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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다시 쓴다 - 있음과 없음에서 함과 됨까지

윤구병 (지은이) | 보리 | 2013-02-12

 

철학서적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개념 자체가 어렵기도 하지만, 개념을 담는 단어의 어려움도 한 몫 한다. 번역되어 들어오면서 생기는 문제들 때문인 경우가 많은데, 초보자로서 책을 읽다보면 내용 파악 이전에 만나는 1차 장벽이다. 

한편으로는 철학을 비롯해서 학문을 한다는 것이 우선 책을 읽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아서 이러다 책만 읽다 끝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드는데, 이것이 걱정인 이유는 학문을 나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실천의 영역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것인데 바로 이 책 <철학을 다시 쓴다>가 지금 이야기한 두 가지에 대해 모두 다루고 있어 눈길이 간다. 최근에 더욱 고민하게 된 두 문제를 고찰해 보기 위한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 같다.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 어느 인문주의자의 클래식 읽기

문학수 (지은이) | 돌베개 | 2013-02-25

 

나는 그림에 나의 관심을 두려고 한다. 처음엔 '그럼 좀 안다'는 게 특별한 것처럼 여겨지기에 그 흐름에 편승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가, 언젠가 그림이 나를 위로해 줬던 경험을 겪고 나서 좀 더 개인적인 이유로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결정적으로 미술사 수업을 들으면서 관심과 지식이 함께 커졌고 이젠 두고 두고 함께가는 대상이 되었다. 이런 맥락에 있는 것들 중에 하나가 바로 클래식이다. 그런데 클래식은 아직 관심은 있지만 지식이 없는 상태이다. 이 책을 보니 유명한 음악가들을 중심으로 입문자의 입장에서 관심이 갈 법하며, 또 접근해 볼 만한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아서 나의 클래식 입문서적으로 꼽아보고 싶다. 

 

 

 

채식의 배신 - 불편해도 알아야 할 채식주의의 두 얼굴

리어 키스 (지은이) | 김희정 (옮긴이) | 부키 | 2013-02-22

 

몇 년 전부터 지나친 채식이 영양 결핍을 가져온다는 내용들이 전파를 타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업소용 수퍼에 갔다가 (유전자 조작 콩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의심되는) 미국산 대두로 만든 콩고기를 대량으로 파는 것을 보고 채식에 대한 의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내가 채식주의자냐? 그건 아니다. 하지만 채식이 정말 좋은 것이리라는 믿음은 있었다. 왜 그랬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채식에는 으레 "홈메이드"의 이미지가 따라왔기 때문인 것 같다. 유기농으로 재배된 싱싱한 채소로 갓 만들어낸 음식. 그런데 수퍼에 있는 콩고기를 보고 그야말로 "깼다". 이 책 또한 그 "채식"이 주는 이미지에 대한 적나라한 보고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미 믿음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이 책을 꼽는 이유는 요즘 채식과 유사한 분위기로 '이미지 메이킹'하는 것들에 비판적 시선을 이 책을 통해 통틀어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때문이다.

 

 

 

나만의 독립국가 만들기

사카구치 교헤 (지은이) | 고주영 (옮긴이) | 이음 | 2013-02-18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를 읽으면서 강력해진 생각이 있다. 내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생각에 대해 너무 안일했던 것, 순진했던 것은 아닌지. 또 그저 변화에 대한 이미지만을 취한 건 아닌지, 그저 그 이미지를 가진 것으로 자기만족감을 채우고, 그저 소비한 것은 아닌지하는 생각이다. 실제로 변화시킬 수 있느냐며 변화의 가능성을 따지는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고, 그 변화를 위한 시도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난 그것이 일상에 밀착되지만 소소하지 않고, 무겁지 않지만 엄청난 것이었으면 좋겠다. 재미까지 있으면 더 좋고. 그래서 이 책은 굉장히 흥미로운 영감의 원천이자 사례집이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있다. 글로 쓰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부딪힌 것 같아 더욱 마음에 든다. 읽어봐야 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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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이즈 컬처 - 인문학과 과학의 새로운 르네상스
노엄 촘스키 & 에드워드 윌슨 & 스티븐 핑커 외 지음, 이창희 옮김 / 동아시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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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이후로 '문과'라는 영역(인문학, 사회과학 등)에 줄곧 있어온 나는 과학에 대해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안경'이라는 기대를 해왔다. 그래서 과학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나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과학은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실질적으로 과학을 접하고 나를 확장시켰던 경험은 없었다. 뭐 유사한 경험이라 한다면 대학 시절, 물리학을 전공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한 적이 있는데, 나와는 생각의 경로가 판이하게 달라서 대화가 잘 안 통했다는 씁쓸한 경험이었다.

 

세상만사는 과학에서 시작하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현상의 배후에도 과학이 자리 잡고 있다.(4쪽)

 

그리고 서문을 펴자마자 나는 그 씁쓸한 경험이 떠올랐다. 과학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부인하지도, 부인할 길도 없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과학으로 해결하는 과학만능주의, 과학지상주의를 서슴없이 드러내는 책과는 대화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내가 객(客)이 된 듯한 느낌도 불편했다. 마치 이과생들 수업에 문과생이 들어가서 수업듣는 느낌, 아니면 인문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과학에 대한 강의를 듣고 싶었는데, 실상은 그 반대이다보니 수강취소를 하고 수업에서 나오고 싶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로 이 책을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을 마무리하면서 이러한 태도는 거두어졌다. 물론 이 책이 신간평가단 활동을 하며 손에 꼽을 만한 책이 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책이 주는 어떤 신선함때문에 생각의 변화는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졌다.

 

 

과학은 증거에 뿌리를 내리고, 끈질긴 의문을 제기하여 바른길을 걸으며, 자기비판과 엄정한 연구방법이라는 틀 속에서 움직이는 방법론이자 철학이다.(6쪽)

 

사실 나에게 있어 인문학, 쉽게 말하자면 문학, 역사, 철학으로 대표되는 이 영역은 어느 분과학문보다 우월한 존재이다. 피라미드를 그린다면 가장 꼭대기에 있다. 학창시절, 수학을 참 못했지만 대학에 들어와서 수학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그것의 철학적 성격때문이었다. 과학도, 생각해보면, 역시 과학철학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이 책의 초입부터 내가 분명히 하도록 요구받았던 건 내가 생각하는 과학이란게 무엇이냐는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이었다. 신간을 살피면서도 늘 과학분야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으려고 했던 나에게 과학이란 무엇이었나? 나에게 과학은 인문학에 포섭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철학화 된 과학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사회학, 경제학, 인류학 등이 인문학의 영역에서 떨어져 나와 사회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할 수 있게 했던 그 '과학'을 전제하고 이 책을 접할 것을 요구하는 듯 했다.

 

 

과학은 복잡한 문제를 관찰 및 해결하고, 나라 사이의 관계를 수립하고, 민주주의를 고무하거나, 심지어 민주주의의 불꽃을 새로 지피게 해주는 렌즈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렌즈 덕분에 인간은 눈앞에 나타나는 문제가 아무리 복잡하고 갑작스러운 것이라고 해도 이를 모두 다룰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갖는다.(6쪽)

 

확실히 '인문학적 사고방식'과 '과학적 사고방식'은 차이가 있는 듯 하고, 나는 두 개를 분류하는 것이 유용하고 유익한 것 같다. 이러한 분류가 좀 더 가시적으로 사고의 차원이라는 것을 만들어주고 그것을 넘나들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의 문장에서 이 책의 기획자는 한 쪽의 방식이, 즉 과학적 사고방식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고, 앞서 언급했듯 나는 이 책의 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22개의 주제에 대한 44명의 대담자들이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갖고 있는 것인지 크게 걱정이 되었다. 물론 기획자의 의도는 내가 받아들인 바와 다를 수 있으나 몇 번을 읽어도 나의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과학적 사고방식을 강조하기 위해 지나치게 밀고 간 것이 아닌가하는 판단을 했고, 그것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22개의 주제는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스토리텔링을 진화론과 연결시키는 부분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바로 이와 같은 지점이 내가 생각하는 기획자의 의도 아니었나 싶다. 즉 '과학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도 깔려있다!!' 목차의 제목만 보면 (내가 생각하기에) 인문학의 전형적인 주제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어떻게 과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이해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모든 현상에 대해 과학이 가지는 지분을 강조하거나 확장하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지분'을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쑥스러워졌다. 정말. 오히려 '과학은 이런 주제에 관해서는 이야기할 수 없을거야'라는 나의 오만을 신선한 방법으로 깨트려 주었고 편가르기하며 지분을 정산하려 했던 건 나였구나라는 것을 알았다.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을 읽으며 그리고 분과학문 간의 융합을 강조하는 최근의 추세를 지켜보며,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들며 배움의 폭을 확장시켜 나가겠다는 나의 의지는 말뿐이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부터, 나도 모르게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각 챕터를 시작하기 전에 대담자들의 사진을 크게 박아 넣은 것에 조금은 당황했는데, 생각해보면 이런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44명이나 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에 대해 지면을 할당해 사진을 넣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첫 장을 장식했던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이라는 개념을 현실화시키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바로 첨단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고 나는 앞으로 이들의 이름과 대화를 기억하며 예의주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나도 인문학과 과학을 직조해나가는 이들의 감각을 계속해서 복기하며 체득해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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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 명작 동화에 숨은 역사 찾기

박신영 (지은이) | 페이퍼로드 | 2013-01-23

 

이런 책들이 좋다. 환상의 이면을 보여주는 책들. 혹은 그 환상이 현실에서는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여주는 책들 말이다. 물론 이 책은 환상이 아닌, 부제에서 알려주듯,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동화를 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읽어왔던 동화들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현실과는 동떨어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환상처럼 말이다. 그런데, 환상은 갖는 것만큼이나 깨는 재미가 쏠쏠한 것 같다. 그리고 그런 환상을 깨 줄 가장 타당하고, 재미있는 도구가 바로 역사가 아닐까 싶다. 이야기 속에서는 인과관계없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지던 것들이 역사라는 프레임을 통해, 이유를 갖기 시작한다. 무릎을 탁 치며 탄성을 지르고, 상식이 늘어나는 것을 느끼는 동시에, 이야기 속에서 내렸던 좋다, 나쁘다라는 식의 이분법적 판단이 혼란을 겪기 시작한다. 이 과정 때문에 나는 이런 종류의 책이 좋고, 이 책은 그 역할을 제대로 할 것만 같은 기분을 들게 만든다.

 

 

 

미국을 만든 책 25 - 어떻게 하얀 고래, 콩코드 호숫가, 피곤한 블루스는 미국의 정신을 형성했는가

토마스 C. 포스터 (지은이) | 이종인 (옮긴이)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01-28

 

읽지 않고 사 두기 만한 책 중에,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가 있다. 프랑스인인 토크빌이 미국이 만들어 낸 정치체계에 매료되어 쓴 책이라고 알고 있다. 처음에는 좀 당혹스러웠다. 내가 생각하는 21세기의 미국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제국주의를 행하는 국가라는 인상이 강하기에, 미국의 민주주의가 탄생하는 순간을 경탄하며 바라보는 이가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이것은 미국의 정신에도 해당하는 선입견이다. 맥도날드와 MTV로 인식되는 미국의 정신에 문학이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만 느껴진다. 물론 이것도 태초의 일이겠지만. 시작은 늘 정수를 담기 마련이다. 확실히 나는 미국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건국은 다른 관점에서 봐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힘들게 건너온 땅에 좋은 씨를 뿌리고자 한 이들의 노력은 내가 함부로 평가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씨앗을 뿌리고자 했을까? 한 발짝 물러나 겸허하고 존경스러운 마음으로 이 책을 잡고 싶다.      

 

 

 

이야기의 기원 - 인간의 왜 스토리텔링에 탐닉하는가

브라이언 보이드 (지은이) | 남경태 (옮긴이) | 휴머니스트 | 2013-01-28

 

사실 '이야기'라는 것이 좋아서, 제목에 '이야기'가 들어가는 이 책에 눈길이 갔다. 내가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야기는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성별을 바꿀 수도 있고, 가보지 못한 것을 갈 수도 있고,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살아볼 수도 있는 무한 상상력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자유롭다 한들, 우주 밖을 나가보겠는가? 지금 이 자리에서 순간이동을 할 수 있겠는가? 물리적 세계에서 나는 필연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나에게 그걸 깨줄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도구가 바로 이야기다. 나는 그래서 이야기에 탐닉한다. 이런 생각을 갖고, 그 다음에 책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니, 또 진화론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진화에 의한 결과물이란다. 나도 진화론에 관심이 많고 긍정적인 태도로 흥미있게 보는 영역이지만, 인간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이 진화의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주장은 너무 억지가 아닌가 하며 인상을 5초간 찌그리게 한다. 그런데 또 다시 난 호기심을 갖는다. 그게 정말인지 궁금해서. 

 

 

크랙 캐피털리즘 - 균열혁명의 멜로디

존 홀러웨이 (지은이) | 조정환 (옮긴이) | 갈무리 | 2013-01-31

 

'crack'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돈오'와 '점수'가 생각났다. 요즘은 '변화'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한 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되뇌여 본다. 하지만 분명 변화의 기점은 존재하는 것 같다. 이 때를 기점으로 내가 변한 것 같다라는 식으로. 하지만 그 변화가 오는 것 또한 이런 경로를 밟느냐?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우석훈 저자의 책 제목처럼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오는 것 같다. 그러니까 '점수'하다보면 어느 순간 '돈오'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균열이 생길 것이다. 빠지직 빠지직 하고 말이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와지직하고 깨지는 것. 어느 순간 나는 변화를 이렇게 정의한다. 그렇기에 자본주의에서의 변화와 혁명도 이렇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가 말하는 균열은 무엇인지 듣고 싶어졌다.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벤저민 긴스버그 | 매튜 A. 크렌슨 (지은이) | 서복경 (옮긴이) | 후마니타스 | 2013-01-31

 

 그래, 미국의 민주주의는 나쁜 것이 아니라, 나빠졌다. 처음부터 그런게 아니라 점점 나빠지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내가 보는 미국이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왜 그렇게 되었는가? 구체적으로 미국이라는 대상을 지목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말은 마치 원죄처럼 짊어지고 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지만, 무언가 구체적인 대상이 있다는 것, 그것도 가장 핫한 미국이라는 것은 눈을 번쩍 뜨이게 하고, 메스를 들고 분석하고 싶게 만든다. '한국 민주주의를 비춰주는 거울같은 책'이라는 소개글도 씁쓸하지만 매력적이다. 분석 내용또한 호기심이 간다. 특히 '시민에서 고객으로'라고 지적한 점이 흥미를 끈다. 단순한 분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은 스스로를 시민이라 자부하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고객으로 보일 나 자신을 더 이상 순진하지 않게 만듦과 동시에 고객에서 벗어나 시민으로 가도록 움직임을 재촉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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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몇 해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사촌 내의 가까운 분이 돌아가신 건 2번째였으나, 그 과정을 또렷이 보고 기억할 수 있는 죽음은 첫 번째였다. 이 때 나는 TV에서 사람들이 묘지 앞이나, 납골당 사진을 앞에 두고 돌아가신 분에게 왜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는 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그 분과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은 하늘에 대고 중얼거리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왜 인간이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가는 지 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내 앞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방법은 그를 하늘에 있다거나, 주기적으로 찾아온다거나,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기에, 이제 정말 그 방법밖에 없기에 인간은 위와 같은 관습을 만들어 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정말 제사 때 찾아오실까? 살아계실 때와 똑같은 의식으로 우리를 기억하실까? 에이, 그냥 정말 이제 안 계신 거지... 무슨...! 그건 그냥 미신이지! 이런 생각때문에 난 장지로 가는 동안은 눈물을 흘리다가, 장지에 도착하는 순간은 눈물이 그쳤다. '이제 날씨가 추워지는데 할아버지... 얼마나 추우실까...'하는 생각이 들다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지... 추위를 느끼실 수가 없지...'하는 생각이 번갈아가며 들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마음으로 느껴지다가도 또 어느 순간에는 머리로 이해되는 오락가락의 순간이었다.

 

  아마 우리는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마치 그네를 타는 것처럼 감성과 이성을 넘나들며 죽음을 인식하는 것 같다. '사람이 죽었다.'는 것에 대해 육체적 기능을 포함한 정신적 기능이 모두 중단되었다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죽은 사람이 좋은 곳으로 가길, 꿈에서라도 만나길 바라는 심리가 동시에 발생한다. 물론 전자와 후자가 균형적으로 발생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바로 이 지점, 즉 후자에 많은 비중을 두는 사람들에게 전자를 강조하고자 쓰여진 책이, 이 책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아닐까 싶다.

 

  모든 것에 무기력해 질 때, '죽음'을 생각하면 생기가 돈다. 한 번 사는 인생, 죽기 전에 해 보고 싶은 거 다 해보자.

  누군가에게 너무 화가 날 때. '죽음'을 생각하면 관대해진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그렇게 열내서 뭐하겠나.

  일상에서 죽음은 이런 맥락에서 떠올리는 것이었다. 언젠가 삶은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아가는 인간은, 이런 역설 속에서 '生'의 가치와 이유를 찾는다. 내가 이 책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을 접했을 때, 나는 이 책이 위와 같은 맥락에서 전개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던 것처럼 이 책은 엄연한 철학책이었다. 당연시 여기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그리고 세밀한 질문을 통해 개념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철학책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접근이 처음에는 거추장스럽게 느껴졌으나 곧 흥미를 느꼈다. 가깝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내 육체에 대해, 내 정신에 대해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 여러가지 관점에서 깊이있게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는 점이 내가 꼽는 이 책의 장점이다.

 

  물리주의자의 관점에서 인간은 육체로만 구성되고, 죽음은 육체의 모든 기능이 멈추는 것이기 때문에 육체인 인간은 죽음과 함께 끝난다는 것. 그 이후는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렇기에 죽음 이후란 없으니, 주어진 삶을 즐기고 최선을 다하라는 것또한 포함해서. 덧붙여 데카르트의 주장을 반박하는 대목까지 나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책은 앞서 읽었던 <눈물닦고 스피노자>를 생각나게 했다. 유한자로서의 인간. 그러니 죽음을 생각하지 말고, 살아있는 생의 욕망을 구현하며 살 것. 아마 순서상 우선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왜 인간이 유한자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다면, 다음으로 <눈물닦고 스피토자>를 통해 생(生)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고찰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책의 나에게 유의미한 지점은,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소재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구석구석 질문을 던지게 해 주었다는 점에 있다. <눈물닦고 스피노자>를 먼저 읽었던 나로서는,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점에대해 의심의 여지 없이 수긍하고 넘어갔던 점을 반성하게 해 주었다. 질문을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철학이 가진 힘이라는 것을 나는 이 책을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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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섭 2013-01-3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죽음이란 무엇인가?" 나는 죽음이란 책을 많이도 읽어 보았다. 그러나 이책 만큼 확신을 주진 못했다. 잠깐 책속의 문장을 옮겨본다.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그 정확한 위치를 발견할 수 없을것이다. 한편 사람들은 영혼이 특정한 공간에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 영혼이 들어있는 특정한 위치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건 아닐것이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목숨어딘가 영혼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자신의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것 처럼 나 또한 내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죽는다는 것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 혹자들은 죽음후에도 산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수가 있다고 한다. "내 영혼은 옆방에서 가족들이 내는 다양한 소리를 듣는다" 우리의 영혼이 육체적 사망후에도 살아 남았다고 하면? 영혼이 육체와는 별개의 존재인지? 육체적 죽음 이후에 살아 남을지? 사람들은 영생을 원한다. 절대로 죽지않는 영혼이 존재하기를 소망한다. 삶이 끝난후에도 삶이 계속 되는가,,등 이책을 읽는 독자들은 많은 깨우침과 함께 삶의 질을 높여 줄것이다.누구도 피할수없는 삶과 죽음의 역서 이다.

꼭 읽어 보시길 바란다.
삶은 어디에 있고, 죽음은 어디에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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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닦고 스피노자 -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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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맞아! 안경세공사 일을 하며 학문을 했던 이가 있었는데! 그게 스피노자였지!"

 

  학문 그 자체가 생계와 이어지지 않는, 그러니까 학문을 '입에 풀칠하는 문제'와 연관시키지 않고 오로지 학문적 즐거움만을 위해 공부를 하는 삶에 대해 생각하던 중에, 안경세공사일을 했다는 스피노자의 이야기는 나를 고무시키는 사례 중에 하나였다. '생계를 꾸리기 위해 학문 이외의 일을 하면서도 훌륭한 사상가가 된 사람이 있어! 그래 못할 일은 없지!' 그리하야 나는 지난 2년간 묵묵히 돈을 벌었으나, 결국 일과 공부는 병행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며, 얼마 전 일을 그만두었다. '일하며 공부하기 정말 힘든데 참 옛날 사상가들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역시 넘을 수 없는 벽이었어.'하는 괴리감 언저리에 스피노자가 있었다. 어쨌든 스피노자에 대한 나의 개인적 경험은 이 정도였다.

 

  그런데 <에티카>라니...! 물론 이 책은 <눈물 닦고 스피노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 이전에 <에티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에티카>를 읽어야 해! 그러고 나서야 이 책을 읽을 수 있어!' 원전을 읽지 않고, 그에 대한 해석서를 먼저 읽을 경우 원전 혹은 원저자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몇년 전부터 해설서에 해당하는 것들을 멀리했던 터였다. 그렇기에 이 책의 선정소식을 보자마자 <에티카>에 대한 정보를찾기 시작했다. 보자하니 방대한 양에, 읽고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다는 글이 다수였다. 시간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능력의 문제로 주어진 기간 내에 <에티카>를 소화하기란 어려운 일로 보였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이 책 <눈물 닦고 스피노자>를 집어들었다. 의심의 눈초리을 가지고 뾰로통한 입을 내밀며 이 책의 첫장을 폈다.

 

  이 책에 호의를 갖지 못한 이유가 또 하나있는데, 그건 '위로'라는 단어때문이었다. 요즘 어디서나 '힐링', '치유'라는 단어들이 자주 보인다. 그런데 그런 접근들이 위로해준답시고 자기 자랑만 한다거나, 듣는 사람의 상황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위로들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친구가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진정으로 위로를 해 준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나는 제대로 된 위로를 한 번이라도 해준 적이 있는지를 생각해면 정말 위로란, 치유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요즘 여기저기서 성행하고 있는 '위로', '힐링, '치유'라는 단어는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책 표지에 그 단어가 떡 하니 박혀 있다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읽고 난 뒤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위로받고 싶은 나를 부정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시답지 않은 위로에 진절머리가 나서 위로를 부정하고, 더 나아가 위로받고 싶은 나라는 존재 자체도 부정했던 것 아닐까? 생각보다 이 책은 길을 걷다가도, 버스를 타다가도 관계망의 변화, 변용, 사랑 등의 단어들을 읊조리게 만들었다. 나오는 얘기마다 나의 얘기 아닌 것이 없었고, 그에 대한 치유론조차 나의 마음을 동요케 했다. 왜 그랬을까...?

 

  우선, 이 책에서도 데카르트나 프로이트와의 대비를 통해 분명히 드러내는 것처럼, 모든 마음의 이상 증상들의 원인을 개인의 심리상태나 고정된 자아에 두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계발서에 손이 가면서도 그 끝이 늘 허무한 것은 '모든 것이 나하기 나름'이라는 명제를 가지고 살기에는 '나 혼자만 움직인다고 해서 모든 게 변하는 건 아니더라'라는 현실을 간과했기 때문이리라. 내가 이 책을 통해 배우고 또 가장 많이 생각하는 단어가 바로 관계망이다. 이 지점은 어쩌면 미묘한 지점일 수도 있다. 내 마음의 문제는 내가 원인이 아니라, 내가 놓인 환경때문인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한다'는 말처럼 그 관계를 떠나버리면 되는 건가? 이렇게 오독이 되려는 순간에 다행히 어떤 실마리를 잡았다.

  "관계는 새롭게 배치되고 만들어 질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이 바꿔야 하는 건 태도와 마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계망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관계망을 바꿀 것인가?

 

  바로, 사랑의 실천. 내가 이 책을 통해 배운 두번째 단어이다. 사랑, 변용, 횡단, 되기 등의 단어로 나타나는 이것은 엄청난 기대에 비해서 다소 허무해 질 정도 소박한 어휘들이기는 하나, 이것만큼 개인적으로 마음에 와 닿은 것도 없는 듯 싶다. 언젠가 나만의 원리처럼 여기게 된 것인데, 내가 무언가를 정말 좋아하면, 꼭 그 결과는 기억에 남고, 기록에 남을 정도로 좋게 나왔다. 전혀 생각치도 못했는 데 말이다. 나름 이런 경험들이 쌓이게 되다 보니, 나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을 찾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를 변화시키고, 내가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준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없어진달까? 스피노자 또한 사랑이라는 것을 "미지의 것을 향한 욕망의 흐름"이라고 표현하며 관계망을 바꾸기 위해서는 "미세한 관계의 변화에 주목"하여 "생활의 작은 곳부터 혁명"하라는 말을 전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아무거나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것 또한 자주 오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변화로 이어지는 것도 아닌 듯 싶다. 무엇에 구멍이 난 걸까? 무엇이 빈 것일까?

 

  자유인이 되자! 그렇다. 마지막으로 내가 배운 단어는 자유인이다. 죽음과 욕망과 광기를 응시하는 자유인. 난 진정한 자유인이었는가? 기본적으로 유한자로서의 나를 전제하는 것이 필요했다.

  얼마 전 친구가 결혼을 했다. 중학교 때부터 어울리던 친구 7명 중, 최초의 결혼이었다. 며칠 간 좀 어리둥절했던 것 같은데, 아마도 너무 조용해서였던 것 같다. 오래 전부터 어른이 되면 겪게 될 일들, 예를 들면 결혼이나 출산 혹은 내가 바라던 무언가가 되는 것 따위는 그것이 발생하기 전에 그것을 예비하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결론에 가서는 섬광처럼 한번에 빛을 발산한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과정부터 결과까지가 하나하나 인식되고, 하나하나가 엄청나게 특별한 무언가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냥 물 흐르듯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 자체는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별게 있진 않았다. 엄마와 이런 얘기를 하다 내린 결론은 '인생 별 거 없네.'였다. 그냥 어떻게 어떻게 결혼하고, 아이 낳고, 키우고, 일하고, 그러다 죽는 것. 그러니까 이런 과정 하나하나가 특별하게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발생하는 것이라는 생소한 느낌을 처음 알았다.

  유한자 얘기를 하려다 위의 얘기를 꺼냈다. 맥락을 잘못 잡은 것일 수도 있지만, 책을 읽는 기간과 위의 일이 비슷한 시기로 맞물리면서 묘하게 오버랩이 되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인생은 별 게 없으니, 오히려 별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점이다. 유사하게, 인생은 유한하니 그것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욕망이 생성시키는 색다른 힘과 역능 속에서" "자신의 관계를 선택하고 결정하며" "창조적인 역능에 기반하여 세상을 바꾸려는" 가장 위대한 변화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내재적 역능이니...!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인이고, 내가 자유인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최근에 보고 들었던 말 중, 가장 큰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왜 사람은 예속을 영예로 삼는가?'라는 문제에 관심을 보인 것처럼, 나도 마지막엔 예속인으로서의 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인의 불안정함 대신 안정감, 정확히 말하자면 표면상의 안정감을 선택하는 것. 마치 수면 아래로 열심히 발을 굴리는 백조처럼 말이다. "고정된 역할을 강조하는 가족은 해체"할 필요가 있다고 스피노자는 말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가? 누구나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박차고 나온 스피노자일 수는 없다. 그럼 어떻게 하지?

 

  그래서 눈에 띈 문장이 '미치도록 사랑하는 것'과 '스스로 알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책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스피노자의 말이 백번 맞는 것 같은데도 세상은 왜 데카르트와 프로이트를 중심으로 돌아가냐는 것이었다. 내가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건 스피노자를 잘 모르기 때문에가 반일 것이고, 나머지 반은 우리 모두의 용기부족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믿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오.' 혹은 '내 탓이오.'하는 것은 사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하나의 사상이 오랜 세월동안 이 정도의 파급력을 가지려면 쉽고 단순해야 할 것 같은데, 위의 두 사상의 그러했던 것 같다. 적극적으로 바꾸려기 보다는 상황을 해석만하고 그냥 받아들이려는 수동적인 자세가 상황을 신속하고 간결하게 정리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또한 이런 세상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그렇기에  적당한 사랑을 갖고는 위의 세 단어를 내 일상으로 끌어들일 수 없을 것 같다. '갑옷'으로부터 벗어나 낯선 상황에 뛰어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용기는 미치도록 강렬한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이 사랑은 미치도록 사랑할 관계를 찾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그러면 그 관계를 어떻게 찾지? 그래, '스스로 알아가야 한다.' "변용의 흐름이 개척해낼 새로운 지평에 접속하기 위해서 스스로 공동체와 접촉 경계면을 만드는 기본적인 방법부터 스스로가 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나를 다양한 관계망 속에 노출시키고, 기존의 관계망은 더 깊이있게 만드는 것이 내가 우선적으로 할 일이다. 자꾸 되뇌여야 할 문장이다. 그러면 이것이 나의 내면 안에 잠들어있던 자유인을 깨워 관계망의 재배치를 통해 사랑과 변용의 내재적 역능을 끌어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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