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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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려령 작가의 책을 처음 만난건 <완득이>였다. 그 책은 처음 읽을 때 사실은 아주 많은 추천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나에겐 별 감흥이 없어서 그것을 끝으로 김려령 작가를 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책이 작년즈음 새로 출간되었다는 <우아한 거짓말> 소식을 듣게 되었지만, 전작의 여파때문인지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나의 그 사람이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자꾸만 울컥하게 되서 채 읽지를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보고 꼭 읽어보라며 자신이 다 읽고 넘겨주겠다고 해서 얼떨결에 읽게 된 책이다. 받자마자 어떠한 내용인지 짐작도 못한 채, 표지가 참 예쁘다... 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읽고 있던 책을 끝낸 직후여서 그 자리에서 바로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지만 , 마음 속에서 울컥하는 내용이라기에 조금 덮어두었다. 그 전에 읽은 '벽장 속의 아이'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아픈 마음에 또 한번 칼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음을 달래줄 책을 두어권 읽고 나서야 이 책을 펼쳐들고 무슨 내용이건 김려령 작가의 글을 좇기보다는 이 책을 쓸 때의 마음을 따라 읽겠노라고 생각하며 첫 문장을 눈으로 따라 읽었다. 그 문장은 안그래도 간신히 달래놓은 내 마음을 지뢰밭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

 

 

 

천지는 열네살이라는 숫자만으로도 예쁜 나이에 자살을 선택했다. 안타깝다는 마음이 들어야 마땅하지만 왜 그랬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튀어나온다. 작가의 글을 따라가다보면 그 질문의 답을 찾게 된다. 어느 날 아침 몇 달이나 남은 생일선물로 mp3를 사달라고 하는 천지에게  전세 보증금을 올려줘야 한다며 거절하는 엄마. 그 날 천지는 세상과 작별을 고한다. 고작 mp3라는 이유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모르는 뭔가가 있을거라며 언니인 만지는 천지가 남겨놓은 흔적을 따라 천지가 닿았던 자취를 좇게 된다. 원인은 화연때문이었는데, 화연 역시 집에서 생계에 바쁜 부모님 대신에 학원으로 돌려지게 되고, 그로 인해 제대로 된 사랑 한번 못받은 화연은 애정 결핍이 생기게 됨으로서 아이들에게 애정을 받기 위해,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천지를 골탕먹이고 친구라는 위선적인 명목 하에 천지를 거리낌없이 가지고 놀게 된다. "애들이 자꾸 나만 술래 시켜." "안 한다고 해." 그렇게 얘기해봤어요, 엄마. "그래도 자꾸 시켜." "그럼 걔들이랑 놀지 마." 그럼 나는 누구랑 놀아, 언니? 그날부터입니다. 친구에 대해 더 이상 엄마와 언니에게 상의하지 않게 된 때가. (p20) 천지는 분명 가족에게 SOS를 청했지만 엄마와 언니, 그 누구도 대수롭게 생각하는 이가 없었다. 아이의 보호막 , 울타리 역할이 되주어야 할 가족의 무관심의 끝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내가 학교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한 반에 한명씩 왕따가 존재한다. 내가 중, 고등학교 때는 왕따라는 개념이 확연히 달랐다. 중학교 때는 한 아이를 두고 괴롭혔다고 한다면, 고등학교 땐 아이들이 놀아주지 않는 아이를 왕따라고 칭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무리를 지어다니는 애들을 일컫는 말도 되었다. 우리는 그들을 두고 끼리끼리 논다라고 칭하기도 했고, 그들이 지나가면 수군수군대기 일쑤였다. 읽으며 나는 누구였을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같이 어울려다니는 애들 앞에서는 웃다가도 싫은 사람이 말을 걸면 정색하며 싫은 티 팍팍 내며 무표정하게 대답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고보면 나는 화연이나 주변 아이들보다 더 끔찍했던 것 같다. 누가 누구를 왕따시키든 말든 관심도 없었기에 그것에 동조하지도 않았으며 난 내 할 일만 하면 되었다. 간혹 아이들이 꺼려하는 그들은 나에게 말을 시키곤 했는데, 사실 나는 그게 무척이나 싫었다. 내가 같은 처지가 될까봐 싫었던 것이 아니라, 애들이 싫어하면 그런 이유가 있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 책을 읽고 화연이와 주변 아이들을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며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그들을 욕하면서 이야기를 읽어내려갔다. 우리는 누굴 피해자라 부르고, 누굴 가해자라고 하는가. 그런 상황이 다시 온다고 한다면, 나는 천지와 같은 아이들을 감싸안아줄 수 있을까? 아니, 사실 그러진 못할 것 같다.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 천지는 회의감이 얼마나 들었을까, 나같으면 난리났었겠다고 생각하며 천지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착하디 착한 천지는 그러지 못했다. 털 뭉치 속에 엄마, 언니, 미라, 화연, 그리고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편지를 남겨두고 세상과 안녕,하고 돌아섰다.

 

 

 

우아함을 가장하여 가해지는 멸시는 극단적인 '죽음'이라는 선택을 코 앞에 두게 만든다. 그들은 죽기 전 유서를 쓰고, 그 유서에는 짐작컨대 이렇게 적혀져 있을 것이다. '내가 죽음으로서 너희에게 복수할 것이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왜 그런 안타까운 상황을 만들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얘기하진 않겠다. 하지만 정말 복수하는 길은 그 안에서 살아서 행복하게 사는 길 뿐이다. 사실 나같아도 내가 싫어하는 골칫덩어리가 없어지면 룰루랄라하겠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은 나는 무서워서 생각지도 못할 자살이라는 것을 뻑하면 한다. 그래서 유명연예인이 죽었다고 하면 '또 죽었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들릴 때도 있다. 나는 사실 자살한 그들을 두둔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불쌍하다 여기지도 않는다. 그저 그들 자신이 힘들고 괴로워서 찾은 돌파구일 뿐이다. 그들은 매우 이기적이라서 남은 사람 생각따위는 애초에 하지 않는다. 하지만 썩은 물에 고기를 넣어둔다고 그 고기가 온전히 살지 못하는 것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살으라고 독촉할 수는 없는 일이고 또 그만큼 괴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보니, 세상은 생각했던 것처럼 화려하고 근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리 세상을 버렸다면 보지 못했을, 느끼지 못했을, 소소한 기쁨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애초에 나는 큰 것을 바란게 아니니까요. (p227) 작가의 말을 보고 또 한번 느낀다. 아무 대가없이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 먼저 내미는 손이 그들에게 절실할 것이라고. 그러면 내가 힘들어 할 그 어느 날에 그들이 내 손을 꼬옥 쥐어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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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장 속의 아이
오틸리 바이 지음, 진민정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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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심리학자 오틸리바이가 써내려간 프랑스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책을 써내려간다. 새 아빠에게 장에게서 전 남편이 떠올려진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던 어느 날 , 다섯살 난 아이의 당연한 행동일 수 있는 침대에 오줌을 쌌다는 이유만으로 벽장에 갇히게 된다. 아이는 엄마에 의해 자기가 오줌을 싸서 벌을 받는거라고 인식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9개월이라는 짧지않은 시간동안 벽장에 갇히게 된다. 나는 1인칭 서술에서 아이의 눈으로 옮겨가며 느낄 수 있는 아이의 내면 심리 파악이 오틸리 바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가장 눈 여겨 보았던 것 중 하나였다. 아이는 처음엔 엄마가 자신을 꺼내줄거라 믿고 있고, 자신이 반성할 때까지만 벽장에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이 자꾸 보채면 보챌 수록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엄마가 새 아빠에게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벽장에서 버티게 된다. 하지만 엄마는 늘 희망만 갖게 할 뿐,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않고, 새 남편인 폴과의 아이 '노엘'이 태어나면서부터는 그조차도 철저히 외면해버리며 무관심의 끝을 향해 내달린다. 그것을 알아차린 아이의 마음은 아.. 정말 상상하고 싶지가 않다. 왜 그 아이가 다섯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벌써 그런 감정을 느껴야하는지조차 또한 이해불가였기에 분노는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제발 폴, 내가 이렇게 빌게. 떠나지 마. 나 당신 없인 못 산다는 거 잘 알잖아. 애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그렇지만 떠나지 마, 떠나지만 마……" (p25) 도대체 세상 어디에 이런 정신나간 엄마가 있단 말인가. 남의 아이가 아닌 온전히 자신의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끔찍한 정도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다. "엄마, 머리는? 머리 안 잘라줄 거야?" "됐어. 나 시간 없어. 다 씻고 갈아입었지? 그럼 어서 네 벽장으로 들어가." (p139) 엄마는 아이의 자리가 벽장이라고 생각하는 듯 , 네 방으로 들어가라는 평범한 말처럼 네 벽장이라는 말도 안되는 말을 자연스레 내뱉는다. 다시 암흑이, 구덩이가, 삶이 아닌 삶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그곳, 벽장. (p113) 벽 장속 귀퉁이에 있는 어둠이 아이를 잡아삼킬 듯 옆에서 숨죽이고 있을터다. 낮에도 햇빛은 커녕 빛도 보지 못하는데 , 밤이면 얼마나 더 끔찍한 공포를 느끼게 될까.. 아이의 허덕임을 보면서 '죽지마, 죽지마'를 연발했다. 읽는 내내 입이 바싹바싹 말라오는데도 물 한 모금 마실 수가 없었고, 책을 잠시 내려놓고 화장실을 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물을 두고도 마실 수 없고, 화장실을 바로 옆에 두고도 갈 수 없음과 아이가 고스란히 받았을 고통이 더해져 곧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내 숨통을 미친듯이 흔들어댔다.

 
 
 

1982년 8월에 프랑스에서는 '다비드 비송(david bisson)' 사건이 크게 문제가 되었다고 했다. 나는 그것을 이 책을 통해 알았고 , 이 책이 그 실화를 모티브로 삼은 소설이라는 것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다비드는 4살부터 12살이 되던 해까지 8년이라는 시간동안 학대를 받아왔다고 한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몇 년은 욕실의 수도관에서 지내고 , 몇 년은 새아빠와 엄마가 쓰는 침대 다리에 묶여 지내고 , 그러다 발견되기 전까지는 벽장에 갇혀 지내야 했다고 한다. 또한 , 아이에게 토사물을 억지로 먹이기도 했고 , 물을 가득 받은 욕조에 머리를 쳐박아야 했고 , 펄펄 끓는 물에 손을 넣어야만 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학대를 받아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번 들어 여전히 ( 아니 , 더 심각해진 ) 전세계에서 아동학대가 심각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고 ,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가장 최근 아동학대 가해자 83%가 부모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TV 프로그램 중 'SOS 24시'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 노인학대 , 부모학대 , 아동학대 등 여러방면으로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있고 , 고립되어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사회 속에서 돌보아준다. 그 중 아동학대로 나왔던 사례 중 작년즈음에 '멍투성이 둘째'라는 제목으로 나왔었는데 , 미숙아란 이유로 짜증이 난다며 5살된 아이에게 엄마가 무자비하게 때리는 일이었다. 정말이지 볼 때마다 분노와 함께 아이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니 눈물이 가슴 속에 차올라서 숨도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 이런 프로그램은 활성화가 되어야 하고 그로 인해 아동학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세상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겐 분명히 있다.


 

 


장은 소리들을 듣는다. 발소리, 엄마가 움직이는 소리, 냄비에서 나는 소리…… 마치 예전에 창문을 통해 들리던, 점점 커지던 길가는 사람들의 목소리, 자동차 브레이크 소리, 그리고 컹컹 개 짖는 소리들을 듣듯이. 그러나 지금 장에게 바깥세상의 소리들이란 바로 부엌에서 나는 소리들이다. (p47)



경제사정이 열악하고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느끼고 부모들의 이혼이 높아지면서 학대가 늘고 있다는 기사였는데 , 어른들의 잘못으로 왜 애꿎은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불안해해야하는지 이해할 수도 없고 , 이해해서도 안된다. 그들은 부모라는 명목 아래 자신이 낳은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화풀이 대상 혹은 자신의 희생양인듯 아무렇지 않게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만행을 저지를 수가 있는지 분노가 치미는 만큼이나 역겹고 , 더럽고 , 혐오스럽다. 아니 , 이런 단어로도 표현되지 않는 그들에겐 일말의 양심이 있는지마저 의심스럽다. 세상 다 등 돌려도 누구보다 아이의 편이 되주어야 할 부모가 그런다는 것이 끔찍하게만 느껴졌고 , 그 어떤 것보다 특단의 조치가 요구되어야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우리의 무관심으로 인해 지금도 우리의 미래를 짊어지고 가야할 어린 꿈나무들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벽장 속에서 한줄기 빛을 갈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너는 너, 나는 나' 라는 이기주의적 편견을 버리고, 이웃에 대한 애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위험에 빠진 아이들을 당연한 그들의 권리라는 자리에 돌려놓고 보살핌으로서 그들을 어루만져주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 현재에도 있을 아동학대에 대한 반발심으로 인해 마음에 살얼음이 하나 더 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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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늪 지혜사랑 시인선 34
권순자 지음 / 종려나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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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다란 이 세상에 시인은 계속 나오고 있지만 , 내 마음 속 깊이 동경하고 있는 몇 안되는 시인 중 윤동주 시인과 김수영 시인 덕분이다. 짤막한 시도 문학이냐며 , 시집을 읽는게 책을 읽는거랑 동급이 될 수가 있냐며 비아냥거릴 때가 있었다. 하지만 가끔 몇 백마디의 소설보다 고작 짤막한 몇 줄의 시가 더 마음에 와닿을 때가 있다. 내가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 시의 모든 단어는 우리가 상상할 수 조차 없이 많은 것을 담아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을 우리는 은유라고 부른다. 그런 시를 볼 때면 , 가끔은 멍해진다. 어떻게 이런 단어를 끌어와서 썼나 싶기도 하고 ,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을 오묘하게 조화시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시키기도 하는 마법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고등학교 때 , 수능이라는 시험때문에 우리는 정지용 , 이육사 , 김소월 , 박목월 , 박두진 , 조지훈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인들을 만났고 , 그들의 시대에서 함께 숨쉬며 그들의 문학을 이해했다. 그 때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표현의 자유마저 보장되지 않은 시대였기에 , 우리들이 만난 시인들은 은유법을 많이 쓸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을 해부하듯 , 시를 해부하는 문학시간이 즐거웠다. 그러나 지금의 시인들은 추상어 대신 구체어를 쓰기에 다분히 직설적인 면을 보이게 된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현대 내노라 하는 시인들의 시는 읽지 않게 되었음은 물론이고 , 누가 있는지조차에 대해 관심이 없다. 또한 시를 언제 읽어보았는지 가물가물해질 정도였으니 알만하다.

 

 

그러다가 정말 오랜만에 두께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작고 얇은 시인 권순자의 시집을 손에 들게 되었다. 저자가 궁금해서 , 좀처럼 잘 보지 않는 작가소개를 제일 먼저 보았다. 이게 왠걸 , 1958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경북대 영어학과와 국민대 교육대학원 영어학과를 졸업했으며 2003년 『심상』 신인상으로 시단에 나왔다. 시집 『우목횟집』이 있다. 짤막한 글로 4줄도 채 채우지 못하는 작가의 이력을 보니 아직 페이지를 넘겨보지 못했음에도 실망스러웠고 , 기대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읽기가 싫어졌고 급기야 인터넷에서 시인에 대해 찾아보았지만 , 헛수고였다. 제대로 된 이력이 없었다. 내가 너무 이력에 신경을 쓰느라 제대로 된 글을 읽지 못하는 건 아닐까 살짝 걱정이 되기 시작했고 , 우선은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시를 읽기 전 , 차례부터 훑어보았다. 시집을 읽기 전 버릇이다. 시집은 전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이 없어서 무엇을 먼저 읽어도 매끄럽게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그 중 '다시 일어서야 하는 이유'라는 제목이 유난히 눈에 띄어서 그 시가 있는 페이지로 손놀림이 가빠진다. 하지만 좋은 느낌은 제목뿐이었던 것일까 , 설레임보다는 실망이란 놈이 먼저 찾아와 괜스레 한숨을 쉰다. 그리고는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가 읽기 시작했다.

 

 

 권순자 시인의 시에선 바다 냄새가 났다. 어머니에서도, 아버지에서도, 심지어 사랑에서도 바다 내음새가 풍겨왔다. 나는 그 냄새를 코로 킁킁거리며 읽어내렸다. 멍하게 만드는 시는 없었고 , 마음을 동하게 하는 시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지문』이라는 시에선 예쁜 어감이 나는 단어는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매우 직설적이어서 이 시에 대한 해석이 알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처럼 모두 내보였다. 따라서 해석이 필요없는 시였다. 나는 이런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읽고는 이런 것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구나, 라는 걸 느꼈다. 그러나 『달빛 전차』에서는 은유의 끝을 보여줬다. 이제까지 보여왔던 것처럼 달빛을 뚫고 달리는 전차일 거라고만 예상했다. 아니, 사실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고 읽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시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전차가 아닌 , 욕망이었다. 그러고보니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연극이 떠올랐다. 그러고보면 전차는 , 욕망이라는 것에 자주 비유가 되는 모양이다.

 

 

 사실 시보다 더 재미있었던 것은 문학평론가인 황정산씨의 해설이었다. 황정산씨는 이 시집을 『사랑의 문신』이라 일컬으며 전체적인 것들을 종합해서 4문단으로 나누어 해석한다. 하지만 난 NO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꾹 참고 한번 더 replay 했다. 그제서야 시들이 눈에 조금씩 익게 되었고 , 이래서 시는 두세번은 번복하고 번복해서 꼭꼭 씹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그 이유라고 한번 더 곱씹었다. 그러나 답답함은 견딜 수가 없다. 정화시켜야겠다. 윤동주의 간을 읽어야겠다.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창문을 여는 것과 같이 윤동주의 시집을 찾는 내 손길은 가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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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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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신경숙의 책이 참 좋다. 신경숙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크게 미동이 느껴지지 않는 정적의 잔잔한 물결처럼 따라흐르는 강물같은 그녀의 글이 왜 이렇게 좋으냐, 하고 나에게 되묻기도 한다. 신경숙이 쓴 책의 등장인물 또한 가지각색이 아닌 , 이 사람이 그 사람같고 , 그 사람은 저 사람같은 비슷한 그녀들의 마련한 조촐한 향연이라 볼 수 있음직하다. 혹은 그녀,그들은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여주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본다. 그녀의 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 아니 그.래.서 , 매력적이다. 같을 것으로 예상되는 인물들은 각기 다른 매력을 발산하고 있어서 읽는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또한 , 한정된 공간에서 매력포인트를 발산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녀의 글이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호소력짙게 표현되고 있다. 읽어달라고 사정하지않아도 읽게끔 만드는 , 가끔은 먹먹해서 중간에 덮어버리고 싶게 만들기도 하지만 결국은 끝페이지를 향해 달리게 만드는 그녀의 글을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다.

 

 

이 책에선 윤 , 단 , 명서 , 미루 , 윤교수 , 에밀리. 하지만 화자는 윤이고 , 때론 명서가 남겼던 갈색노트 흔적들을 간간히 보여준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주도하고 있는건 윤이지만 , 우리는 윤과 단과 명서 그리고 미루의 상처와 아픔과 더불어 그들이 느끼는 불안과 고독과 시련 , 잠시나마 느끼는 행복 , 위안을 이 짧은 책 속에서 꺼내들고 보듬어주고 위로해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확 눈에 띄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들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집중하고 들어준다면 쉬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구구절절 내 얘기만 하느라 서평의 1/3을 써버린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팔년만의 공백을 깨고 명서가 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들의 대학시절 은사였던 윤교수가 죽음을 머리 맡에 두고 있는 것이 전화의 목적이 된다. 그리고 병원을 가려고 채비를 하던 윤은 책상을 돌아보고 그 순간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그리고는 과거로 거슬러올라간다. 읽으면서 시대가 80년대를 그리고 있는 것 같아서 그 시대에 태어난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구나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었다.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더라도 그들이 느끼는 감정들은 고스란히 나도 느꼈던 감정이고 ,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를 압박해올 감정들이기에 내가 윤이 되고, 단이 되고, 명서가 되고, 미루가 되어서 이 책을 읽어나갔다. 사실 시대에 대해서는 친절하게 설명해준 것도 제대로 나와있는 것이 없다. 사실 시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 우리는 아직도 사회가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을 조금 비교해보자면 지금은 국민이 주권을 가진 민주주의가 된 지금 이 마당에 (요즈음 이게 민주주의가 맞는지 의아하긴하지만.) 엄연한 그 때의 시대를 지금이라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일거외다. 컴퓨터나 휴대전화 대신에 타자기나 공중전화로 표현한 것도 시대상의 배경을 알리려고 쓴 것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지만 , 작가는 우리에게 80년대로 읽지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미래와 그의 남자친구가 시대에 의해 사라져버린 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단과 미루까지 희생양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너무 많은 요소들이 가미되어 있고 , 그런 것들은 현시대에도 주욱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들까지 끌어넣고 싶지가 않은게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 , 우리가 유심히 봐야할 것은 함께 있었을 때에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말로서는 다하지 못할 위로를 마음으로 주고 받는다. - 윤미루 / - …… / - 마저 얘기해…… 마음 속에 남겨두지 말고. / - 괜찮겠어? / - 함께 싸워줄게. - 왜? - 우린 지금 함께 있으니까. (p210) 신경숙의 책에서 상처라는 것은 기본적인 명제 아래 타인이 아니고서는 치료할 수 없는 관계의 중요성이라는 속뜻을 지니고 있는 듯도 하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책을 덮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은 프롤로그는 [내.가.그.쪽.으.로.갈.까] 였던 것이 에필로그에선 [내.가.그.쪽.으.로.갈.게] 로 변화하면서 그들에게도 희망이 비추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기에 우리 또한 절망보다는 희망에 한발짝 서서 그들을 웃으면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은 꿈을 꾼다. 누가 부르는 것 같아 문을 열고 나가보면 켜켜이 쌓인 어둠뿐이다. 나는 어둠 속에 내 발을 한 발 내딛고 그냥 서 있다. (p81) 나는 꿈을 꾸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내가 꾸고 싶은 예쁘고 아름답고 생기발랄한 모습의 꿈은 결코 나를 찾아와주지 않는다. 나를 찾아오는 건 매우 지독하고 고약한 꿈일 뿐이고, 그것을 꾸고 일어나면 어둠이 나를 맞이한다. 나는 어둠에 익숙해지려 노력해도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다. 회색빛 머금은 척 하는 검정색은 점점 짙어져서 본래의 색으로 돌아와 나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그 공포는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구렁텅이로 몰아넣기보다는 내가 공포를 느끼지 못하게 하려고 어둠에서 나를 꺼내주려 애쓰지만 , 결코 나를 해방시켜주진 못한다. 또 , 여느 때엔 캄캄한 것을 빌미삼아 어둠이라는 유령은 내게 소중한 어떤 것을 가져가려고 애를 쓰고 , 나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친다. 예를 들면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있으면 눈을 잃어버린 꼴이 되버리는 것과 같은 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잘 때 불을 끄고 자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 누군가덕분에 불을 끄고 나면 눈을 질끈 감고 스르르 힘을 놓아버린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잠을 청하는 것은 아직 내게 무던히 노력해야하고 앞으로도 노력해야할 숙제로 남아있다.

 

 

 

윤은 도시에 익숙해지기 위해 도시를 걷는다고 했다. 걷는 윤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찾아냈고 그것을 접목시키니 윤이 내가 되고 , 내가 윤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윤과는 조금 다른 이유로 걷는다. 스무 살 때 고약한 일을 겪었다. 난 그로 인해 방황했고 , 매우 슬퍼했다. 그래서 시끄러운 음악이 함께 하는 곳에서 함께 술을 마셨고 , 그들은 내가 술을 좋아해서 마시는 거라 그들 편한대로 생각하며 단정지었다. 날이 지날수록 몸이 더이상 버텨주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고는 몇 개월을 술로 의지했던 생활을 단숨에 놓아버리게 된다. 그리고 택한 것이 잠이었는데 , 꿀 때마다 악몽을 꾸었고 , 급기야 마음을 편하게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고 산책을 시작했다. 그런 산책은 도보로 이어진다. 도보라고 칭했더니 얼굴이 화끈거리고 민망해지기까지해서 주위를 한번 스윽 , 둘러보게 되는걸 보니 난 그냥 걷는 것일 뿐이었던가보다. 나는 사람들이 걷는 이유를 몰랐고 , 지금도 모른다. 전에는 시간이 남아도는지 , 교통비가 없는지 , 운동을 하는지. 무슨 이유가 있어야만 걷는거라 생각해왔던 내가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왁자지껄했던 마음 속이 잔잔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고 , 그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지금도 마음이 불편할 때면 무작정 걷는다. 누군가 스트레스 해소법을 묻는다면 , 난 주저없이 걷는 것을 추천하지만 , 내 주위의 지인들은 절레절레 고개를 젓기 일쑤다.

 

 

 

 

이 소설에서 어쩌든 슬픔을 딛고 사랑 가까이 가보려 하는 사람의 마음이 읽히기를, 비관보다는 낙관 쪽에 한쪽 손가락이 가 닿게 되기를, 그리하여 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언젠가'라는 말에 실려 있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꿈이 읽는 당신의 마음속에 새벽빛으로 번지기를……(p378)

 

청소년기를 앙드레 지드나 헤세와 함께 통과해온 세대가 있었다면 90년대 이후엔 일본 작가들의 소설이 청년기의 사랑의 열병과 성장통을 대변하는 것을 보며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한국어를 쓰는 작가로서 우리말로 씌어진 아름답고 품격있는 청춘소설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내가 지금 쓰려는 소설이 그런 소설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지금 청춘을 통과하고 있는 젊은 영혼들의 노트를 들여다보듯 그들 마음 가까이 가보려고 합니다. 더 늦기 전에요. 청춘에만 갇혀서는 또 안되겠지요. 누구에게든 인생의 어느 시기를 통과하는 도중에 찾아오는 존재의 충만과 부재, 달랠 길 없는 불안과 고독의 순간들을 어루만지는, 잡고 싶은 손 같은 작품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p374)

 

이 책은 프롤로그로 시작해 에필로그로 끝이 난다. 아니 , 정확히 말하자면 작가의 말로 끝이 난다. 나는 에필로그 , 프롤로그 , 전체적인 내용보다는 작가의 말이 가장 가슴에 박히는 말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청춘을 통과하고 있는 나에게 어떤 책이 청춘소설이 될 수 있었을까. 사실 이 서평이 계속 늦어지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도저히 나의 그 한 권을 찾지 못하겠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책들도 그저 그때뿐 , 그 이상의 가치를 느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나에게 청춘소설이 되기란 무리가 있을 듯하다. 하지만 이 책은 적어도 방황하는 내 마음을 다잡아주기엔 충분했다고 생각된다. 또한 , 이 작품에서 가장 흔하고 흔하게 쓰이는 말 중 하나는 '언젠가'라는 단어이다. 그 단어는 불안한 현재를 꽉 잡게 만들어주는 원천이고 ,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이 책 중에서 단연 돋보였던 점은 타인에겐 어떻게 다가갈진 몰라도 나에겐 번역된 일본의 청춘소설보다 더욱 더 값진 청춘소설이었다는 점이다. 이정도면 신경숙은 이 소설을 쓴 목적을 한 독자에게 오롯하게 전해졌다고 볼 수 있겠다. 함께 있을 때 , '오.늘.을.잊.지.말.자'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소망하기보다는 먼저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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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8 제너시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7
버나드 베켓 지음, 김현우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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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은 내 안에 머무르는 거야. 내가 세상 안에 있고, 세상도 내 안에 있는 거라고.

나를 통해 우주가 스스로 알아가고, 그 어떤 기계도 나를 만들어낼 수는 없어. 내가 바로 의미야.”

 

 

 


이 작품에서 우리는 정확한 년도를 알 수가 없다. 처음엔 제목에 2058이라는 특정 숫자가 들어가있기에 2058년을 그리고 있는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 세명의 시험관과 아낙시멘더가 '아담 포드의 삶과 그의 시대, 2058년부터 2077년까지'라는 주제로 면접을 봄으로써 이미 책에서는 2077년조차 훨씬 뛰어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발버둥쳐도 살 수 없는 시대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안고서 등을 꼿꼿이 펴고 책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혼란에 빠져있던 어느 날  , 2032년에 사우디 아라비아 서방측이 의도적으로 자행한 것으로 보이는 테러가 발생했고 , 그로 인해 촉발된 전쟁으로 세계는 걷잡을 수 없이 혼란 속에 빨려들어가게 된다. 그 전쟁으로 인한 폐해로 인류가 멸망에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된다. 그러나 인류가 직면했던 진정한 위험은 정신의 쇠퇴였다고 말하고 있다. 즉 , 타인을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는데 , 사람들은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고 , 따라서 그 문제에 당당히 맞설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그에 플라톤은 한 섬에 정착하게 되고 그곳을 외부 세계와 철저히 격리시킨 채 공화국을 만들어낸다. 그리고는 공화국 주민들에게 안정과 질서에 바탕을 둔 사회를 창조하는 것만이 위대한 인류문명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안이라고 역설했다. 플라톤의 해결책은 급진적이지만 , 공포에 질린 상태의 사람들은 플라톤의 비전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주민들은 게놈 해독을 거친 뒤에 노동자, 군인, 기술자, 철학자로 나뉘게 되고 , 플라톤의 철저한 통제 아래서 지배되며 살아가고 있다.

 

 

 

책을 읽을 땐 몰랐는데 , 책을 다 읽고 서평을 쓰려고 폼잡고 앉아서 등장 인물의 이름을 끄적끄적대다가 피식 - 웃음이 나왔던 이유는 , 이 책의 등장 인물들은 철학자 이름을 빌렸다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 , 페리클레스 , 플라톤. 따라서 적어도 그들이 어떤 주장을 내세웠었었는지 알게 되면 이 책을 읽는 재미를 한껏 더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다 알진 못하더라도 이 책을 읽는데 문제는 전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측면까지 노린 작가의 세심함은 나를 경악케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 나는 이 책에 왜 이런 제목이 붙었는지 궁금했다. 구약성서 제 1권인 창세기를 뜻하는 genesis. 그러니까 아담 포드의 삶이 시작한 2058년이 되는 것일수도 있고 , 혹은 gene+sis를 더한 단순한 제목일 수도 있다. 하지만 '2058 제너시스' 잠시나마 대한민국의 프랜차이즈 기업의 자동차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책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우리의 미래는 결코 밝지않다. 아니 , 너무 어두워서 손전등을 켜보아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 어디서부터 해결 책을 찾아나가야 하는지 손도 대지 못할 정도로 어둡다. 그런 우리에게 작가는 이제 니들 몫이다 라며 , 경고장과 함께 염려하는 글을 듬뿍 담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한낱 소설 속에서 전해주는 경고장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그 결말이 어마어마하게 끔찍하다.

 

 

 

인간과 기계의 차이는 인간에겐 복합적인 감정선이 마구잡이로 연결되어 있어서 변수가 많지만 , 기계는 프로그램 자체에 문제만 없다면 소모품만 갈아주기만 하면 변수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읽으며 생각과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는 아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인지 , 아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고 , 그것은 자유다. 하지만 미래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아트의 말에 손을 들어줄 수가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항상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길 바란다. 우리는 조만간 우리를 대신해서 로봇이 청소를 하고 , 음식을 해주는 둥 우리를 대신해 무엇이든 해주는 그런 세상. 그러다가 로봇이 우리보다 우위에서 세계를 지배하려고 든다면 , 우리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런 세상이 오는 날을 고대하고 기대하고 있다. '2058 제너시스'에서 보이는 끔찍한 미래는 당장의 혹은 영원한 편안한 삶을 누리기 위한 인간의 욕심에 대한 처벌이 아닐까. 특정한 누군가가 내리는 처벌이 아닌 , 인간이 인간에게 내리는 벌. 그때쯤이면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테지만 , 내 후손들이 살아갈 미래에 대한 걱정에 소름이 돋고 , 가슴이 쿵쾅거리며 , 안절부절 못하겠다.

 

 


"나는 기계가 아니야. 기계가 어떻게 아침의 풀잎 냄새와 아이의 울음소리를 알겠어? 나는 내 피부에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의 느낌이고, 나를 덮치는 차가운 파도의 감각이야. 나는 절대 가 본 적 없지만 눈을 감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장소이고, 다른 이의 숨결과 그녀의 머리카락색이야."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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