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가 - 일상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파리의 관찰자 클래식 클라우드 24
이연식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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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가를 생각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발레리나 그림뿐이었다. 나는 드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가 아닌, 전혀 없는 백지의 상태에서 이 책을 읽게 되어 책이 어렵게 쓰였거나 내가 이해를 잘 못하는 부분이 많아 억지로 읽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많이 고민하기도 했고 내심 걱정도 했는데, 그런 고민과 걱정을 싹 날려줄 만큼 흥미롭게 읽었다. (아, 각 인물마다 다른 작가들이 쓰는 것이 이 시리즈의 특징인데 다른 작가의 책은 읽어보지 않아 어떤지 모른다.)

13. 그는 자연에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시선은 온갖 모순과 악덕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도시를 향했다. 사람과 현실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노동하는 여성을 그렸고, 공연하는 사람들을 그렸다. 클로드 모네와 알프레드 시슬레가 햇빛을 받은 수목과 강물을 그릴 때, 드가는 인공조명을 받으며 움직이는 발레리나와 가수를 그렸다. 드가는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었지만, 그의 작품들에는 어떤 방향성이 있었다. 그는 인상주의에 속했지만, 풍경이 아니라 인물을 그렸다. 경마와 발레를 그린 그림에서는 인물의 순간적인 동작, 역동적인 모습을 묘사했다. 그의 목표는 단순해 보였다. 끊임없이 움직이고 바뀌는 세계의 모습을 붙잡는 것.

특정 사조로 묶을 수 없을 듯한 예술가라고 표현되는 ‘에드가 드가’는 속도에 대해, 본다는 것에 대해, 진실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맞섰던 이였다. 그렇기에 추후에 사진에 대해서도 개방적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어렴풋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어떤 점에서는 귀족적, 어떤 점에서는 부르주아였기에 상승 욕구가 없었고 초연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파리의 면면을 그릴 수 있기도 했을 것이다. 돈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그런 그가, 40대에 생활고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1874년 2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큰 빚이 남겨져 집안 경제를 감당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그림을 빨리 그려서 팔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유화보다는 파스텔이 제격이라 40대에 파스텔 작품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한다. 파스텔로 그려진 그림들은 경쾌함이 강하다.

책은 드가에게 영향을 준 인물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중 모로와 마네였는데,

드가는 모로를 ‘구태의연하고 작위적인 세계에 함몰된 자’, 모로는 드가를 ‘시간과 정열 낭비하는 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둘의 관계는 오래 이어질 수는 없었다. 책의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 것은 마네였다. 드가는 온갖 기법을 잘 익히고 잘 다루는 편이어서 기본적인 순서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벨라스케스의 <스페인 왕녀 마르가리타 테레사> 모사하다가 “그렇게도 할 수 있군요?”라며 마네가 다가왔다. 마네는 드가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이였는데, 아이러니하게 마네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드가는 없었겠지만,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드가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마네는 마네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잠시 책 읽기를 멈추고 마네의 그림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있다. (책에도 마네의 작품이 꽤 많이 실려있기도 하다.)

그런데 둘의 사이는 깨어지고 만다. 마네의 그림에서 부인 쉬잔은 더 아름답게 그려지곤 했는데, 드가가 그린 <마네 부부>에서의 쉬잔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마네가 잘라내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그 그림은 이미 잘라내져 애석하게도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초상화가로서 뛰어난 역량을 생각하면 드가의 그림이 더 실제의 쉬잔과 닮았으리라 짐작하기도 한다고. 드가는 인상주의 전시회를 준비하며 마네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다. (여기서 독립이라는 표현의 근원지는 마네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드가는 없었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18세기에는 로코코 예술가들이 그린 누드화는 대중에게 공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귀족들과 군주 등이 개인적으로 주문한 것이라 대부분이었다면, 19세기 살롱에서 누드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려면 신화 속의 여신이라는 명목이 필요했다. 드가의 누드화는 관음증이 연상되지만 이상적인 육체가 아니라는 것과 그림 속 여성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옷을 벗었다는 이유로 관음증에 포함될 수 없다고 하는데, 드가의 누드화의 대상이 여성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갑자기 이전에 읽었던 존 버거의 <다른 시선으로 보기>에서의 누드화에 대한 부분들이 스멀스멀 생각나 화가 나기도 했다. (나 존버거 할 거야!)

30대에는 꽉 짜인 구도에 밀도가 높은 작품이 주를 이루었고, 40대에는 생활고에 시달려 파스텔로 경쾌함이 가중되었다면, 경제적 안정을 되찾은 50대의 드가는 우울했고, 60대의 드가는 지리멸렬했다고 쓰여있다. 어느 정도 그를 텍스트로 읽어가다 보니, 그의 삶을 어렴풋 짐작할 수 있다. 또한 30대 중반에 오른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던 드가는 말년에는 시력이 완전히 쇠했는지 촉각적이다. 파스텔이나 모노타이프로 작업한 것이 그 까닭이다. 그의 좌절은 상당했겠지만, 책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226. 나는 유명하면서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 던 드가는 그저 내 무덤 앞에서 이렇게 한 마디만 해주게나. 그는 데생을 사랑했다고.라고 주문한다. 사진에 대해 개방적, 뛰어난 판화가, 탁월한 조각가였던 드가. 새로운 것은 나는 그를 생각하면 구경하는 사람을 구경하는 화가, 바라보는 사람을 바라보는 화가로서의 발레리나 그림을 떠올리게 될 테고, 서로 화해하지도, 포용하지도 못한 채 고립된 ‘가족의 초상’인 <벨렐리 가족>을 떠올리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생을 감상(이라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하고, 그의 작품들을 이전보다 더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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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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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기나 어린이를 달리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단지 ‘작은 사람’ 정도로 인식한다. 아이를 보고 예쁘다, 귀엽다. 같은 말은 나와 거리가 멀다. 내가 아끼는 사람의 아이의 경우에는 그 사람을 아끼고 좋아하는 진심이 가닿아서 그 아이도 예뻐 보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구상에 그 작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매우 경이롭고 신기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더 나아가 작은 인간이 큰 인간으로 성장해나가는 그 과정들이 기이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으며, A의 아이 a가 정말 똑같이 생긴 걸 보면서 흠칫(!) 놀랄 때도 많았다. 딱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어린이라는 세계>가 눈에 익을 때부터, 이 책을 과연 내가 읽어도 되는 건가? 하며 주문을 차일피일 미뤄두다가 오랜만에 책 주문해야지-하며 책을 주문하는데 너무 자연스레 이 책을 주문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책을 손에 들기까지도 시간이 필요했다. 읽으려고 꺼내놓았는데 도무지 내키지 않아 화장대 한구석에서 며칠 몸을 웅크리고 있는 걸 방치해뒀다. 그러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보고 힘에 겨웠던 터라, 나도 모르게 이 책에 손을 뻗었다. 책을 구매한 것도, 책을 읽게 된 것도 나도 모르게-였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고 이 책을 주문했을 거고, 이 책을 읽었을 거라는 거지.

“어른은 어린이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내가 그동안 어린이에 대해 어떤 시선을 던졌는지를, 이 책을 읽는 내내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동안 좋아했던 어린이는 착한 어린이들이었다. 착하다의 사전적인 의미처럼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의 뜻보다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말을 잘 듣는 어린이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 씁쓸했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은 이후에 시선이 확연하게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 쓸쓸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오래도록 간직해보겠다고 다짐했다. 시시때때로 꺼내들어, 지구상의 어린이들에게 따듯한 눈길을 넌지시 건네기 위해서.

대체로 나는 저자의 말에 공감했고 동감하여 확신에 찬 끄덕임과 반성의 고개 숙임으로 이 책을 읽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지금에도, 노키즈존에 찬성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어불성설인 것 같은데 어찌하랴. 그것을 차별이라고 해도, 개인주의가 심화된 세상의 각박함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한 집에서도 배우자와 나의 공간이 분리되는 것을 원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그건 아이가 싫은 것이 아니라 내 시간을 방해받는 게 싫은 것에서 나오는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게 지탄을 받아야 하는 이유라고 한다면, 나는 마땅히 그 지탄을 달게 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어린이에서 어떤 어른으로 컸나.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어릴 때 받았던 무수히 많은 기쁨과 상처와 칭찬과 힐난과 상냥함과 따가움들을 나는 잊은 걸까. 아니, 나는 잊지 않았다. 오히려 또렷하게 기억한다. 지금의 어린이라고 다를 거 없을 텐데, 나는 어린이였던 적이 없었던 인간처럼 오만방자하게 지금의 어린이들에게 “자고로 어린이란 말이야.”라며 라떼 이즈 홀스 같은 말만 지껄이고 있는 거다. 자고로 어린이들은 뛰어놀아야지.라고 생각하는데, 야 이 바보 자식아. 정작 나는 모기차 따라가는 거 아니면 뛰는 거 싫어했잖아! 담도 넘는 거 못해서 울긴 또 얼마나 울었게? 뭐 이런 식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얼마나 훌륭하고 사려 깊으며 배려심 강한 어른인가.에 대해 또 감명받지 않을 수 없다.

과자 부스러기가 있는 과자를 주었는데, 그것을 아이는 모아 바닥에 탁~ 버리는 것을 보고 그럴 때 바닥을 치워 주고 다음에는 부스러기가 덜 생기는 과자를 대접하는 것은 내 몫의 사회생활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니? 비가 오는 길에서 우산을 쓰지 않고 걸어가는 어린이를 보며 내가 우산을 씌워 주면 겁먹지 않을까? 반대로 나 때문에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허물어지면 어떡하지?라는 양가감정의 마음이 들 수가 있다니? 와, 정말 어린이를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멋있었고, 배우고 싶었다. 이런 어른들의 안에서라면 어린이들은 비로소 안전할 수 있을 텐데,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을 텐데, 마음껏 웃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들이 나를 무자비하게 콕콕 찔렀다. 그러면서 나는 반의 반의 반도 따라잡지 못하겠지만, 좀 더 나은, 그리고 멋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스스로 나는 어른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은 할 수 없지만, 어린이들이 보기에 나는 엄연히 한 명의 어른이니까.

밑에 모래 있으면 떨어져도 안 아파요.”라는 문장을 보고 울컥할 일인가. 나는 남의 집 어른이지 않나. 그러니까 어쩌면 그게 좀 수월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남의 집 어른은 남의 집 아이에게 좀 더 따듯하게 대해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막상 양육자가 된다면, 저자처럼 따듯한 시선만을 가지기 힘들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막상 양육자인 주변 지인분들에게는 쉽게 추천해 주거나 선물을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혹여라도 괜한 자괴감이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239. 어린이날에는 누구나 새싹 모양의 배지를 달면 좋겠다.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누구나, 양육자이건 아니건 누구나. 배지를 달아 어른들은 어린이날을 축하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 어린이에 대한 존중을 되새길 수도 있을 것이다. 배지를 단 어른들은 이날 하루 마주치는 어린이들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면 좋겠다. 문을 열어 주거나 차례를 양보하거나 하는 다소 유난스러운 친절도 베풀면 좋겠다. 막상 해 보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이는 배지를 달면서 우선 자부심을 느끼면 좋겠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특별히 조명 받는 하루, 어디를 가든 좋은 대접을 받는 하루가 될 거라고 기대하며 기분 좋게 집을 나서면 좋겠다.

해가 바뀌었다. 그리고 (당연히) 어린이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어린이날 = 선물로 변질되어버린 것 같아 아쉽지만 (뭐 이건 나 어릴 때도 마찬가지였으니 새삼스럽진 않다) 어린이날에는, 이 문장들을 생각하며 길을 지날 때마다 만나는 어린이 한 명 한 명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넬 수 있었으면 한다. 그 어린이들이 자신의 날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어린이들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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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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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책이 쉬운 편은 아니었다.

나는 이 책을 아침에 한 글자씩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었는데도, ‘도대체 뭐라는 거야...’라고 읊조리기도 했다.

단어들이, 문장들이 입속에서 웅얼거렸다.

목차에는 나와있지는 않지만, 책은 크게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나눌지 몰라도, 나는

1.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에 대한 서론

2. 작품 삽화

3. 누드화

4. 작품 삽화

5. 자본

6. 작품 삽화

7. 광고

정도로 나누었다.

이 책에서 기억에 남는 건, 누드화와 광고였다.

(작품 삽화는 정말 작품만 띡띡 넣어두었다 뿐이지, 작품명은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나와있지 않아서 도대체 무슨 의미로 넣어뒀는지 알 길이 없다.)

우리가 각종 영상에서 볼 수 있는 명화들을 이제는 좀 아니꼽게 보게 될 것 같다. 명화에는 어째서, 왜, 누드화가 많지? 그것도 왜 하필 여성 누드일까?에 대한 생각을 한 번쯤 하긴 했었으나 깊게 관여하지는 않았다. ‘관여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보는 것 자체를 완전히 날려버린 셈이었다.

54.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주어진 한정된 공간에서, 남자들의 보호, 관리 아래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자들의 사회적 존재는 이렇게 제한된 공간 안에서 보호, 관리를 받으며 그 여자들 나름으로 살아남으려고 머리 쓰고 애쓴 결과로 이룩된 것이다. 그렇기에 여자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감시하고 감독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도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어려운 문제다.

벌거벗은 여자를 그리는 이유는 벌거벗은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시늉을 한다. 참 거지 같다. 또한 그림을 보는 이의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려진 누드화가 더 많다는 사실에 우리는 격분해야 한다. 여성은 남성을 기분 좋게 해주기 위해 구성되는 성적 인간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책에서는 말한다. 전통적인 누드화를 아무 작품이나 하나 고른 다음, 그림 속 여자를 남자로 바꾸어 보자고. 그런 전환이 주는 폭력은 이미지 자체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 관념에 대한 폭력이다. 앞으로 텔레비전에서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는 명화들을 바라볼 때 이전보다 더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왜 하필 그 그림이 왜 거기에?

154. 광고가 약속하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행복이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 외부적으로 판단되는 행복이다. 선망받는 행복이 곧 매력인 것이다.

이 문장은 참 모순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외부적으로 판단되는 행복과 쾌락은 어떤 방식으로 다른가? 이렇게 말하면 엄청난 광고들만 선망받는 행복을 줄 수 있음을 뜻하지만, 실제로 내가 본 광고 중 선망받는 행복을 줄 수 있는 광고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을 행복이라고 규정지어버린다면, 행복에도 가짜 행복과 진짜 행복이 생겨날 것 같은 느낌이다. 아니 어쩌면 알게 모르게 세상에는 가짜 행복이 무참하게 널브러져 있는지도 모른다.

154.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자신감의 고독한 형태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당신을 부러워하는 사람들과 당신의 경험을 나눠 갖지 않음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광고는 ‘현재의 결핍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내내 해왔었다. 그런데 책에서는 광고라는 것이, ‘미래의 구매자’를 대상으로 했다고 해서 갸웃했다. ‘그 이미지를 본 구매자들 자신이 마치 그렇게 된 것인 양 느끼게 하여 자신의 변한 모습을 부러워하게끔 한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광고를 보고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걸까. 잘 모르겠다. 내가 그런 욕구가 크지 않아서 그런 걸까. 내가 자랑할 것이 고작 나 오늘 초콜릿 하나를 다 먹었다! 정도여서 그런 걸까. 광고가 현재를 불만족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행복을 가져다준다에는 적어도 나는 부인한다.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이라는 문장은 시대가 지난 지금 훨씬 더 걸맞은 문장이 되고 있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다. 나라고 그 족속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도 나를 꽤 비참하게 하기도 한다.

책을 읽으며, 여성이 가진 고유의 성은 대상이 되어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 모두는 망각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저기에 아무렇지 않게 걸려있는 명화를 삐딱하게,가 아닌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을 때라야 진정한 평등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보는 게 고착화된 가치관이나 보편화되고 있는 생각을 좀 더 각성하게 하고 유연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서 나름대로 즐겁게 읽었다. 오늘도 존 버거 해야겠다.

덧) 오탈자가 너무 많아서 화가 날 정도였다. 번역가는 ~로서와 ~로써의 차이를 제대로 알고 번역을 했으면 한다. 정말 너무 많아서 질려버렸다.

ex. 행위로서, 거리로서, 경험으로서, 저속한 것으로서, 전체로서의, 한 시스템으로서의....

*책 속의 문장

56. 남자들은 행동하고 여자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자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 대부분의 남자들과 여자들 사이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결정된다. 여자 자신 속의 감시자는 남성이다. 그리고 감시당하는 것은 여성이다. 그리하여 여자는 그녀 자신을 대상으로 바꿔 놓는다. 특히 시선의 대상으로.

153. 그러나 광고는 쾌락의 실제적인 대상을 제공할 수 없다. 어떤 쾌락을 얻는 본래의 방식을 떠나서 정말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광고가 따뜻한 고장의 먼바다에서 수영하는 즐거움을 더욱 확실히 나타내면 나타낼수록, 광고를 보는 구매자들은 자신이 그곳으로부터 수백 마일 떨어져 있고, 수영할 수 있는 기회가 자기와는 아무 멀리 있다는 사실을 점점 더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광고가 선전하는 물건이나 기회를 아직 즐겨 보지 못한 구매자에게 진짜로 제공할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178. 광고 안에서는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광고 안에서 사건을 실제처럼 만들어 주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이내 명백히 드러났을 것이다. 광고가 보여주는 것들은 모두 장차 어떤 사람에 의해 획득되기를 기다린다. 획득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행동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고,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은 다른 모든 느낌들을 없애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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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을 기르기엔 난 너무 게을러
이종산 지음 / 아토포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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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식물칸에서 어슬렁거렸는데, 식물을 키울 때 갖추어야 하는 덕목이라고 해야 할 것만 같은 그런 서적들만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식물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담은 에세이인데... 하며 발길을 돌려 소설이나 한 권 더 빌려야지-하고 소설칸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칸을 잘못 찾았다. 여기가 아니잖아? 여긴 에세이인데. 다시 소설칸으로 가자-하다가 눈에 띈 <식물을 기르기엔 난 너무 게을러>_

저자는 무언가를 기르는 것에 소질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시작으로 “처음 길러본 동물이 뭐예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 대해 186페이지 중 65페이지를 할애한다. 나는 살아있는 동물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는 영 관심이 없기는 하지만 텍스트로 읽거나 영상을 보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찾아볼 정도로 즐기기도 한다. 단지 내가 함께 공생할 일은 앞으로도 없다는 것뿐이지. 하지만 나는 동물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려는 게 아니라 식물 에세이를 빌려온 거거든, 이렇게 동물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거라면 굉장히 곤란해-라는 식으로 굉장히 심드렁한 표정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읽다 보니 이건 식물에 대한 이야기인지, 동물에 대한 이야기인지, 아니면 본인이 이제까지 기르던 것들을 총체적으로 나열하고 싶은 건지에 대해 헷갈렸다. 분명 에필로그에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식물도감 : 시적 증거와 플로라>라는 전시를 보고 식물에 대해 마음을 빼앗겨버렸다고 고백했는데, 왜 자꾸 동물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지... 하며 책에 대한 관심이 떨어질 때 즈음 식물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19. 기르기는 행복과 슬픔이 공존하는 일이다.

저자는 식물교이고, 포켓러브라는 반려 식물도 있다. 식물을 많이 키워야만 식물에 대한 사랑이 넘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하나뿐인 반려 식물이라면서 포켓러브를 위한 지면은 쌀쌀맞을 정도로 적다. 자신의 반려 식물인 포켓러브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식물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확인하고 싶었다. 결국 나는 본인을 식물교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나는 이 책에서 찾지 못했다. 단지 식물을 빗대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책, 정도로 남을 것 같다.

덧) 냉해 입은 포켓러브가에 싹이 생겨났다는데, 잘 살아났는지 궁금하긴 하다.

* 나한테는 편견이 있다. 아니, 생겼다.

어느 순간 책에서 ‘잘 없다’라는 단어를 심심치 않게 마주하게 된다. 도대체 뭐가 잘 없다는 얘긴가?

그럴 때마다 책을 덮고 싶다.

92. 그 감탄을 바깥으로 거내놓는 일은 잘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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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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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손에 들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전에 <보건교사 안은영>과 <옥상에서 만나요>를 중도 하차했기 때문이었는데, (오래전에 ) 그 이후로 재미있어 보이는 책이라 할지라도 이 작가의 책임을 깨닫는 순간부터는 마음을 접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어떤 한 권의 책을 읽을 때 내 시간이 빼앗기는 것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냐 없냐의 문제였는데, 세상에 책은 너무나도 많고 나는 그 책을 죽기 전까지 다 읽을 수 없을 것이므로 나는 중도 하차를 하는 것에 마음이 덜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 책이 어쩌다가 선물로 내 책장에 꽂히게 되었다. 읽기 전까지도 이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재차 확인을 했다. 이 책은 어떻냐고. 긍정적인 답변이 왔지만, 어쨌든 선택은 나의 몫이었다. 정 아니다 싶으면 책을 덮어버리기로 하고 나는 어렵사리 책을 폈다.

11. “우린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낼 거야.”

심시선 씨에서 파생된 이들이 꾸려가는 이야기다.

그동안 장례를 지내지 않았지만 10주기라는 명목하에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내기로 한다.

반대는 없다. 아니, 반대를 할 수조차 없다. 심시선 씨의 가족이야말로, ‘모계사회’니까.

83. 기일 저녁 여덟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십 주기니까 딱 한 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제사가 아니라, 심시선 씨가 젊었던 시절 걸어 다녔던 하와이를 걸어 다니면서 찾은 보물들을 나누는 방식으로의 제사.

심시선 씨로부터 파생된 인물은 생각보다 꽤 많다.

여러 인물이 나온다.

자식들과 그 자식들.

자식들과 그 자식들은 주연이자 조연이고, 단역이다.

그래서 일일이 기억을 해야만 하기에 가장 앞장에 가계도가 떡하니 있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인물을 잘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과감하게 패스했고.

책을 읽다 보면 누군가에게 특별히 더 마음을 주는 인물이 생기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았다.

다 읽고 나서야 가장 마음에 많이 남는 사람을 골라내야 했는데 어쩐지 그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특별하게 누군가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않기도 했고.

288. 빛나는 재능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중간에 심시선 씨의 기록들이 챕터의 앞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야기 자체보다 그 기록이 더 좋았다. 그중 가장 좋았던 건 이 부분이었는데, 최근에 나는 울면서 “삶이 재미가 없네. 그래서 재미있는 건 안간힘을 쓰면서 찾아보려는데 잘 안돼.”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명쾌하게 답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내 변화가, 또 내가 적응하는 기간이 너무나도 잔잔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래서 문장을 읽어내려가면서 어떻게 질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질리지 않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노력해서 일구어내는 것도 그 재능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나한테도 그 재능을 옷 입히고 싶었다. 지금 나는 삶이라는 거대한 분야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지금은 잠시 ‘재미없는 시절’일뿐이라고 생각하며 질리지 않게, 지치지 않게 잘 살아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125. 첫 번째 남편도 두 번째 남편도 친구들도 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야생에서라면 도태되었을 무른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을 사랑했다. 그 무름을. 순정함을. 슬픔을. 유약함을.

세 번의 결혼을 했지만, 그 세 번의 결혼이 불행한 것이 아니었다. 방금 생각나는, 자기합리화를 해대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 ‘공누구’와는 달랐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졌고, 그 책임들은 결국 사랑으로 귀결되었던 심시선 씨.

304. “(…) 한 번에 대단한 시야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알게 되었달까. 어두운 곳에서 짚어가며 넘어져가며 탐색할 수박에 없다는 걸.”

“(…) 사랑은 돌멩이처럼 꼼짝 않고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빵처럼 매일 다시,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거래. 여전히 그러고 싶어?”

“나도 원하지만…… 살면서 얻길 바라는 게 달라질 것 같아. 다른 모양의 빵을 만들고 싶을 것 같아. 계획했던 모양이 아니라. 그래도 나랑 빵을 만들길 원해?”

“세상의 일그러지고 오염된 면을 너무 가까이서 보게 되면, 그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는 거야. 그걸 설명할 언어를 찾을 때까지는.”

화수가 남편에게 말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계획했던 모양이 아니라 다른 모양의 빵을 만들고 싶을 것 같다고. 그런데도 나랑 빵을 만들고 싶으냐고. 삶에 유연성을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사실 잘되지 않는다. 이렇게 살다가 잘 안되면 저렇게도 살아보고, 그렇게 살아보다가 저렇게 살아보고 싶으면 노선도 바꿔보고 그러고 살고 싶다.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지만 이제까지 경험한 것들이 나를 만들어 고착화시키는 것을 나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혼잣말을 한다. 그래도 틈은 만들어야지, 하고.

322. “네가 아니면 누가 낳아?”

“나보다 덜 다친 사람. 나보다 세상을 덜 괴로워하는 사람이. 뉴스를 그냥 통과시킬 수 있는 쪽이.”

전부 이해할 수 없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다름 아닌, 그렇게 생각하게 된 마음을.

313. 각자 의미있는 것들을 찾아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아 기쁘고 내년부터 평소대로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으로 돌아가겠지만 한 번 정도는 하길 잘한 것 같네요. 서로의 보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과 엄마를 떠올리는 시간을 가지며 오늘밤을 보냅시다.

그렇게, ‘종잡을 수 없이 괴팍했던 제사 비슷한 것’이 끝이 났다.

331.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참 좋겠다. 심시선 씨라는 사람에서 파생된 것이.

엄마라는 대상에 대해 생각하면 나도 이런 마음을 가져보고 싶다. 이번 생에는 영 틀린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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