피아 문학은 (...) 행동의 변화를 이끄는 데는 주로 두 가지 방법이 있다”(p.244)며 설명하는데 “첫번째 전제는 이 세계에 잘못된 것이 너무 많고 우리가 더욱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전제는 이런 오류들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일부이므로 바로잡으려는 시도는 상황을 더욱 악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첫 번째 전제를 수용할 때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두 번째 전제를 수용할 때는 유토피아를 향한 노력조차 결국 끔찍한 결과를 부를 뿐이라고 믿는다.”(p.245) 이 부분을 읽으며 디스토피아가 암울한 미래로 마무리되어진다 하더라도 그런 문제점을 제시하는 데 의미가 있음을 깨닫는다. 특히 영 어덜트들이 디스토피아를 좋아한다는 내용에 호기심이 생겼다. <헝거게임>, <다이버전트>에 이어 작년에 넷플릭스에 공개된 <어글리> 등 영화, 또는 드라마화된 작품들이라 익숙해서였을까. 아동 문학가 마이클 레비는 “그들이 사는 곳이 디스토피아이기 때문”(p.247)에 그들이 디스토피아를 선호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 일컫는 MZ세대가 떠오르기도 했다. 제국주의라는 디스토피아에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은 젊은이들밖에 없지 않을까?”(p.250)라고 이야기한 시인 로빈슨 제퍼스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10대 독자들이 계속해서 영 어덜트 유토피아에 사로잡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제안하기도 한다. “내러티브의 흥미를 부여하기 위해 우리는 세상과 스토리 내에서 저항의 근원을 설명할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한다.”(p.264) 나 역시 어느새 판타지의 작가가 되어 영 어덜트의 디스토피아 독서를 응원하고 있었다.
아쉬웠던 부분은 C.S. 루이스, 톨킨의 작품까지는 읽어본 작품이라 괜찮았지만, 동화 외에는 플롯과 스토리에 대해 간단하게 서술해주기는 하지만 낯선 서구작가와 작품들의 예시가 많아 읽는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책의 뒤쪽 날개 부분에 쓰인 ‘판타지를 읽고 쓰는 사람들이 생각해 볼 것’에 대한 아홉가지 키워드- “진실성, 사실주의, 결말, 흥미 요소, 문학의 사회적 기능, 유토피아, 남성성, 정치성, 두려움”-가 책을 읽다 길을 잃은 나에게 등불이 되어주었다.
우리나라 저자가 쓴 이런 책을 기대해보며, 판타지 장르를 쓰고 있는 현 소설가분부터, 디스토피아를 좋아하는 영 어덜트, 그리고 절대 현실도피형으로 판타지를 읽는게 아님을 이 책을 읽으며 깨달을 판타지 덕후들에게 강력 추천한다. 나는 이 책 덕분에 한 2년치의 독서목록을 선물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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