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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여름 - 내가 그리워한 건 여름이 아니라 여름의 나였다 ㅣ 아무튼 시리즈 30
김신회 지음 / 제철소 / 2025년 7월
평점 :


여름에 태어난 나는 여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장마철이 태어났음에도 여름의 뜨거움은 견딜 만했지만 여름의 습함은 더없이 견디기 어려워했다. 누군가 여름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저 신기해서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여름은 결코 내게 좋아할 수 없는, 절교하고 싶은 친구였다.
나는 한여름의 끝에서 <아무튼, 여름>을 읽었고 나의 여름을 기록하고 싶어 가까스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여름이 갔다, 여름은 갔다. 여름도 갔다. 2025년 나의 여름은 덥다, 뜨겁다로 점철되었지만 어쩐 일인지 살 만했다. 라고 귀결되었다. 너무 더워 못 살겠다,라는 말을 하면서 가을이 언제 오는지 손꼽아 기다리지 않아도 된 여름은, 내가 기억하는 한 최초일 것이다. 2025년의 여름은 뜨겁고 춥고의 연속이었다. 유월 말에는 여름의 날씨라기보다는 서늘했다가 갑자기 뜨거워져 신체의 부적응을 만들어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비온 뒤에도 땅의 지열이 내뿜는 습함도 예년보다는 덜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어쩌면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함께 일하던 협력업체 소장이 내게, “올해는 비가 많이 왔어요.”라고 했는데 나는 그것에 대해 동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구든 기억하고 싶은 대로, 편집해서 기억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편리한 도구임에 분명하다.
올해 나는 너무 많은 여름들을 목격했다. 그들의 여름을 보면서 내 여름은 유난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정적이었다. 그렇기에 올해 나의 여름은 견딜 수 있었다. 누군가는 땀을 한 바가지로 쏟으며 자재를 날라야 했고, 누군가는 숨을 쉬기 어려운 밀폐된 공간에서 특정 작업을 해야 했고, 누군가는 땡볕 아래에서 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들의 여름은 길고 지난했을 것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입장이었음에도 나는, 언제든 시원하고 추운 바람이 부는 에어컨 밑으로 숨을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나의 여름은 누군가들에게 미안함을 표현해야 하는 계절이었다.
16. 여름은 담대하고, 뜨겁고, 즉흥적이고, 빠르고, 빠르면서도 느긋하고 너그럽게 나를 지켜봐준다. 그래서 좋다. 마냥 아이 같다가도 결국은 어른스러운 계절. 내가 되고 싶은 사람도 여름 같은 사람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김신회 작가도 여름 자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여름의 생동감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나 역시 여름을 좋아한 적은 없지만, 여름을 느끼게 하는 것들을 좋아한다. 이게 또 무슨 말이냐 하면,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떠난 계곡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하다가 고기를 먹기 위해 뭍으로 올라오던 기억, 평상에서 수박을 먹는 것, 선풍기를 틀어두고 대나무 돗자리에 벌러덩 누워있던 기억, 집에서 들리던 매미소리, 사랑해마지않는 거봉과 머루포도, 푸릇푸릇한 숲속, 비가 세차게 내리는 소리, 퇴근 후 살얼음이 동동 떠있는 시원한 맥주, 건조기가 필요 없는 뜨거운 볕에 보송보송하게 마르는 빨래들, 여름에 듣는 K-POP, 그리고 여름이라는 단어가 주는 동글동글함. 그리고 히사이시 조의 <summer>
여름과 관련된 것을 생각보다 좋아하는 것을 깨닫고 흠칫 놀라게 된다. 여름을 견딜 수 없으면서도 여름을 견뎌낸 나를 기특하게 여기는 일은 매년 반복된다. 지겨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계절이다. 어쩌면 나는 여름이 끔찍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이 책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끔찍했던 여름이 조금은 완화가 되는 느낌일 것 같아서.
책 속의 밑줄
32. 좋아하는 게 하나 생기면 세계는 그 하나보다 더 넓어진다. 그저 덜 휘청거리며 살면 다행이라고 위로하면서 지나다 불현듯 어떤 것에 마음이 가면 그때부터 일상에 밀도가 생긴다. 납작했던 하루가 포동포동 말랑말랑 입체감을 띤다. 초당옥수수 덕분에 여름을 향한 내 마음의 농도는 더 짙어졌다.
152. 나는 하필이면 왜 여름이 제일 좋을까. 여름은 모든 게 만천하에 드러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툭하면 쿨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얼버무리는 나조차 여름에는 어쩔 수 없이 태평해진다. 뜨거운 햇빛 아래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의 잡티와 주름, 금세 벌게지는 얼굴과 속절없이 흐르는 땀, 애써 가려봐도 티 나는 군살이 신경 쓰이면서도 일순간 ‘아, 다 됐다 그래!’하고 만다. 여름에만 가질 수 있는 대범함과 무방비함 때문에 여름을 이렇게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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