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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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기나 어린이를 달리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단지 ‘작은 사람’ 정도로 인식한다. 아이를 보고 예쁘다, 귀엽다. 같은 말은 나와 거리가 멀다. 내가 아끼는 사람의 아이의 경우에는 그 사람을 아끼고 좋아하는 진심이 가닿아서 그 아이도 예뻐 보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구상에 그 작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매우 경이롭고 신기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더 나아가 작은 인간이 큰 인간으로 성장해나가는 그 과정들이 기이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으며, A의 아이 a가 정말 똑같이 생긴 걸 보면서 흠칫(!) 놀랄 때도 많았다. 딱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어린이라는 세계>가 눈에 익을 때부터, 이 책을 과연 내가 읽어도 되는 건가? 하며 주문을 차일피일 미뤄두다가 오랜만에 책 주문해야지-하며 책을 주문하는데 너무 자연스레 이 책을 주문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책을 손에 들기까지도 시간이 필요했다. 읽으려고 꺼내놓았는데 도무지 내키지 않아 화장대 한구석에서 며칠 몸을 웅크리고 있는 걸 방치해뒀다. 그러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보고 힘에 겨웠던 터라, 나도 모르게 이 책에 손을 뻗었다. 책을 구매한 것도, 책을 읽게 된 것도 나도 모르게-였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고 이 책을 주문했을 거고, 이 책을 읽었을 거라는 거지.

“어른은 어린이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내가 그동안 어린이에 대해 어떤 시선을 던졌는지를, 이 책을 읽는 내내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동안 좋아했던 어린이는 착한 어린이들이었다. 착하다의 사전적인 의미처럼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의 뜻보다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말을 잘 듣는 어린이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 씁쓸했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은 이후에 시선이 확연하게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 쓸쓸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오래도록 간직해보겠다고 다짐했다. 시시때때로 꺼내들어, 지구상의 어린이들에게 따듯한 눈길을 넌지시 건네기 위해서.

대체로 나는 저자의 말에 공감했고 동감하여 확신에 찬 끄덕임과 반성의 고개 숙임으로 이 책을 읽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지금에도, 노키즈존에 찬성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어불성설인 것 같은데 어찌하랴. 그것을 차별이라고 해도, 개인주의가 심화된 세상의 각박함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한 집에서도 배우자와 나의 공간이 분리되는 것을 원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그건 아이가 싫은 것이 아니라 내 시간을 방해받는 게 싫은 것에서 나오는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게 지탄을 받아야 하는 이유라고 한다면, 나는 마땅히 그 지탄을 달게 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어린이에서 어떤 어른으로 컸나.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어릴 때 받았던 무수히 많은 기쁨과 상처와 칭찬과 힐난과 상냥함과 따가움들을 나는 잊은 걸까. 아니, 나는 잊지 않았다. 오히려 또렷하게 기억한다. 지금의 어린이라고 다를 거 없을 텐데, 나는 어린이였던 적이 없었던 인간처럼 오만방자하게 지금의 어린이들에게 “자고로 어린이란 말이야.”라며 라떼 이즈 홀스 같은 말만 지껄이고 있는 거다. 자고로 어린이들은 뛰어놀아야지.라고 생각하는데, 야 이 바보 자식아. 정작 나는 모기차 따라가는 거 아니면 뛰는 거 싫어했잖아! 담도 넘는 거 못해서 울긴 또 얼마나 울었게? 뭐 이런 식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얼마나 훌륭하고 사려 깊으며 배려심 강한 어른인가.에 대해 또 감명받지 않을 수 없다.

과자 부스러기가 있는 과자를 주었는데, 그것을 아이는 모아 바닥에 탁~ 버리는 것을 보고 그럴 때 바닥을 치워 주고 다음에는 부스러기가 덜 생기는 과자를 대접하는 것은 내 몫의 사회생활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니? 비가 오는 길에서 우산을 쓰지 않고 걸어가는 어린이를 보며 내가 우산을 씌워 주면 겁먹지 않을까? 반대로 나 때문에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허물어지면 어떡하지?라는 양가감정의 마음이 들 수가 있다니? 와, 정말 어린이를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멋있었고, 배우고 싶었다. 이런 어른들의 안에서라면 어린이들은 비로소 안전할 수 있을 텐데,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을 텐데, 마음껏 웃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들이 나를 무자비하게 콕콕 찔렀다. 그러면서 나는 반의 반의 반도 따라잡지 못하겠지만, 좀 더 나은, 그리고 멋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스스로 나는 어른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은 할 수 없지만, 어린이들이 보기에 나는 엄연히 한 명의 어른이니까.

밑에 모래 있으면 떨어져도 안 아파요.”라는 문장을 보고 울컥할 일인가. 나는 남의 집 어른이지 않나. 그러니까 어쩌면 그게 좀 수월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남의 집 어른은 남의 집 아이에게 좀 더 따듯하게 대해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막상 양육자가 된다면, 저자처럼 따듯한 시선만을 가지기 힘들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막상 양육자인 주변 지인분들에게는 쉽게 추천해 주거나 선물을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혹여라도 괜한 자괴감이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239. 어린이날에는 누구나 새싹 모양의 배지를 달면 좋겠다. 어린이, 어른 할 것 없이 누구나, 양육자이건 아니건 누구나. 배지를 달아 어른들은 어린이날을 축하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 어린이에 대한 존중을 되새길 수도 있을 것이다. 배지를 단 어른들은 이날 하루 마주치는 어린이들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면 좋겠다. 문을 열어 주거나 차례를 양보하거나 하는 다소 유난스러운 친절도 베풀면 좋겠다. 막상 해 보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이는 배지를 달면서 우선 자부심을 느끼면 좋겠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특별히 조명 받는 하루, 어디를 가든 좋은 대접을 받는 하루가 될 거라고 기대하며 기분 좋게 집을 나서면 좋겠다.

해가 바뀌었다. 그리고 (당연히) 어린이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어린이날 = 선물로 변질되어버린 것 같아 아쉽지만 (뭐 이건 나 어릴 때도 마찬가지였으니 새삼스럽진 않다) 어린이날에는, 이 문장들을 생각하며 길을 지날 때마다 만나는 어린이 한 명 한 명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넬 수 있었으면 한다. 그 어린이들이 자신의 날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어린이들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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