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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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영화보는 재미가 참 - 쏠쏠합니다. 전에는 로맨스 영화,하면 뻔하고 뻔한 이야기들뿐이라는 생각에, 외국영화들만 찾기 바빴는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한국영화에도 눈이 슬슬 돌아갑니다. 아, 그런데 이 영화. 이재익님의 작품인 「원더풀 라디오」였군요! 저는 몰랐...스ㅂ...죠. 그냥 그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이재익 작가 얘기를 좀 한 것도 같은데, 어떤 얘기를 했나 - 잘 생각이 나질 않아요. 그냥 그 작가의 「압구정 소년들」을 첫 작품으로 읽었는데, 생각외로 꽤 괜찮았다 - 라는 것 외에는 말이죠. 영화는 달샤벳, 컬투, 이승환, 정엽, 김종국, 개리 등, 많은 카메오 출연으로 눈이 싱글싱글 웃게 만드는 영화였어요. 특히나, 배우 이광수에 대해 조금 삐딱한 시선을 가지고 있던 저였는데, 영화를 보고 나선 호감으로 바뀌었달까. 풉. 물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진부하고, 뻔한 스토리일지언정, 추운 겨울에 마음을 살살 녹여주기엔 (개인적으로) 적격이었다고 생각해요. 영화를 본 주는 일에, 사람에, 그리고 자신에 치여 지쳐있던 저에게 미소지을 수 있는 여유와, 남의 사연을 들으면서, 아니 정확히는 보면서 - 눈물을 찔끔찔끔 거릴 수 있는 감성을 선물해준 영화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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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 - 제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개정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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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삶을 너무 빨리 완성했다.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라는 목록을 다 지워버린 그때, 열두 살 이후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 열두 살_ 그때 나는 아직 어린 아이였었다. 부모가 가꾸는 온실 속에서 자라나는 화초처럼, 그렇게 컸다. 그렇기에 삶, 그 자체를 고찰하게끔 만드는 요인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삶 - 아니 정확히는 삶을 관조하는 신, 그도 아니라면, 내가 가진 운에 대해 불만을 품었던 적은 있었다. 그 표적의 대상은 언제나 내가 가진 운이었던 것 같으니까. 예컨대, 왜 내가 숙제하지 않은 날에만 손바닥을 선생에게 허락하는가 하는 그런 것 말이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머피의 법칙, 뭐 그런거. 어느 누구에게나 적어도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하는 그런 것들. 내가 말하려는 아이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정신병자인 엄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아빠는 그것을 끝으로 아이의 곁에 있어주는 것 또한 포기하며 떠나버렸다. 때문에, 아이는 외할머니댁에 맡겨진다. 사람은, 자신에게 예기치 않게 주어진 환경에서는 눈치로 산다했던가. 아이가 딱 그짝이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간파해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좀 더 나아가서는 그들의 삶을 관통해내기도 한다. 그렇게 아이의 삶에 대한 고찰이 시작되기도 하는 셈이다. 어린애로 보이는 것은 편리하기도 하지만 비상시에는 강력한 무기도 된다. 라고 말하는 아이는 자신이 어린애인 것을 악용하기도 한다. (어린애가 어린애인 척 하는 것을 두고 악용한다는 말이 잘못된 표현일지는 모르겠으나,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질 않는다.) 이렇듯, 당돌한 계집아이다. 아이의 이름은, 강 진희.

 

 

 

고달픈 삶을 벗어난들 더 나은 삶이 있다는 확신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떠난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기보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무 확신도 없지만 더이상 지금 삶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 때문에 떠나는 이의 발걸음은 가볍다. 장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눈동자를 굴렸는지 모르겠다. 당시 내가 느끼던 감정들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내 고개를 수그러뜨린다. 뻔하다. 당시의 나는, 그럴 수 없는 현실의 양면성에 좌절한 게 분명했다. 당시의 삶을 고달프다,로 이야기하기엔 약간 무리가 있지만, 문장을 보고 그 문장 자체로도 부럽다, 생각했을 정도로, 나는 지쳐있었으니까. 하지만 금세 또 화이팅,을 외치며 주먹 불끈 쥐고 웃는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도 광진테라 아줌마 만큼이나 지나가는 그것,을 (아줌마에게는 버스겠지만, 나에게는 생각은 가득하지만 실천할 수 없는, 그래서 - 기약없는 달력을) 오래도록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

 

 

 

슬픔. 그렇다. 내 마음속에 들어차고 있는 것은 명백한 슬픔이다. 그러나 나는 자아 속에서 천천히 나를 분리시키고 있다. 나는 두 개로 나누어진다. 슬픔을 느끼는 나와 그것을 바라보는 나. 극기훈련이 시작된다. ‘바라보는 나’는 일부러 슬픔을 느끼는 나를 뚫어져라 오랫동안 쳐다본다. 찬물을 조금씩 끼얹다보면 얼마 안 가 물이 차갑다는 걸 모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똑똑히 집요하게 바라보자. 진희에게도 첫 사랑,이라는 존재가 찾아온다. 바야흐로, 열두 살. 염소와 남자의 실루엣과 곧이어 들려오는 하모니카 소리. 그것은 통째로 진희의 마음속을 벅찬 느낌이 들게끔 허락하는 것이다. 그가 누구였든, 아이가 허석,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허석이었을 게다. 그게 아니면, 아이의 사랑이 짓밟히는 게 아닌가, 하는 괜한 오지랖을 부리고 싶은 내 생각일 뿐이겠지만.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랑이 깨진자리에 들어선 이별이라는 녀석을 관조하는 아이의 시선은 꽤나 서정적이기도 했지만, 오히려 냉담하다고 느끼리 만큼 냉소적이기도 했다. 사랑이 아무리 집요해도 그것이 스러진 뒤에는 그 자리에 오는 다른 사랑에 의해 완전히 배척당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장소가 가지는 배타적인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랑, 새로운 사랑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해온 사랑이 흔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사랑은 당연히 사랑에 대한 냉소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빠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다시 사랑에 빠지며, 자기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유지의 감각과 신랄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집착 없이 그 사랑에 열중할 수가 있다. 사랑은 냉소에 의해 불붙여지며 그 냉소의 원인이 된 배신에 의해 완성된다. 적지 않은 (실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엔 사랑을 느끼고, 이별의 가슴 아픔을 깨닫기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는 - 하지만, 그것을 겪는 나이가 따로 있으랴,라는 생각에) 열두 살이라는 나이에 느낀 진희의 그 감정들이 고스란히 마음에 묻혀 새싹을 새로이 돋아나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진희가 헤어짐을 이야기할 때의 디테일한 문장들은, 나로 하여금, 노오란 고름을 짜낸 것처럼 이내 울긋불긋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금세 따끔따끔거려서 오래도록 시간을 들이는 부분 중 한 부분이었다. 완전히 헤어진다는 것은 함께했던 지난 시간을 정지시킨다. 추억을 그 상태로 온전히 보전하는 것이다. 이후로는 다시 만날 일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시간에 의해 지나간 시간의 기억이 변형될 염려도 없다. 그러므로 완전한 헤어짐이야말로 추억을 완성시켜준다. 현석오빠와 완전히 헤어짐으로 내 첫 키스라는 추억의 박제는 완성되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야기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 없이 생기는 미운 정은 그보다는 훨씬 질긴 감정이다. 미운 정이 더해져 고운 정과 함께 감정의 양면을 모두 갖춰야만 완전해지는 게 사랑이다. (…) 어쩌면 미운 정이란 고운 정보다 훨씬 더 얻기 힘든 무르익은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이따금 나는 성장 소설을 읽을 때면,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그것은 물론, 상대가 어린아이라는 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겠지만, 내 어린 시절을 꺼내어 들추어 볼 수 있다는 데서 생기는 너그러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장 소설들 중 가장 좋았다고 생각하는 외딴방(신경숙)의 ‘나’, 구경꾼들(윤성희)의 ‘나’, 나의 아름다운 정원(심윤정)의 ‘동구’를 대할 때의 나의 시선은 어릴 적 내 모습을 바라보는 것마냥 따스함이 감돌았다. 하지만 작품의 ‘진희’의 열두 살을 바라볼 때에는, 스물 다섯의 나와 동등한 수평선이 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지배적이다보니, 약간은 냉소적으로 바라본 부분도 있긴 있을 터다. (어느 부분인지 나조차도 지각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가끔은 어쩔 수 없는 진희의 어린아이같은(아, 어린아이에게 어린아이같은,이라니. 이보다 아이러니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모습에 나도 모르게 반가웠달까. 이모는 할머니가 낳은 딸이고, 나는 할머니가 낳은 또 다른 딸의 딸이기 때문에 자신은 할머니의 딸은 될 수가 없다. 진희는 (할머니가 이모에게 가지고 있는) 미운 정을 얻기 위해 함부로 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 완전한 사랑은 자신의 차지인데도, 미운 정을 가진 이모를 질투하고 부러워하는 게다. 그것은 급기야, 기우제 때 바치는 처녀 이모와 자신 중, 어두컴컴한 동굴 속으로 자신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된다. 그것이 진희가 가진 간절함이다. 어른스러운 아이였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리 이리저리 굴려 애늙은이로 만들어버렸어도 - 아이는, 아이었던 것이다. 진희가 가진 외로움이 녹여지지 않은 것처럼.

 

 

 

이제 성숙한 나는 삶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 어린애의 책무인 ‘성숙하는 일’을 이미 끝마쳐버렸으므로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내게 남아 있는 어린애로서의 삶이 지루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진희는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스스로 성장을 멈췄지만, 나는 아직도 성장이 필요하다. 현재 올해로 스물다섯 해를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은 내가 아직도 이해못하는 많은 괴리를 참아내라,고 요구하는 것만 같고, 그 괴리를 감당해내기에 나는 정신적으로 아직도 한참 어리다,는 판단에서다. 작품을 접하며 많은 부분에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류를 범했고, 그것은 작품을 음미하는 것을 반감시켰는데, 그것은 - 아이를, 아니 진희를 어린 아이로만 생각했던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분명, 열두 살에 성장을 멈춘 진희는, 서른 여덟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열두 살 - 일텐데 말이다. 그래서, 난 그녀를 배척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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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3-08-03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 잘 읽고 가요.
이 때의 독서록은 따로없고 다시읽을때마다 책의 여백에 년월일과 단상들을
끄적이곤 했는데..서른여덟을 다가가는 지금,
님의 글속에 진희가..
오롯하게 제,가 되어버리는군요.
조금 더 어린 진희.
 
모르는 여인들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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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의 마지막을 장식하고자 구매했던 신경숙 작가의 모르는 여인들은 2011년과 2012년을 이어주는 마지막이자 첫 책이 되었다. 한 번에 주루룩 - 읽을 수 있을줄 알았던 일곱 편의 단편을 한 달 반 가량이라는 시간이 걸리도록 읽었는데, 책을 다 끝냈던 어젯 밤, 차라리 그래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안도감이 밀려왔다. 혹자는 책 속에 담긴 이야기들의 본질은 ‘소통’이라 하였고, 또 작가도 그리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것에 하나를 더 보태고 싶다. SOS! 구해줘! 그에 따른, 순환.

 

 

 

고향에 잠시 들른 순옥언니가 가는 게 싫어 언니의 신발을 숨기던 나,는 언니의 부츠 속에 자신의 발을 넣어보고 생각지도 못한 (예컨대, 순옥언니가 자신의 등을 쓸어주는 듯한) 위로를 받게 된다. 단절된 시간 동안, 불의의 사고로 깨어났으나 자신의 상황에 세상과 완전히 작별을 고하고자 했던 순옥언니는 깨어나긴 했으나 어린애가 되어있었고, 낙천아저씨의 죽음으로 그곳을 찾게 된 나. 그리고 그곳을 떠나기 위해 신발을 찾는데, 신발이, 없다? 나의 신발을 숨겼을 순옥언니,를 바라보는 눈빛에 따스한 기운이 감돈다.

 

단절되었던 소통이 원할하게 되다. 위의 「세상 끝의 신발」에서는 ‘신발’이 소통이라는 끈을 이어주는 역할이라면, 「화분이 있는 마당」에서는 여자가 만들어준 오이무름이 나의 소화 장애와 언어 장애를 치유하며 그간 하고 싶어도 못했던 말을 하게 함으로써 나,의 숨통을 트이게 한다. 어두워진 후에」에서는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범에 의해 가족을 잃은 남자가 있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더불어 살인이 직업이라는 연쇄살인마의 말 또한 이해할 수 없어 방황을 하던 중 한 여자의 삶에 잠시 들어간 남자는, 그 여자의 삶을 통해 세상을 다시금 살아갈 원동력을 얻게 되며,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성문 앞 보리수」에서는 독일로 떠난 친구의 말 못할 사정을 듣기 위해 십 년을 기다린 S. 함께 벼룩시장도 가고 마라톤에도 참가하게 된 둘은 비로소 소통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며 또 다른 친구인 수미의 상황도 함께 내어놓는다.

 

“오빠, 올케의 왼손이 사실은 오빠에게 하고 싶은 올케의 말을 대신하고 있는 거 아니야?” 반면에 아이러니하게, 소통을 단절하는 동시에 원활하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가 지금 풀숲에서」에서 외계인손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내의 왼손은 아내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옆에 있는 물건을 집어 던지기도, 남의 물건을 슬쩍 훔치기도, 퇴근하고 들어온 나(남편)의 따귀를 후려치기도 한다. 남편은 그 길로 집을 나가는 것으로 소통은 완전히 단절이 된다. 하지만 남편은, 풀숲에 누워 아내가 자신과 결혼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아내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다. 무자비한 아내의 왼손은, 소통을 단절일까, 화해일까.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들을 생각하고 있으면 너무 막막하고 곧 안절부절못하게 됩니다. 적막이 마음 안에 쌓이고 쌓여 비명을 지르고 싶어져요. 어느 때는 귓구멍을 손으로 막고 가만히 있어볼 때도 있죠. 그런데 소리를 듣지 못하는 고양이들은 움직이는 것이나 흔들리는 것에는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더군요. 바람결에 무엇인가 흔들리면 혼절하도록 그 움직임을 따라다녀요. 방에 어쩌다 개미가 지나가면 방바닥의 조그만 개미를 주시하며 사뿐사뿐 따라다니다가 기어이 개미를 발로 차기도 해요. 창밖 나무 위에 새가 날아와 앉으면 창문에 달라붙어 새의 움직임을 끝도 없이 지켜보곤 하죠. A를 다시 보게 되면 말해주고 싶어요. 저 귀머거리 고양이들이 소리를 못 듣는 대신 움직임에 민감한 것에 대해 말이에요. 매사가 그런 이치라면 좋겠어요. 한구석이 모자란 대신 다른 구석이 풍성하다면 살아 있는 것들의 균형은 저절로 이루어질 텐데. (p215)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 둘이 있다. 하나, 「숨어 있는 눈」에서는 길 잃은 고양이(도둑고양이)를  키우는 A. 점점 늘어나는 고양이때문에 집을 나가버린 남편과 그로 인해 고양이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 후배. A는 행방은 돌연 묘연해지고, 그렇게 A의 남편과 후배가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알고보니, 고양이는 귀머거리.

 

 

내게는 영원히 찾아올 것 같지 않았던 평화가 거기 있었다. 다시 한 사람을 향한 격정 속에 빠져서 매 순간을 휘둘리고 싶지 않다. 한 사람을 욕심내는 일은 격정만 주는 게 아니라 절망을 함께 준다. 그래서 가차없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입혀버리기도 한다. 그 격정과 절망 속에 다시 나를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p232) , 「모르는 여인들에서 나,는 관절때문에 수술을 받은 남편을 두고 스무 살때 연인이었던 채를 만나러 간다. 왜 롯데백화점 앞에 서 있는 나를 보고 그렇게 도망쳤어?라고 묻는 채에게서 한 노트를 건네받게 된다. 노트에는 채의 아내와 가정부가 번갈아 쓴 노트였고, 초기에 주된 이야기는 -해달라, -해놓았다로 시작되고 끝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노트에는 두 여자의 우정이 싹트게 된다. 채의 아내는,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는 비밀을 가정부인 여자에게 이야기한다. 그때문에 채가 그녀에게 그런 물음을 해온 것. 나,는 채를 만나고 돌아와 남편의 메마른 발가락을 하나하나 펴서 닦아주기에 이른다.

 

 

 

이렇듯, 신경숙은 특유의 감성으로 가슴 언저리에 묵직한 무언가를 얹어준다. 그래서 좋다. 그녀의 글이. 읽고 나면 - 여유가 없어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던 머리가 조금씩 돌아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까닭이다. 이번에 나온 모르는 여자들,은 생각 만큼 기대감을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비단 단편이라는 틀에 박혀있어서,라는 까닭만이 아니고, 「딸기밭」에서처럼 단편만이 아니라 중편도 있을거라 생각했던 착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짧게짧게 끝나는 이야기가 아쉬워 이야기 하나를 끝내놓고서도 개운치 못한 어떤 것은,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은 욕심이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젖을 충분히 먹고서도 허기가 가시지 않아 칭얼칭얼대는 아이처럼, 나도 칭얼칭얼대는 격이다. 나는 오늘도 신경숙의 강에서 허우덕댄다. 가능하면, 슬픔에 빠진 사람들 곁에 오랫동안 남겨졌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말은 마음을 징 - 하게 울린다. ps. 하지만, 작가의 작품에 실려있는 해설은 왠만하면 가능한 한, 없었으면 싶다. 항상 작가의 글을 읽고 나면, 그것이 방해가 된다. 작가의 글을 읽으며, 아니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사유했던 모든 것이 한순간 물거품되는 순간이랄까. 느낌이란 게, 오롯하게 읽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같은 것인데, 그걸 채 느끼기도 전에 - 해설을 따라야 한다는 것. 그것은 참, 마음에 안 차는 일이 되버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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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3-08-03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처음, 제가 인터넷으로 책을 구입한 사건(응?!)이고...
또,정말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여인에게
닉네임만 알던..여인에게 선물로 보낸 책이었죠.
무심하게..무심한 마음으로 읽어보라고...하하하

모르는 여인들"을 시작해 놓곤...저역시 허우적 대느라..
작가의..지난책..아름다운 그늘"을 다시 꺼내서..거실에선 ..여인을..
침대에선 그늘을"....서성서성 거리느라...
오래도록 손에서 놓지 못한 기억이...

그리고, 내가 위로받기위해
즐기던 어느 공간이..어느덧
나를 구원하고 밝음으로 너그럽게 만들어주고있음을..
알게되면서..모르는 이들과의 소통이..글로써 가능함을
고마워하게 되었다는...
 
깊은 슬픔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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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은 언제부턴가, 참 그랬다. 뽑지 못하고 놔둔 사랑니,같은 것. 지니고 있으면 통증이 일었고, 내쳐버리자니 공허함이 감돌았다. 내가 그의 작품을 처음 접했던 작품, 「엄마를 부탁해」도 아니요, 「엄마를 부탁해」의 후유증으로 읽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렸던 「기차는 7시에 떠나네」도 아니었다. 참고로, 많은 독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는 「엄마를 부탁해」를 ‘후유증’이라는 명사를 붙였는데, 그건 긍정이 아닌 부정이다. 난 그 책을 읽고 그를 자칫, 다시는 만나지 않을 뻔 했으니까. 감히, 그를 내 작가로 만들어야겠다, 고 생각하게 만든 「기차는 7시에 떠나네」가 아니었다면, 난 그의 책을 한 번 들추어나 보았을까, 싶을 정도로 「엄마를 부탁해」 ‘후유증’은 너무나도 심각했다. 그리고 후에 「외딴 방」은, 나의 방 문으로 들어온 그를, 주저앉히기에 충분했다. 그것이다. 사랑니와도 같다, 고 이야기하는 까닭이. 신경숙,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읽으며 느꼈던 약간의 아쉬움은 그의 단편 혹은 중편으로 짜여진 「딸기밭」으로 달랠 수 있었다. 언제고 읽어봐야겠다, 했던 「깊은 슬픔」을 그의 신간 「모르는 여인들」의 소식을 듣자마자 그것을 읽기 전에 느긋하게 읽어야겠다, 며 들었던 것. 그를 만나다.

 

 

 

 

 그들이 각자 지닌 사랑의 형태는 삐뚤빼뚤하여 균형감이 전혀 없어 온전하지가 못했다. “네가 그러고 있는 한은 나는 어디다 마음을 둬야 할지를 모르겠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할 텐데…… 네 생각을 하면 오싹해졌다 더워졌다…… 하늘이나 땅이나 어디라도 솟아버리거나 꺼져버렸으면…… 다 그런 거지. 다른 사람이라고 무슨 방법이 있으려고, 다들 이러겠지, 싶다가도……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마음끼리 보태져서 할 일이 있을 텐데…… 서로 돋아나게 하고…… 살고 싶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한 건 그러기 위해서였는데…… 왜 그렇게 멀어지기만 하는 거지? 왜 내가 곁에 가지도 못하게 하는 거지? 내가 무얼 잘못했어?” 사람들은 흔히,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진다,고 말한다. 작품도 그 말을 따라간다. 세는 은서에게, 은서는 완에게. 그리고, 완은 은서에게, 은서는 세에게. 그들은, 무얼 잘못한걸까. 사랑이 말한다. 너희들이 못한 건, 아무 것도, 없어. 라고.

그 여자 이야기를 쓰려 한다. 이름을 은서라 짓는다. 사랑이 불가능하다면 살아서 무엇 하나, 가끔 우는 여자. 언제부턴가 내 속에 내가 먹이를 주어 기른 여자.

 

나는, 은서였다. 나는, 완이었다. 또 어느샌가, 나는, 세였다. 철저하게 나는, 그들이었다. 사랑이 전부였던, 그녀, 혹은 그. 그들은, 서로에게 고향이었다. 버팀목이었고, 안식처였으나, 한편으로는 도망치고 싶은 곳,이기도 한. 그렇게 사랑이 시작된다. 아니, 시작된다고 말해야하나, 이미 시작이 됐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시작은 애초에 없었다,고 말해야 하나. 어쨌거나 언제부터인지 모를 사랑이 각자의 마음에 자리메김이 된다. 은서의 사랑이 슬펐고, 완의 사랑이 슬펐으며, 세의 사랑이 슬펐다.

 

 

 

 

투명해.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물 속처럼 다 보이지. 그리운 얼굴이 불의 일렁거림 속에 비치고, 외롭게 한 것들, 자꾸만 밀어내기만 하는 것들이 다 비치지. 불 앞에 오래 있으면 마음이 솔직해져. 밑바닥이 다 보여.

 

여담이지만, 작품을 읽으며 전에 근무하던 직장 상사 하나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원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사랑을 잘 할 줄 안대요. 리라씨는 사랑 받는 게 눈에 보여요. 그래서 연인에게도 참 잘 할 것 같아요.’ - 그래서였을까. 은서, 완, 세. 그들은 분명, 서로에게 사랑을 주었고 또 사랑을 받았지만, 그러면서도, 아니 그래서 외로웠다. 자기가 원하는 시기에,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지 못할 뿐더러, 자신이 상대방에게 주는 사랑은 허공에서 유영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이 했던 사랑이라는 자리에는 눈물 방울이 몽글몽글하게 맺혀있는 건지도.

 

 

 

 

하지만 저 순간은 곧 지나가리. 이 청명한 봄날 아침의 저 순결한 목련잎은 곧 누렇게 되어 가벼이 떨어지리. 그렇다 할지라도 지금 목련은 무슨 일을 터뜨릴 것처럼 그렇게 아름답다.

 

그리고 화연. 작품 속에서 화연은 두 명, 아니 두 마리, 아니 두 번 등장한다. 세의 작업실에서 가져 온 석류를 밟은, 은서 앞에 그녀가 초인종을 누른다.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다가 간다며 문을 열어달라는 그녀. “미안해요. 정말 아무런 뜻도 없었어요. 그냥 날이 밝을 때까지만 아무런 얘길 하질 않아도 좋으니 누군가의 옆에 있고 싶었던 것뿐이었어요.” 은서와 화연, 그녀들은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상처로 인해, 누구보다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데리고 있던 ‘수’,는 그녀의 사촌이자 남자에게 넘어가고, 그는 그것을 화연,이라 부른다. 은서 그녀 역시. 그렇게 부르면, 정말, 화연인 것 같아서. 화연아, 화연아, 화연아.

 

 

 

 

너는 너 이외의 다른 것에 닿으려고 하지 말아라. 오로지 너에게로 가는 일에 길을 내렴. 큰 길로 못 가면 작은 길로, 그것도 안 되면 그 밑으로라도 가서 너를 믿고 살거라.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도 그가 떠나기를 원하면 손을 놓아주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을 받아들여.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처음부터 너의 것이 아니었다고 잊어버리며 살거라.

 

울,컥. 결국 내 눈 끝에도 눈물이 맺혔다. 나 좀 데리러 와, 대신 한번 와, 라는 말로 대신했던 은서의 동생, 이수. 은서에게 누나, 누나, 누나 - 부르던 이수가 떠올라서 급작스레 우울해졌다. 내가 작품에서 가장 많은 정을 준 인물. 은서도, 완도, 세도, 화연도, 혜란도 아닌, 이수. 서평에 쓰진 않았지만 실은, 은서가 개인적으로 쓰고 있는 이야기 두 편이 소개된다. 은서가 이수에게 읽어주는 것, 하나. 이수가 은서에게 읽어주는 것, 두울. 첫번 째 이야기는 정을 줄 수 없는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라고 한다면, 두번 째는 떨어져 있지만, 끔찍이도 생각하는 동생 이수에 관한 이야기, 같다. 그것을 이수가 은서에게 읽으며 도중에 이건 내 얘기야. 누나 나 맨날 업고 다녔잖아!” / “거긴 여자 동생인걸. 그래도 너를 업으면 내 등이 따뜻했지.” - 은서가 정신적으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존재, 이수,는 어떻게, 지내니? - 난, 신경숙이라는 브랜드가 더 좋아졌다. 난 정말, 당신이, 좋아요. 아니, 당신의 손 끝에서 뭉그러지는 글들이,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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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3-08-03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든 시기에...
깊은 슬픔"은
필사의 힘으로
저를 견디게 해준.
그런 책.

그녀,신경숙.
그 사람이..책을 쓰지 않았다면..
아마도 저는 이미 정말 없었을 사람.이라고.
 
그냥 눈물이 나 - 아직 삶의 지향점을 찾아 헤매는 그녀들을 위한 감성 에세이
이애경 지음 / 시공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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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다투고,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나를 위로해주지 않는다며 그에게 말하지 못한, 또 말하지 못할 서운함을 안은 채로 통화를 하던 어느 날, 마침 그는 쉬는 마지막 날이었고, 그는 나에게 오겠다고 했다. 아니야, 집에서 쉬어. 라는 나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아니, 갈게. 라며 굳이 오겠다,고 했다. 응, 그래. 라며 전화를 끊고 그와 만나서 맥주 한 잔을 기울이고, 달달한 것을 먹고 싶다는 내 말에 커피를 한 잔 마시러 갔었다. 핸드폰을 따닥거리고, 카메라를 찰칵거리며 괜찮아졌다, 생각했는데, 급작스레 나도 모르는 눈물이 흘렀다. 그런 내 모습에 놀란 그는 나를 데리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나가자,라며 나를 끌었다. 그랬다. 그의 쿵쿵쿵 뛰는 마음에 움찔거리며 실룩대기만 하는 내 마음을 마주대어 달래보고자 하였는데, 그러면 좀 나아질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렇지를 못했다. 그를 기차에 태워 집에 가는 길에, 나는 올칵 눈물을 쏟아내었다. 나는 그런 내 마음이, 누군가를 향한 서운함이길 바랬고, 그리움이길 바랬고, 외로움이길 바랬다. 그것도 아니라면 차라리, 분노이길 바랬다. 그렇게 하여, 누군가에 의해 풀리기를, 절실하게 바랬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것도 아니었고, 그 누구도 위로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음을.

 

 

 

작품에 쓰여 있는 타이틀은 딱, 맞아떨어졌다. 당시 내가 지니고 있던 감정,과. 모든 것이 불안했고, 휘청였으며, 또 그것은 느릿느릿했다. 혼란스러웠다. 여름을 보내고, 겨울이 오기 전 - 손님처럼 잠시 들렀던 가을이 까닭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날이 추워지면 그것이 얼어야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으니. 절망스러운 사실은, 그런 내 마음이 까닭 모를 공허함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모를리 없었던 내가 있었다. 그 공허함의 근원지는 엉켜있던 마음, 그곳을 채 메우지 못한 간극,이었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딩동댕,하며 실로폰을 두들기며 정답입니다! 하고 외쳐줄까. 누가? ...... 내가? ...... - 그런 상황에서 책과 마주했다. 「그냥 눈물이 나」 라고 쓰여있는 책의 제목은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멈칫했다. 그렇기에 책을 읽어야했고, 그렇게 책이 손에 들어왔다. 이건, 저자의 일기장인데, 내가 왜 그렇게 읽고자 갖은 애를 썼는가. 초점없는 눈으로 책을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고, 읽으려다 말았다. 공허함에 뭔가를 채워넣는다는 것이 무서웠다. 뭘 채워넣어야 할지, 아니 채워질 수나 있을지, 공허함에 외로움을 덧대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그러기를 몇 날 며칠. 그래서 비로소 책을 든 날이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해 내질 못한다. 그저, 무미건조한 눈동자가 책을 훑고 지나갔음을 기억해내는 것 말고는.

 

 

 

작품은, 내 마음에 여유가 없어, 저자의 여유롭게 살랑거리는 목소리를 내쳐버리고 밀쳐버린 채로, 그렇게 읽혀졌다. 그러다가 멈춘다. 멈춤과 동시에 미동도 않는다. 음악에서 보면 말야, 음이 진행할 때 자연스럽게 이끌어주는 버금딸림음이란 게 있어. 쉽게 말하면 ‘도’와 ‘솔’ 사이에 있는 ‘파’ 같은 음이야. 도는 도라는 음만으로도 무게가 잡히고 솔은 솔이라는 음만으로도 편안하게 들려. 하지만 파라는 음은 뭔가 좀 불안해. 미로 내려가던지, 아니면 솔로 올라가던지 둘 중 하나의 방향으로 가야만 비로소 음이 안정되거든. 서른넷은 그런 나이야. 서른다섯의 버금딸림음 같은 나이인 거지. 서른아홉도 마찬가지고. (p170)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 했다. 그것,이었을까. 저자가 말한 버금딸림음이, 어찌 서른넷에만, 혹은 서른아홉에만 국한되는 말이겠는가, 말이다. 자꾸만 눈이 그곳으로 옮겨가는 걸 보니, 그것이 까닭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짐짓 강하게 든다. 응, 지금은 내가, 당신이 말한 버금딸림음 시기인가 봐요. 이천십일 년, 십일 월, 현주소에서 내가 위태로운 상태로 두 다리로 지금을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이, 절망스럽게 느껴지면서도 다행이라 느껴지는 것이, 그것이요. 조금 있으면, 지나갈까요. 당신도 그 시기를 겪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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