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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 한국 사회의 위선을 향해 씹고, 뱉고, 쏘다!
한홍구.서해성.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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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인에게서 ‘넌 너무 직설적이야.’라는 말을 꽤 많이, 또 자주, 듣곤 한다. 사전적 의미로는 ‘바른대로 또는 있는 그대로 말을 함. 또는 그 말’이라고 명시 되어있는데, 타인이 보는 내 모습은 우회적이지 못하고 있는 대로 그대로 말을 한다,는 의미일 게다. 나는 돌려 말하는 것에 재주가 없거니와 (실은, 직설적이라는 것이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줄 때가 많기에 몇 번 우회적으로 돌려 말한 적이 있으나 그때마다 항상 삼천포로 빠지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까닭이다.) 또 타인이 나에게 말을 할 때에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도 나로 하여금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게 하는 까닭에 타인에게 말을 할 때에 직설적이 되어버리고, 타인도 나에게 말을 할 때에 직설적으로 말하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영화라던가, 책이라던가 하는 것도 전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한 책을 좋아하는 것도 내가 가지고 있는 성향과 직결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통쾌하게 씹고, 뱉고, 쏘는 책(이라고 불리는 책)을 만났다. 그것도 현 정부,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사회를 말이다.

 

 

 

정치에 눈을 뜨면서부터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이 갑갑하게만 느껴졌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고등학교 이학년인가, 삼학년인가_ 내가 본 정치 쪽지시험은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이었다. 헌법전문을 시작으로 헌법 제10조까지 외기. 당시 그것을 외고 있을 땐, 왜 당연한 걸 외우라고 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외우라니까 외는 것, 그게 전부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 그리고 학교를 졸업했다. 바로 그 해, 그것을 처음 실현할 수 있는(혹은 있다고 믿었던) 기회가 내게도 주어졌다. 다름대통령 선거. 국민의 투표에 국가원수가 정해졌고, 그렇게 정해진 국가원수에게는 5년이 주어졌다. 그런데 바로 다음 해, 촛불시위가 일어났고, 그것에 대한 과잉진압. 여느 때보다 뜨거웠던 국민들의 분노. 국가원수에 대한 국민들의 신임 하락. 후에 국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는 4대강 정비 사업, 그리고 현재 한·미 FTA 체결 직전의 단계까지, - 국민들의 목소리는 국가원수를 감싸고 있는 권력으로부터 반사되어 그것이 국민들의 살림살이를 내쳤다. 내가 외웠던 헌법은, 태운 종이와도 같다는 것이, 그렇게까지 실감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권력을 잡는다는 건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한번 누려보겠다’와 ‘한번 바꿔보겠다’. 후자가 늘 전자에 밀려요.(p440) - 어떻게 생각을 하는 것이 옳을까. 자리가 사람을 바꾼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사천팔백만명이 부둥켜안고 살고 있는 나라에 반영되는 것이어서는 결코 안 될 말이다. - 내내 답답했다. 특히나 정치인들은, 그간 자신들을 공격했던 화살들에 대해 자신들을 변호하느라, 또 변명하느라 바빴던 것 같음은, 현재의 내가 너무 부정적이었음을 암시하는 걸까. 그들은 톡톡 내 쏘고, 그것의 파급효과만 말할 줄만 알지, 풀어놓은 것을 묶어주지는 않고, 그 자리에서 멈추는 격이다. 끈이 풀린 채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다. 우린 무얼 해야 하나. 그렇죠. 펜대 꼬나잡고 주둥이 제대로 놀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죠. 그래, 그러니까 직설이지,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결과를 기대하려 읽었다면 나와 같은 추접스러운 서운함이 생길 거라는 거. 다만, 한 가지 명시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제 1조 2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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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조명애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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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맥 이쪽에서만 진실이고, 그 너머 세상에서는 거짓말인 것이 어떻게 진실이란 말인가?” 

미셸 드 몽테뉴, 「레이몽 스봉의 변호」, 『수상록』

 

 

난,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는 한 권의 책을, 읽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읽지 않은 것도 아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읽지 않은 것에 더 가깝겠다. 결코 두껍지 않은 책, 그리고 생각보다 빽빽하지 않은 활자들로 나열되어 있는 책은, 적어도 나라는 사람에게는 그곳에 아무런 애정도 가 닿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활자만 읽어 내려가야만 하는 책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매력이 없다. 나는, 책을 읽고 난 후,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어떤 줄거리인지조차도 가늠하지 못하고 책을 덮기에 이르렀음이, 나는 정말 편독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구나,를 새삼 깨닫게 된다. ㅡ 그래서, 두 번에 걸쳐 읽었다.  줄거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활자만 읽어내려간 것이 첫 번째라면, 줄거리를 알고 난 후에 읽는 것이 두 번째였다. 그래, 그제서야 눈에 들어온다. 나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책을 읽어왔던가. 그것은 비단 여유없음,을 핑계로 들기엔 부끄러움이 인다.

 

 

 

30여 년 전, 마드리드에 거주하는 알레한드로 베빌라쿠아. 그가 쓴, 아니 그가 썼다고 말하여지는 「거짓말 예찬」은 떠난 그가 남긴 걸작,이라고 불리워진다. 작품의 출판기념회 이틀 후, 그가 자신의 아파트 발코니에서 투신 자살을 하기에 이르른다. 그는 분명 신예 작가로 촉망받을 수 있었는데! 도대체 왜? 어째서? - 그의 죽음을 기자인 테라디요스가 재조명한다!

 

 

 

테라디요스는, 알레한드로 베빌라쿠아와 가까이서 생활한, 네 명을 목격자로 꼽는다. 첫 번째로, 알베르토 망구엘(작가 자신)이 화자로 나오는데, 그는 베빌라쿠아의 어둡고 우울함에 가득찰 수밖에 없었던 삶 전체를 아우른다. 철도 참사로 인해 돌아가신 그의 부모를 대신해 엄하기만 했던 외할머니에게 밑에서 자랐던 그에게는 분명 결핍이 존재했고, (개인적으로) 그가 그것을 사랑으로 대체하려고 했음도 눈에 띈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언제나 힘겨웠고, 그것 결핍을 더욱 증가시키는 꼴이 된다. 후에, 그라시엘라와의 만남에서 결핍이 채워지는가 싶었는데, 독재에 저항하던 그녀는 그의 삶을 안아 다독거리지는 못하고 그대로 헤어지게 된다. 뒤이어 감옥에서의 고문이라던가, 저자 자신 몰래 출간된 작품 「거짓말 예찬」은 그에게 최고조의 우울을 선물하고, 결국 그는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고 화자는 그를 그렇게 ‘변호’하고 있었다. 두 번째 화자, 저자 몰래 작품을 출간했던 베빌라쿠아의 에스파냐 애인, 안드레아. 그녀는 베빌라쿠아의 「거짓말 예찬」이 자신으로 하여금 불러일으켰던 감흥을 이야기하며, 그의 책을 출간하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세 번째, 감방 동료였 마르셀리노 올리바레스 (돼지라 불리워진다)의 이야기는 독자의 머릿 속을 혼란시키고, 미궁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가령, ‘어? 뭐야? 오마이 갓. 같은 거. 그는 「거짓말 예찬」의 저자는 따로 있으며, 그 저자가 다름 아닌 자신,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네 번째 화자, 티토 고로스티사. 이 사람은 누구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안 보여. 아무것도 안 들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라고 시작되는 그의 첫 문장은 죽은 사람,을 연상케했고, 역시나_ 어쨌든 그는, 다른 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점을 보였는데, 세 명의 화자는, 「거짓말 예찬」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에, 네번 째 화자, 그만은 그것을 볼품없는 작품이라며, 꾸밈이 많고 젠체하는, 특색 없고, 생기 없는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무래도, 난 티도 고로스티사의 ‘두려움에 대한 참작’은 두어 번 더 읽어봐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ㅡ 그리고 기자 테라디요스의 독백. 그는 어떠한 결론도 내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 즉시, 만나게 된다. 자신의 베빌라쿠아를.

 

 

 

한 사람의 삶을 타인의 눈을 통해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타당성이 있는지,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한 사람이 생애를 산다는, 아니 살아낸다는 것은, 돌연적인 요소가 무수히 많아서 타인의 생애를 두고, ‘그의 생애는 -였을 것이고, -였을 것이며, -였다.’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우리도 유명인의 죽음을 두고, -였을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을 꼬집는 한 마디가 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_ 진실은, 그 생애를 살았던 오직 단 한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말이다,  그것을 다른 시각에서는 볼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은, 그 사람의 어떤 생애를 보고, 듣고, 느꼈느냐의 차이인 게다. 나 또한,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을 대하는 것에 차이가 있듯이, 그도 그렇지 않았을까_라는 것, 그것의 간극은 이해해줄 수도 있지 않은가 싶은 것. 하지만 「거짓말 예찬」을 두고 벌이는 저자 논쟁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베빌라쿠아가 살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상, 네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가 된다.

 

 

 

오탈자 : 그것들을 조금만 다른 방식으로 배치하면, 어럽쇼! → 어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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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명의 백인신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천 명의 백인 신부
짐 퍼커스 지음, 고정아 옮김 / 바다출판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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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명의 백인 신부를 우리에게 달라. 그러면 우리는 당신들에게 말 천 마리와 평화를 줄 것이다.” ㅡ 샤이엔 족의 대족장 리틀 울프의 제안. 천 명의 백인 신부와, 말 천 마리. 덤으로 평화까지. 얼토당토않은 제안에 허허허, 너털 웃음만 나오게 만들어 버린다. 그렇다. 작품은, 그것이 이야기의 핵심이자, 또 이야기의 전체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에게서 ‘도덕성 문란’이라는 죄목으로 정신병원에 수감되어야만 했던 메이 도드. 그녀는 그곳에 갇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행방을 알 수 없을 뿐더러, 그토록 사랑하는 아이들조차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채로 평생 살아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옥죄어 옴을 감출 길이 없다. 그런 그녀에게 실낱같은 구출의 희망이 반짝,하고 빛나는 것을, 그녀가 놓칠리 없었다. 특명, ‘인디언의 아내가 되어라!’- 그래서, 그녀는, 인디언의 아내, 그것도 인디언 추장의 아내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작품은, 인디언의 아내로 살아가는 메이 도드, 그리고 다른 백인 신부들의 모습을 조명한다. 메이 도드 외에 다른 백인 여인들 역시, 벼랑 끝에서 간신히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상태에서 그곳으로 가게 된 것. 아, 이 얼마나 무자비한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도 역시, 매이 도드가 느꼈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점철지어진 구원의 손길이었으리라. 그렇기에 그녀들은 또 다른 생을 살아가듯, 매우 자연스럽고, 또 자신의 방식대로 인디언 아내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들이, 자칫 동정을 이끌기에 충분한, 어쩌면 가련한 여성상을 내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안에서 만큼은, 그 어떤 누구보다 당당함으로 똘똘뭉친, 인디언의 백인 신부일 수 있었다,고 그렇게 얘기할 수 있다.

 

 

 

꽤나 흥미가 돈다. 하지만 책을 함께 하는 한 달 여 동안, 흥미가 일었다가, 사라졌다가, 일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는데, 그것은 아마 바쁜 일상 속에 치여있던,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던 나에게 작품의 몰입이 한순간에 폭풍이 몰아치다가, 그럼에도 쌓인 피곤을 이기지 못해 쉬이 잠들어버린, 까닭일지도 모르지, 싶다. ㅡ 실은 나, 이 역사를 제대로, 아니 전혀 모르는 까닭에, 검색한 바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은 허구다. 허구도 이런 허구가 없다. 역사를 다시 원점에 두고, 인디언(샤이엔족)에게 천 명의 백인 신부를 주기를 거절했던 미국 정부가 수락하는 장면이니, 논픽션이자, 인 셈이다. 그런 제안은 있었으나, 실제로는 성사되지 않은 제안. 그것을 두고 작가는 고민했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끝을 내버리기엔 인디언들이 너무 가엾지 않은가. 인디언들과 백인들의 평등한 사회 구현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 하지만, 이러면 어떨까. 그녀들의 위치는, 비록 인디언의 아내,였지만, 그녀들은 오롯한 백인이었으니, 어쩌면 약간 더 시간이 있었다면, 평등 사회는 충분히 구현될 수도, 있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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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는 아니지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고의는 아니지만 - 구병모 소설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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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어떤 것이 말간 모습을 하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뚜벅뚜벅. 그리고, 마치, 헤어졌다 만난 연인을 만나듯이, 두 팔을 벌리는 것. 그것이 내가 은밀히 친애하는 저자의 작품을 만난 반가움을 표시하는 방법이었다. 어쩌면, 조금은 두려움이 도사렸을지도 모르지, 나에겐 전작인 「아가미」의 야릇하고 오묘한, 그러나 손을 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아가미의 ‘곤’이 그러했으니, 올해에 나는, 그보다 더 찬란한 빛깔을 지닌 이를 본 적이 없었노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아니 실제로도 나는, 그와 사랑에 빠졌을런지도 모른다. ‘강하’라는 강에서 헤엄치는 물고기 ‘곤’은, 또 물고기 ‘곤’을 품고 있는 ‘강하’라는 강은 내게 그만큼의 여운을 가져다 주었던 것. 그 까닭이었다. 그런데 그들을 탄생시킨 조물주, ‘구병모’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이 막 세상에 태동시킨, 탯줄은 잘렸지만, 생김새는 보이지 않는 어떤 아이를 안아들고.

 

 

 

비유가 법으로 금지된 S시 《마치 …같은 이야기》, 땅 속에 하반신이 묻힌 남자 《타자의 탄생》, 자신의 rule로 차별없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유치원교사 《고의는 아니지만》, 절망을 가진 사람을 먹이로 삼는 , 그리고 떼어진 살점이 부럽다고 생각하는 여자 《조장기》, 대필로 생계를 유지하는 여자가 아이를 잠재우는 방법 《어떤 자장가》, 감정 신경계를 꿰맨 남자 《재봉틀 여인》, 전자발찌를 찬 성범죄자가 성욕이 발생할 때를 조심하라 《곤충도감》 - 궁금한 게 많다. 비유를 법으로 금지한 시장 미무’(쥐와 생김새가 비슷한 그것)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도시는 종국에는, 그대로 비유를 상실한 채로 남아있을까. 하반신이 묻힌 남자는 무엇때문에 그런 상황에 놓여졌고, 끝내는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고의는 아니었지만 유치원교사의 차별없는 혹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무엇이 문제였고, 그것말고 달리 다른 해결방법이 있었을까. 살점이 승천하는 걸 보며 부럽다고 한 그 여자,는 다시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그녀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혹은, 그녀도 하늘로 승천하지는 않았을까. 설마, 세탁기와 전자레인지에 돌려진 아이가 현실은 아니겠지. 정말 말 그대로 환상일 뿐이겠지. 저자가 환상이라 말한 적은, 결코 없지만. 하지만 사람이 미치기 일보직전이면 그럴 수도 있지는 않을까. 남자는 세포를 다시 풀지는 않았을까. 재봉틀 여인이 해주었던 것처럼 흉내를 내며, 그렇게. 여자는, 그것을 해방시켜 놓으려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설마, 그래, 설마 여자의 몸 속에 들어앉은 건 아니겠지. 하는 그런거, 말이다.

 

 

 

사실 이것은 모두 ‘논리의 오류’를 범한다. 그것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말하기엔 껄끄러운 내가 사는 지금 현재를 표방한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기에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어떤 책임감을 부여하고, 그 속에서 내가 그 혹은 그녀가 된다. 그게 싫으면, 철저하게 관찰자가 되던지. 저자는 이야기를, 나와 그리고 다른 그대들과 공유하려는 걸까. 그녀와 내가 만드는 이야기를, 보고 싶은걸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아이러니하게 어떤 것이 가장 좋았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우울함이 감도는 이야기들에서 희망을 찾기란, 적어도 나에게는 불가능이다. 일곱 편의 단편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런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내가 일곱 편의 이야기들의 엔딩을, 해피엔딩으로 내지 않았거나, 이야기를 그대로 끝냈다는 것, 그것이 될게다. 아마 후자겠지. 이야기를 그곳에서 끝내고, 깜빡깜빡이며 떠오르는 물음표들을 책 속에 구겨넣고 그대로 책을 읽어가겠지. 그래서, 없다. 그냥, 다, 똑같다. - 폭발되기 직전의 화산의 움직임을 느꼈고, 폭발된 후의 화산재를 몸으로 맞았으며, 그것에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도 만연체에 호흡이 길게 끌리다가도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었던 순간, 턱없이 부족한 나의 상상력 앞에서 이야기는 끊겼다. 하지만, 최고였다. 현실과 판타지의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존재하고, 따라서 그것은 존재할 수 없지만, 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없다는 것. 현실이 상상이 되고, 상상이 현실이 된다. 내가 이래서, 구병모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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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포트 피크닉
김민서 지음 / 노블마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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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로 인해 유럽행 항공기가 결항되어 공항에 발이 묶인 사람들의 집합소, 공항_ 특별한 만남,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난다고 한 들, 특별하지 않은 만남이 있을까, 싶기도 한 것은, 나의 부정적 마인드가 다시금 꿈틀거리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적어도 그들은 같은 상황에 놓여있고,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 속에서 얽혀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내어놓는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강박되어 있던 자신을 보고, 또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보고, 혹은 자신과는 다른 마인드의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자의적이었건, 자의적이지 않았건 간에, 상처받았던 또 상처받은 자신들의 모습을, 타인에 의해 직면하게 된다.

 

 

 

작품은, 치트라 바네르지 디바카루니의 「마지막 고백」과 흡사하다. 예기치 않게 발생한 사고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만남, 그리고 각자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것, 말이다. 다만, 「마지막 고백」에서는 자신들이 살아왔던 생애 중 가장 기억에 남을 이야기 하나씩을 꺼내놓는 것, 그것이 중점적인 핵심이었다. 그럼으로해서 독자에게 던져주는 것이, ‘마지막 순간이라 생각되는 때에, 지금까지 당신이 살아온 생에서 꺼내놓고 싶은 단 하나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였다면, 「에어포트 피크닉」은 그와는 조금 다르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한정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야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 하나 더, 각기 다른 상처를 가진 사람들, 자신의 상처가 타인에게 혹은 타인에 의해 꺼내어졌을 때, 그것을 숨기느냐, 공유하느냐는 둘째치고,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다. ‘당신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합니까.’도 포함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러기엔 작품은, 터무니없이 밝다, 철부지 아이와 같이. 하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간다. - 하지만, 전자와 후자, 땡! 모두 틀렸다. 두개의 물음표 중 작품의 성질과 어떤 것이 적합하다, 말할 수 없다. 적어도 나에게 작품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타인의 상처와 자신의 상처를 공유하는 것,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에어포트와 피크닉처럼, 두 개의 제목과 같은 것이라고 해야할까.

 

 

 

상처받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자신이 아니기를 바라고, 또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래서, 종국에는 고개를 돌린다. 그게 내가 상처받았을 때 하는 행동이다. 그런 모습을 숨기기 위해서 되려, 더 당당하게, 세상을 다 가진 것과 같이 뻔뻔하리 만큼 당당하게 행동한다. 그럼으로해서 나는 내가 상처를 다 아물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직면이 아니라, 외면하고 회피하는 것이다. 「에어포트 피크닉」에서도 역시나,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자신의 상처과 동행하여 살기보다는, 꽁꽁 숨겨두는_ 작품의 생기발랄한 모습이, 상처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니. 그것을 다루는 것에서 저자는 결코, 중년이 가지고 있을 법한 중후함과 가까운 진지함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는 언뜻, 저자 고은규의   「트렁커」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전혀 모르는 타인과 상처를 공유함으로써 상처를 치유하게 되는 그런 과정도 그러하겠지만, 무엇보다, 상처를 당연시 여기는 것. 그래서, 그대도, 나올 수, 있다,라는 일종의 암시를 주어 희망을 주는 것, 말이다. 나는 이러한 작가들을 통해, 상처는, 결코 내가 생각했던 물에 젖은 솜과 같은 무거움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또 한번 느낀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나는, 아직도, 여전히_ 상처가 당연시 되는 것에 익숙해지지 못한다. 그것은, 비단 상처가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말이지, 올곧하게, 나를 성장시켜줄 그 무언가,라고 생각하는 내 고리타분한 관념같은 게 머릿 속에 뿌리를 내려 누군가가 사정없이 내리쳐도, 흔들리지 않는 그 무언가와 닮았기 때문일까. 그래서, 나는 이 작가를, 다른 작품에서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다. 오밀조밀한 그녀의 문장으로 쓰여진 그녀와 내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그 무언가, 그런거 말이다. 다시, 만나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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